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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6]을 읽고

순돌이 아빠^.^ 2010. 7. 27. 17:12

누군가 맑스 같은 사람과 사십 년 동안 함께 일하는 행운을 잡았다면, 그는 후자가 살아 있는 동안 그가 받아야 할 만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그러나 일인자가 세상을 뜨면, 이인자가 과대 평가되기 쉽습니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의 경우인 듯합니다. - ‘엥겔스가 베를린의 프란쯔 메링에게’ 가운데, 552쪽

누군가 자신을 높이 평가하자 엥겔스가 그에게 쓴 편지 내용 가운데 일부입니다. 엥겔스의 글에서 자주 보이는 것이 바로 어떤 생각이나 발견은 자신이 아니라 맑스의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 1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글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엥겔스의 [가족, 사적 소유 및 국가의 기원]이겠지요. 저도 그랬지만 많은 분들이 이글을 읽고 나서 ‘허걱’하셨을 겁니다.

이 가족 형태의 완성된 유형은 로마의 가족이다. familia라는 말은...이 표현은, 우두머리가 처자와 일정한 수의 노예들을 로마 식의 가부 권력하에 거느리고 그들 전원에 대해서 생사 여탈권을 지니는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조직체를 가리키기 위해 로마인이 고안해 낸 것이다...이러한 가족 형태는 대우혼에서 일부일처제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아내의 정조, 따라서 자녀들의 아버지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내는 남편의 무조건적 권력하에 놓인다:남편이 아내를 살해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권리를 행사한 것에 불과하다. - 69쪽

한국에서는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고 그것도 남성과 남성, 장남과 장남을 통해 이으려는 경우가 많지요. 언제부터 인간들은 남성을 중심으로 대를 잇는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원시사 연구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남자들이 다처제 생활을 하는 한편 그 여자들도 동시에 다부제 생활을 하며, 이에 따라 쌍방의 아이들이 그들 모두의 공동의 아이들로 인정되는 상태가 있었다. - 42쪽

군혼 가족 제도의 어떤 형태에서도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누가 어머니인가는 확실하다...여기서 명백한 바와 같이, 군혼이 존재하는 한 혈통은 어머니 편에 따라서만 입증될 수 있으면 따라서 여계만이 승인된다. - 53쪽

지금과는 달리 고대 역사에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성적 선택도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순결이지 정조니 하는 것들은 남성 지배가 생기면서 시작된 말이지요.

자유로운 성 생활을 하다보니 아이가 태어나도 이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유전자 검사를 할 것도 아니구요. 하지만 엄마가 누군지는 확실하지요. 그러니 경제적 수단을 공유하고 있어서 남성이 특별히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할 일이 없는데다, 자식들까지 그 관계가 엄마를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으니 모계제 사회가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원래 그랬다는 부계제 사회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믿음일 뿐이지요.

[아마존의 눈물]의 한 장면


MBC에서 만든 [아마존의 눈물]에도 보면 한 여성에게 남편 2명과 아이 1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 2명은 아이를 함께 키우지요.

지금과 같은 일부일처제 즉, 여성에게만 한 남성과의 성적 관계를 허용하고 남성은 비교적 자유로운 일부일처제는 인류 역사의 한 시기일 뿐이지요. 하지만 여성이 좀 더 힘을 얻게 되고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 경제적 평등과 함께 성적 평등이 실현되고 여성의 선택도 보다 자유로워질 겁니다. 결혼이나 이혼도 지금보다 더 쉬운 일이 되겠지요.


애비가 누군지도 모르고, 문란하고 아무나 하고 성 관계를 갖는 그런 사회를 만들 거자는 거냐구요?


왜 애비가 누구인지 꼭 알아야 하나요? 거룩한 척 하면서 무미건조하거나 억지스런 성 관계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마음 끌리는 사람과 즐겁게 성 관계를 하면 좋지 않을까요?

믿음 2

개인이 새로 획득한 부를 씨족 제도의 공산주의적 전통에 대항하여 안전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이전에는 그토록 경시되었던 사적 소유를 신성화하고 이 신성화야말로 모든 인간 공동체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이미 시작되고 있던 계급들로의 사회의 분열을 영구화할 뿐만 아니라 무산 계급을 착취할 유산 계급의 권리와 후자의 전자에 대한 지배를 영구화화는 하나의 제도...국가가 발명된 것이다. - 122쪽

지금이야 국가라는 것이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도 그랬을까요? 혹시 시골 마을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에다 상상력을 조금 발휘해 보면 어떨까요?


읽는 내내 좋았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을 담은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한 동네에 많아야 수백 명 정도 살고, 대부분 생계는 농사를 지어서 해결하지요. 모내기 하고 타작할 때는 모두 모여서 합니다. 어느 집에서 애기가 태어나면 함께 모여 잔치를 벌입니다. 동네에서 다툼이 생기면 동네 어른들이 불러 모아 얘기를 듣고는 문제 해결에 나서지요.

이럴 때 국가라는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이의 탄생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는 거지 출생신고서에 남는 게 아니지요. 남의 집 새끼가 아프면 내 새끼 아픈 것 마냥 나서서 함께 약초를 구하고 약을 달입니다.

씨족에는 평의회가 있다. 그것은 성년의 남녀 씨족원 전원으로 이루어지며, 모두 평등한 투표권을 가지는 민주주의적 회의이다. 이 평의회는 사쳄과 군사 수령을 뽑고 또한 그들을 해임하였다. - 101쪽

이런 저런 이유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지혜와 생활 방식 등을 담은 책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엥겔스의 글에서도 그들의 뛰어난 사회제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구요.


백인들에게 쫓겨나고 죽임 당하며 쓰러져 가던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슬픈 역사를 담은 책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대표자=권력자’라는 생각은 누군가가 만든 것일 겝니다. 예를 들어 학교 반장이 권력자는 아니잖아요. 반장은 학급 회의가 있으면 회의를 진행하고 다른 반과 이어달리기 시합이 있을 때 시합날을 정하는 회의를 다른 반과 하는 정도지요. 반장에게는 학생들을 교실 밖으로 내쫓을 권리도 학생들을 두들겨 팰 권리도 없습니다.

어느 조직의 대표가 된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공동체 구성원이 함께 모여서 하게 되지요. 대표가 아무리 나이가 많고 잘 생겼더라도 구성원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여기서의 구성원은 남녀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하게 되겠지요.

유치하고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이 씨족 제도는 얼마나 놀라운 조직인가! 병사도 헌병도 경찰관도 없고, 귀족도 국왕도 총독도 지사도 재판관도 없고, 감옥도 없고, 소송도 없지만 모든 일이 말끔하게 처리된다. 모든 분쟁과 다툼은 관계자 전체에 의해, 즉 씨족 또는 부족에 의해 해결되거나 또는 각 씨족과 씨족 사이에서 해결된다. - 109쪽

억지로 하지 않고, 강제로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의 마음이 밝아지고 사회가 평안해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물이 들어와도 스스로 정화해 가는 강물과 같다고 할까요?

진보한다는 것

진리는 인식 과정 자체에, 낮은 인식 단계에서 점점 더 높은 인식 단계로 상승하는 과학의 오랜 역사적 발전 속에 있게 되었다...인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인류의 완전한 이상 상태에서 완결될 수 없다;완전한 사회, 완전한 ‘국가’란 환상 속에서만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반대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역사의 모든 상태는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나아가는 인간 사회의 끝없는 발전 행정 속에 있는 일시적 단계일 뿐이다. - 엥겔스,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그리고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 가운데, 245~246쪽

사회주의와 천국을 믿는 종교의 큰 차이는 후자가 어느 특정 계기, 예를 들어 심판의 날이나 죽음 뒤에 슬픔도 고통도 없는 완전한 세계에 이른다고 여기는 반면, 전자는 사회라는 게 끝없이 변화하고, 때로는 후퇴도 했다가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는 거지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이런 변화를 만들어갈 인간이겠지요. 사회의 상태와 관계없이 몇몇 인간들이 의지를 가진다고 해서 사회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의지 없이 사회의 변화도 없지요.


일부 맑스주의자가 극복해야할 것도 사회에 큰 위기가 오면 사회가 저절로 바뀔 것이라거나 지금은 안 그렇지만 ‘그 때’가 되면 민중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게 지금은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어느 때에는 불같이 일어서기도 하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심판의 날을 기다리지 말라는 겁니다. 탐욕이 가득한 이는 천국에 가서도 재산을 모으고 거기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만들어 자신이 높은 위치에 이르려고 할 겁니다.

현재는 미래를 품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인간, 미래의 사회를 원한다면 지금부터 그런 인간과 사회를 우리가 품고 있어야 중요한 순간이 왔을 때 세상을 바꿀 수 있겠지요. 생명을 품어야 봄의 땅이 꽃을 피우는 겁니다.

또 맑스주의 하면 토대인 경제가 정치나 법, 종교, 이데올로기 등 상부구조를 완전히 결정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엥겔스가 지적하듯이 국가나 이데올로기가 독립하여 거꾸로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경제 구조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구요.


마지막으로, 제가 한국의 진보나 좌파를 보면서 좀 아쉬운 것은 국제주의가 약하다는 겁니다.

프랑스도 독일도, 영국이 부르주아지의 손아귀에 남아 있는 한, 최종적인 승리를 확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은 국제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 ‘엥겔스가 르뻬뢰의 뽈 라파르그에게’ 가운데, 548쪽

한국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실제 별 관계가 없습니다. 역사로 봐도 그렇고 여러 가지 교류면에서 봐도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미국 제국주의가 저대로 있는 한 평화롭게 살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미국과 한국, 미국과 이스라엘이 손잡고 무지랭이들을 괴롭히거나 계속해서 전쟁을 계기로 무기 장사를 하고 있으니깐요. 무지랭이들이 열라 세금내면 미국 무기 회사 대주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지요.

고마운 사람들

올해를 시작하며 세웠던 계획 가운데 하나가 상반기에 맑스-엥겔스의 주요 글을 읽어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를 책장에 줄 세워 놓고, 읽었던 것은 다시 읽고 안 읽었던 것은 이제야 읽었습니다.

읽었다는 것은 안다거나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눈으로 글자들을 훑기는 훑었다는 것입니다. 제 짧은 머리로 그 많은 것들을 우째 다 이해하겠습니까? ^.^

일도 하고 다른 것도 읽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많은 것을 배우도 느꼈습니다. 맑스가 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은 과제인 국가나 세계시장 등의 주제는 이후의 사람들이 조금씩 해 나가겠지요. 저의 주된 관심인 제국주의라는 것이 바로 자본-국가-세계시장과 관계있는 거구요.


자본주의 사회와는 많이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 줬던 만화영화 [스머프]


계획한 18권을 읽었는데 이제 책 한권의 머리말을 읽은 기분입니다. 그만큼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거겠지요.

재주 있는 이가 노력하는 이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이가 즐기는 이를 이길 수 없다고 했던 가요. 알아 가고 배워 가는 즐거움이 함께 하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맑스와 엥겔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