예술/여러 작품들

[단원 풍속도첩]을 보고

순돌이 아빠^.^ 2010. 7. 9. 20:01

단원 김홍도라고 하면 저 같이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놈도 들어 봤을 법한 이름이지요. 어제 처음으로 그 유명한 이름의 그림책을 봤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

 

참 잘 그렸더라구요. ‘무동’이란 작품에는 장구치고 피리 불고 춤추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의 표정이나 몸짓이 정말 살아 있는 것 같더라구요. 얼굴 표정을 자세하게 그리지 않고 몇 번의 붓질로 휙휙 그렸는데도 즐거이 웃는 모습에서 진짜 북소리가 들려 올 것 같더라구요.

 


‘고누놀이’에서 보면 젊은이들이 나무 한 짐 해 오다가 집으로 가지 않고 길에 철퍼덕 앉아서 노는 모습이 보이지요. 엄마 아빠는 ‘대체 이놈은 나무 해 오라 했더니 나무를 키우고 있는 거여 머여?’하며 기다리든 말든 웃옷 벗어제끼고 노는 거지요.

 

‘씨름’을 보면 참 재미납니다. 가운데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용을 쓰고 있는 두 사람도 그렇고 이를 웃으며 지켜보는 사람들, 엿 파는 사람, 오른쪽 아래 있는 놀란 표정의 사람까지 그야 말로 씨름판입니다. 고상한 산수화에서 볼 수 없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점심’에서는 여러 삶이 한꺼번에 드러납니다. 먼저 농사일 하다 참에 막걸리 한 잔 넘기는 사람이 있지요. 여럿이 함께 먹는 걸 보니 혼자 일하지 않고 어울려 일 했나 봅니다. 옆에는 광주리에 참을 이고 온 사람이 있고, 한 아이가 엄마의 젖을 빨고 있지요.

 

여기까지만 해도 됐을 건데 그림 한 켠에는 멍멍이 한 마리 멍하니 앉아 있습니다. 말풍선을 달 수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지들 입만 입인가... 나도 배 고픈데...’

 

하지만 생각만 해야지요. 저도 먹고 싶다고 입을 내밀었다가는 ‘이 놈의 개새끼가!’하며 머리통 얻어맞기 십상입니다.

 

제가 어릴 때 봤던 시골 풍경이 정말 이랬습니다. 모네기 할 때 양쪽에서 못줄을 길게 잡고 있으면 사람들이 줄을 지어 모네기를 했지요. 참이 올라치면 동네 애들 다 몰려들고 멍멍이들도 저한테 뭐 떨어지는 게 없을까 눈을 희번덕거리지요.

 

그림 속 세상

 

‘벼타작’을 보면 농민들은 열심히 벼타작을 하고 있는데 양반 놈은 옆에서 자리 깔고 누워 담배 피며 남 일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싸가지 밥 말아 먹은 거지요.

 


김홍도의 의도가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그림은 계급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논갈이’에서는 농민들뿐만 아니라 소까지 웃으며 일을 합니다. 하지만 ‘벼타작’에서는 웃으며 일하는 사람, 찡그린 사람, 무표정한 사람까지 있지요. 양반은 ‘어디 이놈들 일 잘하나 보자’하고 있구요.

 

사실 우리가 살다보면 남들 열심히 일하는 옆에 가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 일이 아닌데도 왠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러지 않으면 미안하고 그러지요.

 

하지만 지배자인 양반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남들 일하는데 옆에서 처 놀면서도 미안한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실컷 일해 놓으면 ‘어이, 김서방 쌀가마는 광에 잘 챙겨 넣게’하면서 노동의 결과만 쏙 빼 먹겠지요. 

 

‘빨래터’를 보면 지배자의 모습이 또 하나 드러납니다. 여성들이 냇가에서 다리 걷어 부치고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양반 놈이 바위 뒤에서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여성들을 훔쳐봅니다. 지배자의 모습이라는 거는 그 놈이 양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성이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요즘 성폭행 사건이 연일 알려 지면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알려진 게 그 정도면 알려지지 않은 끔찍한 일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것이 ‘장자연’이라는 한 여성 배우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죽으면서까지 자신을 학대하고 희롱한 돈 있고 힘 있는 것들을 고발 했지만, 그 돈 있고 힘 있는 것들은 정치인도 언론도 개인도 자신의 이름조차 입에 못 올리게 했지요.

 

여성의 인권이니 법이니 언론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하는 것들은 그들의 힘 앞에서, 그들의 더러운 욕망 앞에서 자취를 감췄던 겁니다. 괴롭힘 당한 여성은 있는데 괴롭힌 놈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그 놈들은 또 뭐라고 합니까? 성폭행이 어떠니 저떠니, 거세가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차별과 폭력에 저항하고 불의에 맞서 싸울 듯 하지요. 거짓말입니다.

 

‘빨래터’의 양반처럼 정치니 언론이니 경제니 하면서 힘 있고 돈 있는 것들은 놀고 쳐 먹으면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좆의 힘을 쓸 기회를 엿보고 있지요. 그러면서 탐욕스런 모습을 누가 볼까 얼굴을 가리는 겁니다.

 

겉과 속

 

‘길쌈’이나 ‘편자박기’, ‘고기잡이’ 이런 그림들을 보면 농사짓는 모습뿐만 아니라 무지랭이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이 역사를 되짚어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 역할을 하는 거지요.

 


예나 지금이나 살아 있는 무지랭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는 것을 뭔가 수준 떨어지는 것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뭔가 고상한 것, 하늘에 있는 것, 현실과 떨어진 것을 그려야 예술스럽다고 여기는 거지요.

 

옛사람이 “닭이나 개를 그리기는 어렵지만 귀신을 그리기는 쉽다.”라고 말하였는데,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렇게나 그려서 사람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 64쪽. 강세황, 「단원기」,[표안유고]에서

 

가끔 보면 도대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자신이 뭘 그렸는지 알고 있는 걸까 싶은 그림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 색 휘익 그어놓고 추상미술이 어떠니 하는 거지요. 물론 색 하나만으로도 사람 마음을 울렁거리게 하는 경우도 아주 아주 드물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저거 뭐야?’ 싶지요. 작가들이 쉽게 편한 길로 가기 위해 눈앞의 대상이나 다른 이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보다 그저 쉽게 자신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책에서 약간 의아한 점은 다른 거는 다 한글로 되어 있는데 머리말이 영어로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이유야 저는 모르지요.

 

아무튼 여기에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습니다. 김홍도는 무지랭이들의 삶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연과 동식물도 그리고 초상화도 그렸다고 하더라구요.

 

초상화의 경우, 김홍도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 정신까지 표현하려고 했다. - 3쪽

 

그러니깐 작가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정신세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응시함으로써 그 속까지 읽어 내는 거지요. 놀랍고 제가 배우고 싶은 모습입니다.

 

좋은 그림을 만나면 마음이 밝아지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김홍도 그림 속 살아 꿈틀거리는 사람을 만나서 더욱 기분이 좋은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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