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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 공동경비구역 JSA

순돌이 아빠^.^ 2010. 10. 25. 20:09

밤늦게 텔레비전을 켜보니 KBS 명화극장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하더라구요. 좋아하는 영화라 망설임 없이 끝까지 봤습니다. 어떤 영화인지 아시죠? 휴전선을 사이에 놓고 경비를 서던 남북한의 군인들이 만나 서로 우정을 쌓는다는 뭐 그런 내용입니다.

경계넘기

처음 북쪽으로 넘어간 이병헌이 하루는 자신과 함께 근무하는 남일병에게 같이 넘어갔다 오자고 제안을 합니다. 휴전선 앞에 서서 남일병은 두려움에 한 발짝도 더 옮기지 못하고 덜덜 떨지요.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 한 발짝이 그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오는 겁니다.


하지만 결국 한 발을 더 내딛고 금기의 땅으로 들어섭니다. 인민군인 송강호는 남일병과 악수를 한 뒤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이런 말을 남기죠.

따뜻하구만

제게 이 영화가 마음 깊이 남는 이유는 바로 이 5글자 ‘따뜻하구만’ 때문입니다. 국군이냐 인민군이냐, 괴뢰냐 빨갱이냐, 남이냐 북이냐가 아니라 서로 만나고 안아 보면 그저 따뜻한 심장이 뛰는 인간일 뿐이라는 거지요.

표장군이란 사람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빨갱이와 빨갱이의 적들’이라고 합니다. 경계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경계는 허물 수 없으니 어느 쪽에 설 건지만 정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분들의 뜻대로만 굴러가는 것은 아니지요. 영화 속 군인들은 온갖 두려움과 망설임과 걱정을 가졌지만 따뜻한 심장에 끌려 휴전선이라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경계를 넘었지요.

북한과 관련된 것은 모두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던 시절에도 한국에서 문익환이나 임수경 같은 사람들이 휴전선을 넘어 가기도 했지요. 경계를 넘은 이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이 다가 왔구요.

JSA에 보면 미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판문점 관광을 합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저 코리아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신기한 구경꺼리일 뿐이지요. 영화 속 이영애는 중립국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남들이 쉽게 넘지 못하는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 다니구요.

사실은 우리도 그렇게 쉽게 넘어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데 누군가 일부러 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북한이 남한보고 괴뢰라고 하고, 남한이 북한 보고 빨갱이라고 욕을 해도 사실은 괴뢰와 빨갱이가 살아 있는 게 각자의 정권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닐까요?

무찌르자고 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거지요. 만약 북한이 진짜로 민주화된다면 [월간 조선]은 당장에 기사꺼리가 없어서 허둥대지 않을까요?

초코파이

국군인 이병헌이 하루는 인민군인 송강호에게 남으로 넘어가자고 합니다. 초코파이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요. 그러자 송강호가 입에서 씹고 있던 초코파이를 손에 뱉으며 한 마디 던집니다.

이수혁이, 내 한 번만 말하겄어. 내 꿈은 말이야 우리 공화국이 이보다 더 맛있는 초코파이를 만드는 거야.

한국 사람들이 쉽게 가지기 쉬운 더러운 정신 가운데 하나가 돈이면 다 된다는 겁니다. 돈 많은 사람이 더 뛰어난 사람이고, 돈 많은 나라가 더 훌륭한 사회라는 거지요. 그래서 북한에서 온 사람은 물론이요 이주 노동자나 이주 여성들을 쉽게 업신여기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비록 돈은 좀 없고, 경제적으로는 한국 사회보다 어려워도 더 훌륭한 인간성과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과 사회가 많습니다. 돈 좀 있다고 으스대고 남들 무시하는 게 몸에 밴 한국 사람들이 오히려 참 우스운 꼬라지를 하고 있는 거지요.

자신이 사는 사회가 한국 보다 돈이 적다고 해서 모두 그 사회를 떠나 한국으로 오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설사 한국으로 왔다고 해도 한국이 천국이어서 온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왔을 수도 있지요. 어렵다고 해서 모두 자기가 사는 사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어렵지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겁니다.

한국과 예술

JSA는 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전쟁도 많고 휴전선도 많지만 한반도에 있는 휴전선은 그 의미가 좀 유별납니다. 한국의 예술가들이 세계 문화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살면서 보고 겪은 사회의 이야기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겁니다.

다른 사회에서 왔다고 모두 거부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한국의 할로윈 축제나 뱀파이어 이야기처럼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다 온 것인지도 모를 것들을 흉내 내는 것보다, 왜 그들이 그런 옷을 입고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귀족들의 음악을 흉내내기 보다 스스로 겪고 보고 있는 것들을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겁니다.

예술도 학문도 잘 흉내 낸 사람이 훌륭한 사람처럼 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거울 속에 아무리 화려한 보석을 걸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진짜 사람은 아닌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