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 하려면 냅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잘 잡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맑스를 위하여]는 공부하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해 줍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종국적인 이데올로기적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성찰되는 대상들의 직접적 내용이 아니라 문제들을 제기하는 방식이라고 할 때, 이 문제틀은 역사가의 성찰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철학자가 문제틀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고 문제틀 속에서 생각하기 때문이고, 철학자의 ‘추론방식’이 그의 철학의 ‘추론방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 78쪽
국악방송을 자주 듣습니다. 한 번 씩 아리랑이 나오면서 한(韓) 민족을 한(恨)의 민족이라고 합니다. 외적의 침입도 많고 뭐 그래서 애절한 한이 가슴 깊이 묻어 있는 민족이라는 거죠. 이렇게 생각하면 외적의 침입이 한을 일으키고, 이것이 한민족의 민족 정서로 자리 잡았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을 풀려면 월드컵도 개최하고 올림픽도 개최하고 뭐 그러면서 이제 우리도 외국에 당당해야 하겠지요.
한민족이 한의 민족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민족 구성원들에게 한이 많다면 그것은 외적의 침입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외적의 침입이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 신분과 계급, 성에 따른 차별과 억압이 한을 더 크게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면 한을 풀려면 민족 내부에서 계급이나 성에 따른 차별이나 억압을 없애야겠지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문제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문제를 제기하느냐에 따라 답은 완전히 달라지니까요.
헤겔적 의미의 지양이라는 용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보존 속의 단절을 잘 드러내기 위해 부정된-항목을-자체-내에-간직하고-있는-부정이라는 개념으로 용어를 대체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보존 속의 단절은, 헤겔 변증법에서 즉자에서 대자로의 이행 그리고 즉자대자로의 이행 등등으로 번역되는, 과정 속에서의 실체적 연속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자신의 내부 자체에 자신의 고유한 미래를 싹으로 내포하고 있는 과정의 이러한 실체적 연속성이다. 헤겔적 지양은 과정의 나중의 형태가 선행한 형태의 ‘진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 89~90쪽
이번 책에 여러 좋은 문장이 있었는데, 이 문장도 참 좋았습니다. 맑스의 헤겔과의 ‘인식론적 절단’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나온 문장입니다. 맑스가 같은 문제틀에서 헤겔이 찾지 못한 해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문제틀 자체를 바꿨다는 거지요. 헤겔식의 ‘지양’을 지양(우리가 흔히 하는)해 버린 겁니다.
역사적 사건
특정한 사건을 역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사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역사적인 형식들 속으로, 역사적인 것 자체의 형식들(구조와 상부구의 형식들) 속으로 삽입되기 때문이다. - 148쪽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다고 난리입니다. 어떤 분들은 눈물을 흘리시고 그러더라구요.
동계 올림픽 개최가 역사적인 사건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릴 수 있게 되어서?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되어서?
사회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들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등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됩니다.
동계 올림픽을 개최하자고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으던 그 순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중단하라고 크레인에 올라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가게에 장보러 가면 물가가 그야 말로 하루 다르게 오르고 있고, 얼마 안 있으면 교통 요금도 대폭 올린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올림픽 개최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올라갔다고 하지요. 우리 삶이 퍽퍽해 지는 만큼 이 정권은 G20이니 올림픽이니 하는 것들로 뽕을 놓는 겁니다. 실생활을 갉아 먹어 사람들의 분노가 쌓일지 모르니 적당한 마취제를 놓아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거지요.
규모가 크다고, 크게 떠든다고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를 만드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와 연관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거겠지요.
스포츠와 정치를 연관 시키지 말라구요? 정말 스포츠는 정치와 연관이 없습니까?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건희가 올림픽 유치에 앞장섰다고 떠는 것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걸까요?
실천이란 일반적 용어로 우리는 소여된 특정한 일차 재료를 특정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모든 과정을 뜻한다. 이때 변형이란 특정한 (‘생산’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특정한 인간노동에 의해 행해지는 변형을 말한다. - 197쪽
‘사회적 실천’의 이러한 복합적 통일체는 우리가 나중에 그 메카니즘을 살펴 볼 것처럼, 특정한 생산관계의 틀 내에서 특정한 생산수단에 대한 체계적으로 통제된 용법에 의해 노동하는 실존적 인간들의 활동을 통해 주어진 자연(일차 재료)을 유용한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실천이 종국적으로 결정적인 실천이도록 구조화되어 있다...정치적 실천은 사회적 관계라는 그의 일차 재료를 특정한 생산물(새로운 사회적 관계)로 변형시킨다. 그 다음 이데올로기적 실천을 들 수 있다(종교적, 정치적, 도덕적, 법적, 또는 예술적이건을 막론하고 이데올로기는 인간들의 ‘의식’이라는 자신의 대상을 변형시킨다). - 198쪽
실천이라고 하면 실천의 ‘주체’를 떠올리기 쉽고, 실천의 주체라고 하면 인간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천은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변화는 인간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 사회 구조의 접합이 동력이 되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실천을 인간과만 자꾸 연결해서 보다보면 구조와 구조의 작동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스님만 인간 의식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교가 인간 의식을 마비시키는 겁니다. 교육적 실천이 교사와 학생으로 환원되지 않고, 계급적 실천이 자본가와 노동자로 환원되지 않는 거지요.
주체의 의지나 행위를 떠올리기 전에 대상이 무엇인지를 먼저 떠올리면 어떨까요? 삼성경제연구소가 평창 동계 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라는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은 분명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의식을 실천의 대상으로 삼은 걸 겁니다.
이론이란 용어로 우리는 특정한 인간사회의 ‘사회적 실천’의 복합적 통일체에 속하는 실천의 한 특유한 형태를 뜻한다...이론적 실천은 ‘경험적’ ‘기술적(技術的)’ ‘이데올로기적’ 등의 다른 실천들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일차재료(표상들, 개념들, 사실들)에 대해 노동한다. - 198쪽
삼성경제연구소가 말하는 평창 동계 올림픽의 경제 효과라는 것은 과학적인 이론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이겠지요. 이런 저런 자료를 조사해 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결과를 내놓기 위해 이런 저런 자료들을 짜 맞추는 겁니다. 이론적 연구가 아니라 기술적 짜 맞추기죠.
삼성경제연구소는 국가브랜드 제고로 기업 이미지가 동반 상승해 국내 기업에 3천210억 원의 홍보효과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약 10조원의 내수ㆍ수출 증대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했다. - 연합뉴스, ‘<평창2018> 동계올림픽 개최의 경제효과는>’ 가운데
올림픽이 홍보효과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정말 3천210억 원이라는 수치로 환산가능한 걸까요? 인도의 저 어느 시골 마을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홍보효과가 어떻게 미치지를 측정할 수 있을까요? 수치로 환산하면 뭔가 구체적인 것 같고 제대로 된 것 같지만 측정 불가능한 것을 측정한다는 것 자체가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상상의 결과 아닐까요?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이론적 실천은 바로 삼성경제연구소가 만들어내는 ‘경제’ ‘효과’ 등과 같은 표상이나 개념들, 마치 사실인 것처럼 꾸며진 ‘00조원’이라는 숫자 등을 놓고 작업을 하는 겁니다.
자신이 그 부산물에 불과한 목적을 의문시하지 않는 하나의 ‘이론’은 이 목적의 수인(囚人), 그리고 이 목적을 부과한 현실의 수인으로 머문다. 심리학, 사회학, 게다가 경제학, 정치학, 예술 등등의 수많은 분야들이 그러하다. 이 점은 가장 위협적인 이데올로기적 위험을 식별하는데 핵심적이다. 진정한 이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기술적 활동의 부산물에 불과한 자칭 이론들의 창조 그리고 그 이론들에 의한 지배가 바로 그 위험이다. - 203쪽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동계 올림픽의 경제 효과가 이데올로기에 그친다면 연구소 연구원들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 생산자입니다.
그들이 가진 뛰어난 능력은 이데올로기를 과학처럼 꾸미는 것, 자신들만의 이익을 모두의 이익인 것처럼 만드는 겁니다. 국민 경제니 국가 이미지니 하는 것들이지요.
삼성경제연구소는 상상 속에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지만 이데올로기가 곧 상상인 것만은 아닙니다. 못난 짓이지만 현실에서 실재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과학과 이론이 이데올로기를 이론적 실천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겁니다.
추상
추상이 이론 자체(과학)를 지칭하고 구체가 실재를, 즉 과학적 실천이 그에 대해 인식을 생산하는 ‘구체적’ 현실을 지칭한다고 믿지 않기 위해서는, 인식으로서의 사고된 구체성과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현실적 구체성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구체성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명제의 정확한 의미를 포착하여야 한다. 인식으로서의 구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은 완전히 이론적 실천 속에서만 진행된다. 물론 이 과정은 실재적 구체성에 관련되지만, 실재적 구체성은 그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또 다른 ‘구체성’과는 전혀 혼동됨이 없이 “사고의 외부에서, 사고되기 이전이나 사고된 이후에도, 자신의 독립성을 갖고 존속한다”(맑스)...오로지 이론적 실천에만 관여하는 추상성(<일반성Ⅰ>)과 구체성(<일반성Ⅲ>) 사이의 실질적 구분을 추상화(사고와 과학과 이론의 본질을 구성하는)를 구체성(실재의 본질을 구성하는)에 대립시키는 이데올로기적 구분과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핵심적이다. - 223쪽
‘인식으로서의 구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이 완전히 이론적 실천 속에서만 진행되는 지를 떠난다면(반영과 상대적 자율성의 문제), 위의 알뛰세르의 말은 당연하지만 잊기 쉬운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나의 정신 속에 그렸다고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실재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올림픽 하면 20조원을 벌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실재로 20조원을 벌 수 있는지는 전혀 다른 이야기겠지요. 머릿속에 있는 것인지, 세상에 실재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여러 번 생각했던 말이 ‘추상’입니다.
알튀세르에게 추상과 구체 사이의 이론적 대립은 전적으로 ‘이론’의 영역 내에 있다. 추상은 이론적 실천의 출발점, 즉 이론적 실천을 위한 출발점이다. 반면 구체는 이론적 실천의 종점이다. 포이에르바하와 마르크스의 초기저작들은 다같이 이론을 추상적인 것으로 보고 현실을 구체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 알튀세르/발리바르,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437쪽
맑스는 ‘구체성은 그것이 다양한 규정성들의 종합이므로, 즉 다양성들의 통일체이므로 구체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구체성은 사고 속에서 종합의 과정으로, 출발점이 아니라 결과로 나타난다’라고 합니다.
사고와 인식의 과정에서 보면 ‘평창 동계 올림픽'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개념이 없기 때문이지요. ‘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태양’과 같이 허망한 거지요. ‘평창 동계 올림픽’이 구체적이기 위해서는 일반성Ⅰ로써의 올림픽이 일반성 Ⅱ를 거쳐 일반성Ⅲ으로 나타날 때입니다.
머릿속에 있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지요. 머릿속에 1차적으로 있는 것은 말들과 표상과 감정과 욕망이 혼재되어 있는 정체 불명의 그 무엇일 뿐입니다. 정체 불명의 그 무엇은 이론적 실천을 통해 구체적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지배는 특색 없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복합성 자체에 핵심적인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합성은 지배를 자기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내포하고 있다. 지배는 복합성의 구조 속에 기입되어 있다. 통일체란 기원적起源的이고 보편적인 단순한 본질의 통일체가 아니고 또 그럴 수 없다고 확언하는 것은, 맑스주의에는 생경한 이데올로기적 개념인 ‘일원론’을 꿈꾸는 자들이 믿는 것처럼 ‘다원주의’의 제단에 통일체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실로서, 맑스주의에서 말하는 통일체는 복합성 자체의 통일체이며 복합성의 조직과 접합의 양식이 바로 복합성의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합적 전체가 하나의 지배적인 접합된 구조의 통일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 243쪽
무언가를 설명할 때 기원이나 원리를 통해 설명하면 설명이 쉽습니다. 너거 부모가 그러니 니도 그렇다는 거지요. 세상을 지배하는, 우리가 모르는 음모/정신/사랑이 있다고 하면 속은 편하지요. 반대로 그저 여러 개가 있다고, 존재는 각자 저 알아서 존재할 뿐이라고 하면 또 한 번 속은 시원해집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은 구조들로 짜여 있고, 이 구조들이 관계하고 접합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고, 구조들 가운데도 지배적인 것이 있다고 하면 설명은 어려워지고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나’를 찾는 것도 아니고 모두를 흩어버리는 것도 아닌 길인 셈이지요. 관계 맺는다고 해도 될 것은 관계도 그냥 관계가 아니라 지배-예속의 관계가 있다고 하고, 이 또한 서로 자리를 바꿔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니 미칠 노릇입니다.
그러나 어찌 하리요.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을.
인간
과거의 관념적(‘부르주아적’) 철학은 그 모든 분야와 부산물들(‘인식이론’, 역사관, 정치경제학, 도덕, 미학, 등)에 있어서 인간본성(또는 인간본질)이라는 하나의 문제틀에 기초하고 있다. - 273쪽
우리는 오직 인간에 대한 철학적(이론적) 신화들을 잿더미로 만들면서만 인간의 어떤 것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특정한 방식으로 이론적 인간학이나 이론적 인간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맑스를 원용하는 모든 사상은 이론적으로 잿더미일 뿐이다. - 272쪽
착취 받고 두들겨 맞고 짓눌리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 우리의 목적인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와 해방이 중요하기 때문에, 착취 받고 두들겨 맞고 짓눌리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겠지요.
리비아에서 가다피 군의 공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라고 묻지 않고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들이 지금 어떤 사회적 위치와 관계에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두들겨 맞는 인간’만으로는 그 사람들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본론]에서 하나의 사물(한 조각의 쇠)의 형태 하에서 제시되는 유일한 사회관계는 화폐이다. 그러나 화폐를 사물로 파악하는 관념(즉, 화폐에 있어서 가치와 사용가치의 혼동)은 이 ‘사물’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즉, 화폐와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 부딪치는 것은 단순한 ‘사물’의 난폭성이 아니라 사물들과 인간들에 대한 권력(또는 권력의 결여)이다. - 276쪽
화폐가 단순한 사물이 아니듯 두들겨 맞는 인간이 단순히 두들겨 맞는 인간만은 아닙니다. 두들겨 맞는 사람이 있으면 두들겨 패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리비아 사람들 가운데 두들겨 맞는 사람이 있고 두들겨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리비아에는 왜 두들겨 패는 사람과 두들겨 맞는 사람이 생겨 났습니까?
이들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두들겨 맞는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겠지요. 두들겨 맞는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알면 자유와 해방의 길도 좀 더 잘 그릴 수 있지 않을까요.
책 뒷부분에 나오는 소련 관련 얘기는 지금의 상황과는 관련이 없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읽을꺼리가 있다 생각합니다. 역사 후기는 괜찮은 뽀나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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