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덕분에 오랜만에 좋은 글을 다시 읽었구나. 니가 올려준 신영복 선생의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 해 봤다.
흔히 부모가 자식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얘기할 때 쓰는 말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라는 것이 있지. 굳이 열손가락 깨물어 보지 않아도 손가락을 깨물면 모두 아플 거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어.
어느 한 자식만 사랑하지 말고 공평하게 사랑을 주라고도 하지. 그런데 부모들의 말을 들어보면 부모도 부모이전에 사람인지라 자식을 대하는 마음이 똑같지는 않더라. 똑같이 대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거지.
부모에게도 조금 더 아끼는 자식이 있고, 조금 더 골치 아픈 녀석이 있기 마련이야.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마음이 다르다고 해서 그 부모를 ‘넌 제대로 된 부모가 아니야’, ‘왜 한 녀석만 더 사랑하냐’라고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아.
A라는 자식은 지혜가 많으나 건강이 좋지 않고, B라는 자식은 건강은 좋으나 지혜가 적다고 하자. 그러면 부모로써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공평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A, B 자식 모두에게 지혜와 건강을 정확히 반반씩 선물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겠지.
A는 지혜보다는 건강을, B는 건강보다는 지혜를 조금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부모가 노력을 해야 할 거야. 불교에서 법을 말할 때는 듣는 사람에게 맞게 방법을 찾아서 말하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는 것은 내 손에 달린 것들, 손가락으로써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손가락도 그 생김새나 피부의 상태 등에 따라서 이빨이 눌렀을 때 저마다 갖는 고통의 정도나 형태는 다를 수 있을 거야. 손가락으로써의 보편성을 보면서 그와 함께 각 손가락의 특수성이나 개별성을 보는 거지.
A와 B라는 자식에 대한 산술적인 공평한 사랑이 되레 무관심일 수 있는 것은 자식 개개인의 모습을 보지 않기 때문일 거야. 개별 자식의 생각이나 감정, 몸과 마음의 상태를 하나하나 고려해서 사랑을 펼칠 때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잘 자랄 수 있겠지.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이 쓰인다고 했어. 모든 자식이 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을 쏟는 걸거야.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을 쏟는다고 해서 그 부모를 공평치 못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고.
장보러 가는 어미에게 몸이 아픈 A는 포도가 먹고 싶다고 하고, 몸이 건강한 B는 오이를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하자. 시장에 간 어미는 과일 가게에 먼저 들르게 될까, 아니면 야채 가게에 먼저 들르게 될까?
사랑하는 하는 자는 한쪽에 더 마음을 쓰게 마련이야. 내가 무언가를 아낀다거나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아끼는 것과 내가 아끼지 않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별이 생긴 거지.
구별은 차별의 길일 수도 있지만 사랑의 길일 수도 있을 거야. 꽃에게는 물을 주고 멍멍이에게는 밥을 줘야 하는 거지.
널리 인간을 사랑하는 길은 저 높은 곳에서 세상 사람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라고 자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에게 다가가,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며 그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찾는 것이겠지.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의자 다리 하나가 부러지면 나머지 세 개의 다리도 모두 쓸모 없어져. 부러진 하나를 고쳐야 나머지 세 개도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사랑이란 부러진 한 개의 다리를 고침으로써 나머지 세 개의 다리도 쓸모있게 만드는 길은 아닐까.
황사가 짙은 날이다. 국경이란 것이 넓은 하늘 아래서는 무의미해 지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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