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배움-책

헤겔 - [정신현상학] : 의식, 자기의식

순돌이 아빠^.^ 2011. 10. 30. 21:05

헤겔, <정신현상학1>, 임석진 옮김, 한길사

 

의식

 

Ⅰ 감각적 확신, ‘이념’과 ‘사념’

 

감각적 확신이 스스로 알고 있는 대상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이란 ‘그것이 있다’는 것뿐이고 그의 진리에 포함되는 것은 어떤 것, 즉 사상(事象)이나 사태의 존재일 뿐이다. - 134쪽

 

Ⅱ 지각 ; 사물과 착각

 

하나는 뭔가를 제시하고 지적하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이 동일한 운동을 단일물(單一物)로 나타낸 것이다. 전자가 지각이고 후자가 대상이다. 대상은 본질적으로 지각하는 운동과 동일한 운동을 하는데, 지각의 운동이 갖가지 요소를 전개하고 구별하는 것이라면 그 요소들이 하나로 집약되어 있는 것이 대상이다. - 149, 150쪽

 

‘아우프헤벤’(Aufheben) 즉, ‘지양·극복·파기’라는 뜻의 독일어는 부정행위에서 오는 진리의 이중의 의미, 즉 ‘부정하다’와 함께 ‘보존하다’라는 의미를 여실히 표현해주는 것이다. - 151쪽

 

뭔가가 보편적인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존재에 매개나 부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매개나 부정의 작용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 사물이 지니는 갖가지 성질이다. 이때 많은 성질이 동시에 서로 타자를 부정하는 모양새를 하고 나타난다. - 151쪽

 

성질의 특성이란 서로가 다른 것과 구별되면서 저마다 자기의 대립물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나타나는 것 - 153쪽

사물에 대해서는 흰색이면서 정육면체이기도 하고 또 짠맛도 난다고 하겠지만, 그러면서도 흰색이라는 것은 정육면체와는 다르며 흰색의 정육면체인 한에서는 또 역시 짠맛과는 다르다. 이럴 경우 사물이 지닌 갖가지 성질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일은 오직 의식활동이 감당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사물 자체에서 하나로 모아진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다. - 160쪽

 

사물은 자립적이면서도 또 역시 타자에 대한 사물이라는 이중의 양식을 띠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사물은 또 역시 단일체이기도 하다. - 162쪽

 

타자와 관계한다면 바로 그 타자와 연계되고 또 이렇게 타자와 연계된다는 것은 자립성을 소멸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163쪽

 

타자에 대해 존재하는 한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한에서 타자에 대해서도 존재하는 것이다...타자와의 관계만이 비본질적이라고 하던 차에 이제는 독자존재도 마찬가지로 비본질적이 되는 것이다. - 165쪽

 

사물의 순수한 성질은 그대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듯이 보이지만 실로 그의 본질은 타자에 대한 존재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자립성에 있다. - 165쪽

 

개별과 보편으로 대립되는 양극은 단지 나란히 병존해 있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기도 하다. - 166쪽

상식이라는 것은 그 자신을 견실하고 실질적인 의식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이 지각의 장에 들어서면 추상에 휘말린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 167쪽

 

Ⅲ 힘과 오성, 현상계와 초감각적 세계

 

대상이 전개되어가는 모습이 존재자의 운동으로서 의식에 드러날 때 의식은 이를 추적해감으로써 비로소 개념의 단계에 올라서는 것이다. - 170쪽

 

독자존재로 정립되어 있는 물질이 곧바로 통일되고 이 통일이 다시금 자기전개를 이루면서 이렇게 전개된 것이 또다시 하나로 마무리되는 교호적인 운동이 ‘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 172쪽

 

구별되는 양자가 있지만 이들은 저마다 자체적으로 있으면서도 또 그 자체가 대립물로 있는 까닭에 결국 저마다가 자기 자신의 대립물이며, 따라서 또 서로가 자기의 타자를 스스로 걸머진 채 모두가 하나로 통일되는 것이다. 이 단순한 무한성 또는 절대적 개념이야말로 생명의 단순한 본질이며 세계의 혼이며 또한 만물에 스며 있는 혈기라고 불릴 수가 있다. 이는 어떤 구별에 의해서도 혼탁해지거나 단절되는 일 없이 전체로 번져나가면서 스스로가 온갖 구별을 일구어내고 동시에 이를 극복하여 마치 정중동靜中動과 같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약동하고 평온한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모습을 띤다. - 199, 200쪽

 

흔히 통일에 관하여 얘기할 때 거기에는 구별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러한 통일은 분열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 즉 구별에 대립해 있는 추상적인 단일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통일이 이렇듯 부정성을 지닌 대립물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통일은 대립을 자체 내에 안고 있는 대립물로 봐야만 할 것 - 201쪽

 

마침내 이 무한성이 운동 그 자체로서 의식의 대상이 될 때 의식은 ‘자기의식’이 된다. - 202쪽

 

무한성의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의식은 구별을 의식하면서도 또한 구별이 곧 다시 지양되는 것마저 의식하는 그러한 의식이다. 즉 구별이 구별이면서도 구별이 아니라는 것과 또한 구별되지 않는 것이 구별된다는 것, 바로 이러한 실상을 깨우치는 것이 ‘자기의식’이다. - 203쪽

 

지각의 단계를 넘어서 있는 오성적 의식은 이제 현상을 매개로 하여 바로 이 현상의 배후를 투시할 수 있게끔 초감각적인 세계와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 204쪽

 

순수한 내면세계와 이 순수한 내면세계를 투시하는 내면적 사유...보는 쪽과 보여지는 쪽과의 관계가 조성되지만, 이 양자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자각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바로 자기의식이다. - 204, 205쪽

내면세계를 덮고 있는 장막의 배후에는 우리가 스스로 그것을 헤치고 들어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또 확인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배후에 다다르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껏 더듬어온 일정한 사유의 경로를 따라나서야만 한다는 것 또한 부언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현상계와 내면세계라는 관념상의 진리를 향한 지적 탐구는 여러 의식형태에 해당하는 사념·지각 그리고 오성이 순차적으로 소멸해가는 짜임새 있는 운동을 통하여 비로소 결실이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205쪽


자기의식

 

Ⅳ 자기확신의 진리

 

지금까지 의식이 확신한 바에 따르면 대상이 되는 진리는 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다...감각적 확신이 획득하는 직접적인 존재나 지각이 알아내는 구체적인 사물 그리고 오성이 파악해내는 힘 - 209쪽

 

이렇게 의식이 자기의식으로 부상하면서 그의 앞에는 두 개의 대상이 나타난다. 하나는 직접적인 감각적 확신이나 지각의 대상으로서, 이는 자기의식에게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의식되는가 하면 또 하나의 두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으로서, 일단 이것은 첫 번째 대상과 대립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본질적 존재이다. - 212쪽

 

자기의식에서 부정되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대상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우리에게는 역시 그 나름대로 의식과 마찬가지로 자체내로 복귀해 있다. 바로 이 자체 내로의 복귀를 통하여 대상은 ‘생명’이 되는 것이다. - 212쪽

 

생명이 ‘있다’는 것은 결코 뭔가가 추상적으로 있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생명의 순수한 본질은 추상적 보편성을 띤 그런 것도 아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바로 순수한 운동을 행하는 단일하고 유동적인 실체가 자기 자체 내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관(器官) 상호간의 차이라는 것은 무한한 순수운동을 이어나가는 요소들 사이의 차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독립된 기관은 저마다 뿔뿔이 존재한다. 그러나 저마다 따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모두가 내부적으로 직접 통일되어 있으며, 또한 반대로 하나의 생명은 갖가지 자립적인 형태로 분열되어 있다. - 214쪽

 

유동적인 요소라는 것은 다만 생명의 본질을 추상화한 것으로서, 생명은 오직 형태를 띰으로써만 비로소 현실적인 생명이 된다. - 216쪽

 

생명이란 외부로 전개되면서 이렇게 전개된 것을 쉴새없이 해체해나가면서 오직 이 운동 속에서 단순히 자기를 보존하는 전체인 것이다. 본래대로의 단초적인 생명의 통일에서 출발하여 갖가지 형태와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이 형태와 과정의 통일로 향함으로써 끝내 생명이 움트는 최초의 단순한 실체로 복귀하는 것이 생명의 운동...애초의 직접적인 통일을 존재하는 통일체라고 할 수 있다면 생명의 운동을 이어온 모든 요소를 내포하는 두 번째의 통일은 한낱 존재하는 차원을 넘어선 보편적인 통일이다. - 217쪽

 

단일한 자아, 즉 자기의식은 자립적인 생명으로 나타나는 타자를 무화無化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확신하는데, 이것이 ‘욕망’의 활동이다.

 

1 자기의식의 자립성과 비자립성 : 지배와 예속

 

자기의식은 또 하나의 자기의식에 대하여 융통자재融通自在하는 가운데 바로 이를 통하여 상생상승相生相勝한다. 즉 자기의식이란 오직 인정된 것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 220쪽

 

각자마다가 자기와 타자에 대하여 직접 독자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로 나타나긴 하지만 이러한 독자성은 동시에 타자를 매개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다. 두 개의 자기의식은 교호적인 인정 상태에 있는 의식으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224쪽

 

자유를 확증하는 데는 오직 생명을 걸고 나서는 길만이 있을 수 있으니, 자기의식에게는 단지 주어진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삶의 나날 속에서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상함을 되씹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순수한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이 본질적이라는 것마저도 생명을 걸고 나서지 않고서는 확증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생명을 걸고 나서야 할 처지에 있어보지 않은 개인도 인격으로서 인정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개인은 자립적인 자기의식으로 인정받는 참다운 인정상태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의 생명을 내걸 뿐만 아니라 타인을 죽음으로 내몰아야만 한다. - 226쪽

 

여기에 순수한 자기의식과 순수히 자립적이 아닌, 타자와 관계하는 의식, 즉 사물의 형태를 띠고 존재하는 의식이 등장하게 되는데...서로가 통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잡이는 아직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의식형태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 228쪽

 

한쪽이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인 의식이고 다른 한쪽은 생명,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 의식이다. 여기서 전자가 ‘주인’이고 후자가 ‘노예’이다. - 228쪽

 

노예를 통하여 사물과 관계하는 주인은 사물을 여지없이 부정할 수 있으므로 주인은 마음껏 사물을 향유한다. 이로써 욕망의 의식으로서 이루지 못했던 것, 즉 사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리하고 소비하는 가운데 만족을 누리는 일을 주인은 해낼 수 있게 된다. - 228, 229쪽

 

위의 두 관계 속에서 주인은 노예에게서 그의 존재를 인정받는다. 두 관계 가운데 어느 경우에도 노예는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한편으로는 사물을 가공해야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물건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주인 쪽에서 보면 노예라는 타자의 의식이 스스로의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인 자기가 상대방인 노예에게 할 일을 노예 자신이 행한다는 의미에서 인정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노예가 행하는 것은 본래 주인이 행해야 하는 것이므로 노예의 행위는 곧 주인 그 자신의 행위라는 의미에서도 인정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 229쪽

 

독자성을 지닌 본질적 존재로서의 주인은 사물을 홀대하는 순수한 부정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이 관계 속에서 순수한 본질적 행위자에 해당되는 데 반하여 노예는 자기를 관철시키지 못하는 비본질적인 행위자이다. - 229쪽

 

예속된 의식이 안고 있는 불안은 단지 우발적으로 나타난 어떤 것에 관한 불안도 그리고 특정한 순간에 닥치는 불안도 아닌, 그야말로 자기의 존재에 흠뻑 닥쳐오는 불안으로서 이것이 무한정한 힘을 지닌 주인에게서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라는 것이다. 이러한 공포 속에서 내면으로부터의 파멸에 직면한 노예는 겉잡을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것이 동요를 일으킨다. - 231쪽

 

일반적인 감정상으로나 공포 속에 행해지는 개별적인 노예노동에서도 감지되는 주인의 절대권력은 붕괴를 예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바...결국 의식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데는 노동이 개재해야만 하는 것이다...욕망이라는 것은 대상을 전적으로 부정하며, 그럼으로써 티 없는 자기 감정을 확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니만큼 또 거기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그대로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때 욕망에는 대상의 존립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 232쪽

 

이에 반하여 노동의 경우는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사물이 탕진되고 소멸되는 데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형성으로 나아간다. - 232쪽

 

봉사하는 의식이 사물을 형성하는 데 따른 그의 자립적인 부정성은 당면해 있는 사물의 형식을 타파하는 과정을 거쳐서 대상화되지만, 이 부정되는 대상이야말로 노예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낯선 외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노예는 이 낯선 부정적인 힘을 파괴하여 스스로가 부정의 힘을 지닌 것으로서 지속적인 터전에 자리를 차지하여 독자존재로서의 자각을 지닌다. 주인에게 봉사할 때 독자적인 존재는 타자로서 자기와 맞서 있다. 말하자면 공포 속에서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임이 몸소 깨우쳐지는 것이다. 사물을 형성하는 가운데 스스로가 독자적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면서 마침내 그는 완전무결한 독자존재임을 의식하기에 이른다...의식은 타율적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노동 속에서 오히려 자력으로 자기를 재발견하는 주체적인 의미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 222, 233쪽

 

2 자기의식의 자유 : 스토아주의, 회의주의, 불행한 의식

 

개념은 그대로 내 사유의 결정체이다. 사유하는 데서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내가 나 아닌 타자 속에 있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으며 나에게 본질적인 대상이 자각적 존재로서의 나와 불가분의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개념을 추구하는 나의 운동은 나 자신안에서의 운동인 것이다. - 235, 236쪽

 

왕좌에 올라서 있거나 사슬에 묶여 있거나 간에, 그 어떤 자질구레한 일상적 조건에도 구속되지 않고 세상사에 휘말려서 음양으로 닥쳐오는 여하한 작용에도 꿈쩍하지 않은 채 단순한 사상의 세계 속에 칩거해 있는 것이 스토아주의이다. - 237쪽

 

회의주의에서는 타자의 세계가 전적으로 비본질적이고 비자립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명확히 의식화되어 있다. - 240쪽

 

예전에는 주인과 노예라는 두 개인으로 분담되어 있던 이중성이 하나로 합쳐진다. 이로써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정신의 개념에 부합하는 자기의식 자체 내에서의 이중화가 현존해야만 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분열이 있다는 데 그칠 뿐 그에 앞서야 할 통일은 아직 생겨나 있지 않다. 분열된 가운데 스스로 이중화된 모순된 존재로서의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불행한 의식’이다. - 244쪽

 

불행한 의식은 불변자의 곁에 개별자가 함께 출현하고 개별자의 곁에 불변자가 함께 출현한다는 것을 경험하기에 이른다...애초에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외면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지만, 의식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신과의 절대적인 일체화를 향하여 매진해야만 한다. - 247, 250쪽

 

비본질적인 개별 의식이 이렇듯 불변자와의 일체성을 지향해나가는 운동은 육화된 피안의 신과의 관계가 삼중화되어 있는 데 따른 이 역시 삼중의 운동이 된다. 첫째가 순수한 의식으로서의 운동이고 다음은 욕망이나 노동을 통하여 현실에 대처하는 개별 존재의 운동이며 셋째는 자기의 독자성을 의식하는 운동이다. - 250쪽

 

첫 번째 관계에서는 현실 의식의 개념만이 내적 심정의 차원에서 드러났을 뿐 그것이 현실의 행위나 향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두 번째 관계에서는 밖으로 향하는 행위와 향유 속에서 의식이 현실적인 의식이 되었다. 여기서 다시금 자체 내로 복귀하는 것이 세 번째의 의식인데, 이 의식은 스스로 현실에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가운데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자각하고 있다. - 258쪽

 

현실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가 되면서 욕망의 향유가 불행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행위와 향유는 그것 자체가 행위와 향유를 위한 완전한 자기충족 요건이 되는 일체의 사회적인 내용과 의미를 상실한 채 개별 국면의 행위나 향유에 그침으로써 의식으로서는 이를 방기하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듯 그 자신을 개별 국면에 묶여 있는 현실 존재로서 의식하게 되면 의식은 스스로가 동물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 258, 259쪽

 

개별자의 의지가 본래의 공동의지로 고양되는 것은 자각되지만, 의식 그 자체가 본래의 의지 그대로를 체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자기만의 개별 의지를 방기했다고 해서 공동의 의지가 적극적인 내용을 지닌 것으로 논리적으로 파악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 262쪽

 

의식 자체로 보면 그의 현실적인 행위는 여전히 초라한 행위일 뿐이고 그가 향유한다는 것도 고통이랄 수밖에 없으니, 그 초라함과 고통을 벗어난 긍정적인 의미가 되살아나는 데는 피안의 힘을 기다리는 길밖에는 없다. 하지만 피안이 아닌 현실의 대상에서 개별 의식으로서의 스스로의 행위와 존재가 바로 행위 자체이며 존재 자체가 될 때, 개별 의식에게는 이성의 표상이 떠올라온다. 이성이란 개별 의식이면서도 절대적으로 그 자체가 곧 온갖 실재라는 의식의 확신인 것이다. - 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