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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정신현상학
진보평론 제29호
이종영/성공회대 강사/ 사회학
글은 독자들의 주체성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읽힌다. 하지만 이 사실이 독서의 상대주의적 다원론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텍스트를 보다 올바르게 읽는 방식이 존재한다. 어떤 방식이 다른 방식들보다 텍스트의 전체적 짜임새를 정합적으로 드러내주고, 그에 따라 저자의 개념장치들의 체계와 문제틀을 잘 드러내준다면, 올바른 방식이다.
프랑스어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다보면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 ‘과학’을 뜻하는 ‘씨앙스(science)’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정신현상학?의 「서설(Vorrede)」과 「서론(Einleitung)」 그리고 마지막 장인 「절대적 지식」을 그야말로 꿰뚫고 있는 용어이다. 그리하여 프랑스어로 ?정신현상학?을 읽다보면 너무나도 자연히 헤겔에게서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씨앙스’는 물론 독일어 ‘비센샤프트(Wissenschaft)’를 옮긴 것이다. 독일어 ‘비센샤프트’는 프랑스어 ‘씨앙스’처럼 단호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신현상학? 독일어 원본에서도 ‘비센샤프트’의 위치는 똑같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정신현상학?의 원래 제목은 “정신현상학의 비센샤프트”인 것이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제목을 ‘정신현상학의 비센샤프트’로 확정하기 이전에 고려되었던 제목에도 ‘비센샤프트’라는 용어가 포함된다. 즉 “의식의 경험의 비센샤프트”가 그것이다. 또한 헤겔 스스로 쓴 ?정신현상학?의 광고문에는 “철학에 대한 최초의 비센샤프트”라는 표현까지도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글로 ?정신현상학?을 읽을 경우, ‘씨앙스’ 또는 ‘비센샤프트’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1988년에 나온 지식산업사의 번역본에는 그것이 ‘학’으로, 2005년의 한길사 번역본에는 ‘학문’으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러한 선택은 미국 학문의 영향이 압도적인 한국에서 ‘과학’이란 용어가 지니는 ‘분과 학문’의 함의를 피해나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어쨌거나 독자들은 “철학이 학문의 형식에 가까워”져야(한길사판, 1권 38쪽) 한다는 한글 번역을 철학이 보다 체계적인 학문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까지 철학은 학문의 형식을 지니지 않았다는 말일까? 결국 한국의 독자들은 1807년의 헤겔에게서 ‘비센샤프트’, 즉 과학이 가졌던 의미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진리가 현존하는 참다운 형태로는 오직 학문적 체계만이 있을 뿐”(한길사판, 1권 38쪽)이라는 번역은 더욱 당혹스럽다. 여기서 과학에 대한 헤겔의 열정은 실종되고, 헤겔은 “진리의 참다운 형태”는 “오직 학문적 체계 속에만” 존재한다는 너무도 뻔한 얘기를 무겁고도 지루하게 늘어놓는 식상한 관념론자로 전락한다. “철학이 학문으로까지 고양되어야 할 시점이 도래했다”(한길사판, 1권 39쪽)는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이 번역에 따를 때 헤겔 이전의 철학은 아직 학문이 아니다. 하지만 헤겔이 실제로 말하려 했던 것은 철학이 과학으로 전화되어야 한다는 것, 또는 적어도 철학이 과학성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센샤프트’를 ‘과학’으로 옮겨줄 때에만 ?정신현상학?을 올바르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특히 ?정신현상학?과 ?논리과학?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한 삐에르-장 라바리에르는 ?정신현상학?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핵심적 위치를 그의 훌륭한 입문서에서 명확히 강조한다. 물론 ‘비센샤프트’가 ‘과학’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은 굳이 내가 애써 말할 필요가 없이 헤겔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글을 통해 말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때 ‘과학’은 분과 학문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은 기존 분과 학문들의 틈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헤겔의 ‘비센샤프트’ 개념은 소쉬르, 프로이트, 맑스를 뒤쫓아 과학을 하려 했던 레비-스트로스, 라깡, 알뛰세르의 과학 개념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겹쳐진다. 그들 모두 기존의 아카데믹한 분업질서를 이탈하는 엄밀한 의미의 과학을 하려 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후기 헤겔의 관점에서 ?정신현상학?의 헤겔을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정신의 종착점을 철학으로 설정한 ?엔치클로페디?의 헤겔과 과학을 절대적 지식으로 설정한 ?정신현상학?의 헤겔 사이에는 엄연한 단절이 존재한다. 1816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된 헤겔은 이제 다만 지식을 사랑하는 철학자가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신현상학?, ?논리과학?(1812-1816), ?엔치클로페디?(1817, 1827, 1830), ?법철학 원리?(1821)를 헤겔의 기본저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른바 ‘헤겔적 체계’에서 자연철학과 정신철학―?엔치클로페디?와 ?법철학?의 기본적 내용을 이루는―이 실재에 대한 엄밀한 인식에 기초하지 못한 사변적 구성물이라고 할 때, 아직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줄 수 있는 헤겔의 ‘진정한’ 저술은 ?정신현상학?과 ?논리과학? 둘이다.
헤겔은 ‘논리과학’을 순수과학으로 간주한다. 순수과학이란 사물들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기 이전에 사물들에 내재하는 존재원리에 대한 과학이다. 즉 헤겔은 ?논리과학? 서문에서 “논리학의 내용은 자연과 유한한 정신이 창조되기 이전에, 자신의 영원한 본질 속에 머물러 있는 신의 제시”라고 말한다. 물론 이때 신이란 사물들의 숨겨진 원리를 뜻한다. 하지만 ?논리과학?이 아직 실체화되지 않은 것에 관여한다고 할 때, 그것은 결국 인식의 범주들을 다룬 방법론적 저술에 불과한 것이다.
레닌은 헤겔의 ?논리과학?을 읽지 않고선 맑스의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알뛰세르는 레닌의 말을 뒤집는다. 헤겔의 ?논리과학?을 이해하려면 맑스의 ?자본론?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알뛰세르가 이처럼 말하는 이유는 헤겔의 ?논리과학?에서 다만 잠재해 있던 것이 맑스의 ?자본론?에서는 겉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논리과학?은 다만 ?자본론?에서 실현되어야만 했던 방법론적 원칙들만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현상학?과 ?논리과학?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정신현상학?에서 제시된 과정의 귀결은 ‘틀림없는 지식’으로서의 과학이고, 과학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논리과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현상학?의 마지막 장 「절대적인 지식」은 ?논리과학?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구성한다. 하지만 ?논리과학?이 사물의 내적 논리로 침투하게 해주는 범주들을 독립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헤겔에게서 실재하는 역사과정을 엄밀하게 다룬 저술은 오로지 ?정신현상학?뿐이게 된다.
‘방법의 과학’은 단지 그 방법이 실현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방법의 과학’으로서의 ?논리과학?은 단지 보조적 저술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헤겔에게서 ?정신현상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일한 저술을 이룬다. 1844년의 맑스는 헤겔 철학의 비밀이 ?정신현상학?에 있다고 했지만, 나는 헤겔에게서 오직 ?정신현상학?만이 존재하는 듯이 ?정신현상학?을 다룰 것이다. 그의 후기 저술들은 정신적 견고함을 상실한 것들이고, ?논리과학?은 보조적이고, 그의 아름답고 시사적(示唆的)인 청년기 저술들은 ?정신현상학?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헤겔의 유일한 저술은 ?정신현상학?이라는 것.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감히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2.
?정신현상학?은 과학적 인식에 이르는 의식의 경험에 대한 책이다. 의식의 경험은 의식이 최초로 맞부딪친 대상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많은 단계들을 거쳐 ‘사회의 자기인식’으로까지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식의 경험이 서술적-묘사적인 방식으로만 다루어졌다면, ?정신현상학?은 결코 중요한 저술일 수 없을 것이다. ?정신현상학?이 중요한 책인 것은 그러한 의식의 경험을 과학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의 생명은 과학적 방법에 있다는 것이다.
부적절하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그렇다면 헤겔은 ‘이미’ 과학적 인식을 갖추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러한 인식을 의식의 경험의 역사에 ‘적용’했던 것일까? 결단코 그럴 수 없다. 과학적 인식은 하늘에서 문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인식은 인식의 공백지대에 대한 과학적 노동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이미 과학적 인식을 갖춘 사람이 과학적 인식에 이르는 의식의 경험을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의 경험 자체가 새로운 인식대상으로 설정되었던 것이고, 그러한 인식대상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노동의 결실로 ?정신현상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현상학?을 쓰기 전에 헤겔이 갖추고 있었던 것은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적 인식 자체가 아니라, 의식의 경험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학적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과학적 방법을 도출시킨 헤겔의 과학 개념을 정리해보자.
1) 오직 과학만이 실질적 인식을 생산한다. 과학적이지 못한 ‘인식’은 사물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인식을 제공하지 못하는 허구적인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한 잘못된 유사(類似) 인식을 제거하기 위해선 과학이 필요하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시작하는 「서설」의 다섯 번째 패러그래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가 현존하는 참된 형상은 그 진리의 과학적 체계일 수밖에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철학이 과학적 형식에 접근하도록 기여하는 것, 그리하여 지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실질적인 지식일 수 있도록 하는 것”(프 23쪽, 독 6쪽, 한 1권 38쪽). ‘지식에 대한 사랑’은 인식대상을 갖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어떤 인식도 생산할 수 없다. 실질적인 인식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실재에 대한 허상을 지니는 것이고, 오히려 진리의 인식에 장애를 이룬다. 그리하여 이제 철학은 명확한 인식대상을 갖는 과학으로 전화하여, 그 인식대상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을 끝마치면서도 똑같이 강조한다. “오로지 과학만이 정신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참된 지식이다”(프 926쪽, 독 526쪽, 한 2권 353쪽). 이때 ‘정신’은 헤겔의 인식대상으로서 민중적 삶의 역사적 총체성이다. 헤겔이 말하려는 것은 오직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대상 내부로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과학은 반(反)경험주의적, 반(反)낭만주의적, 반(反)형식주의적이다. 사물들을 주어져 있는 상태대로 묘사하는 경험주의는 과학적일 수 없다. 사물들을 그것들과 필연적 연관성을 갖지 못하는 외적 원인들로부터 설명하려는 낭만주의도 과학적일 수 없다. 사물들의 외적 형식만을 서술하는 형식주의도 과학적일 수 없다. 과학은 사물들을 내적 논리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내적 논리란 사물들로 하여금 지금 현존하는 바의 그러한 형태대로 존재하도록 하는 내재적 존재원리이다. 헤겔은 “한편에서는 소재의 풍부함과 손쉬운 이해가능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손쉬운 이해가능성을 경멸하고 직접적인 합리성과 신성을 내세운다”(프 30쪽, 독 11-12쪽, 한 1권 47쪽)고 하면서 경험주의와 낭만주의를 동시에 비판하고, 또 내용에 침투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들어 형식주의를 비판한다.
3) 과학은 대상의 논리 앞에서 자신의 주관성을 철회하는 것이다. 헤겔은 “과학적 인식이 요청하는 것은 대상의 삶에게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것, 또는 같은 말인데, 대상의 내적 필연성을 직시하고 언표하는 것”(프 67쪽, 독 40쪽, 한 1권 91쪽)이라고 한다. 과학은 자신의 주관성을 부과하거나 실현하는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다. 문제의식의 성립은 주체적 경험에 입각하겠지만, 대상의 논리에 침투하는 단계에서 주관성의 개입은 악마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은 철저히 객관주의적이다. 과학은 단지 대상의 내적 논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하면 되고, 그래서 과학자는 보다 더 높은 객관성에 언제나 고개를 숙인다. 알뛰세르가 「담화에 대한 세 가지 노트」에서 과학적 담화는 주체를 축출한다고 한 것도 같은 얘기이다.
4) 대상의 내적 논리로 침투하기 위한 과학적 노동수단은 개념이다. 종교는 일종의 이미지에 불과한 표상을 통해 사고하는 반면, 과학은 개념을 통해 노동하여 실질적 인식을 생산한다. 헤겔은 “진리는 오직 개념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요소를 갖는다”(프 23쪽, 독 6쪽, 한 1권 39쪽)고 하고, 또 “과학의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개념의 구속을 스스로 떠맡는 것”(프 71쪽, 독 43쪽, 한 1권 96쪽)이라고 한다. 개념은 일종의 ‘구속’처럼 다가오고, 인식 주체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관성을 철회한다.
이처럼 “개념의 구속을 떠맡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직 개념을 통해서만 “사태의 내면적 진리”(프 85쪽, 독 52쪽, 한 1권 110쪽)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념은 사물을 외부로부터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설명한다. 형식 분석이 아닌 내용 분석은 오직 개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헤겔은 “오직 개념의 노동만이 지식의 보편성을 생산해낸다”(프 84쪽, 독 52쪽, 한 1권 109쪽)고 한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사물들의 내적 논리가 보편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그리하여 개념에 의해 포착된 사물들의 내적 논리는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헤겔은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은 오직 개념의 삶 자체를 통해서만 조직될 수 있다. 도식으로부터 현존재에 외적으로 부과되는 규정성은, 과학에 있어서는 반대로 충만한 내용의 자기 운동하는 영혼이다”(프 53쪽, 독 39쪽, 한 1권 90쪽). 이 인용문의 두 번째 문장의 형식은 다소간 불분명하다. 하지만 헤겔이 말하려는 것은 명확하다. 즉 과학은 사물과 외재적 관계를 맺지 않고 언제나 내재적으로만 접근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사물에 대해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이 어떠한 것인지를 진정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은 사물을 그 내부로부터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개념은 사물의 운동을 내적인 필연적 연관에 따라 포착한다. 이것은 사물을 내적 논리로부터 파악하는 노동의 필연적 귀결로서, 사물의 운동을 그것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적인 계기들 속에서 포착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과학적 노동의 과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내심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바란다는 것이다. 즉 수단들 없이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도정(道程)의 지루함을 견뎌내야 한다. 모든 계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 계기 각각마다에 밀접하게 체류해야 한다. 그 각각이 총체적인 개체적 형상이기 때문이다”(프 44쪽, 독 23쪽, 한 1권 68쪽).
사물의 운동은 필수적인 계기들을 반드시 거쳐간다. 그러한 필수적인 계기들을 빠짐없이 포착하는 것이 바로 사물의 운동을 그 필연적 연관에서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자본론? 불어판 서문에서 말한 “과학의 험난한 오솔길을 기어올라가는 것”의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인 ?정신현상학?도 과학적 인식에 이르기까지 의식이 거쳐가는 모든 필수적 계기를 개념의 운동을 통해 낱낱이 포괄하는 것이다(프 49-50쪽, 독 27-28쪽, 한 1권 74쪽). 결국 헤겔의 과학적 방법의 핵심은 ‘내재적 필연성’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6) 과학적 인식은 거꾸로 뒤집힌 형태를 취한다. 과학적 인식은 ‘자연적 의식’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표면적 현상들을 꿰뚫고 들어가 사물들의 내적 논리를 파악하는 과학은 표면적 현상에 얽매이거나 자신의 주관성에 갇힌 ‘자연적 의식’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과 과학 각각은 서로에게 진리가 뒤집혀진 것으로 나타난다.……과학은 직접적인 자기의식에게는 뒤집혀진 것으로 제시된다. 현실성의 원리를 이루는 자기의식이 볼 때, 과학은 그 바깥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현실성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프 41쪽, 독 20-21쪽, 한 1권 65쪽). 이러한 헤겔의 입장은 맑스의 ?자본론?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된다.
7) 과학적 노동은 분석대상을 그 전체성 속에서 체계적으로 포착한다. 헤겔은 “지식은 오직 과학으로서만 또는 체계로서만 실질적”(프 38쪽, 독 18쪽, 한 1권 60쪽)이라고 하고, 다시 “진리는 다만 체계로서만 실질적”(프 39쪽, 독 18쪽, 한 1권 61쪽)이라고 한다. 이러한 발언 속에는 ‘과학 = 체계 = 진리’라는 등식이 성립해 있다. 과학적 노동은 인식대상의 내적 구조를 개념적 체계로 엮어내고, 그 결과 진리는 개념의 체계라는 형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결국 과학적 노동의 방법은 “전체를 그 순수하게 본질적인 성격 속에서 구축하는 것”(프 60쪽, 독 35쪽, 한 1권 85쪽)이다. 인식대상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항들 사이의 구조적 관계가 과학적 노동을 통해 ‘개념적 체계’로 옮겨지고, 그리하여 인식대상 자체는 개념적 체계로 엮어진 “유기적 전체”(프 49쪽, 독 27쪽, 한 1권 73쪽)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문에서 생산, 소비, 분배, 교환이 “유기적 전체”를 이룬다고 했듯이 말이다.
8) 철학은 과학적 노동을 지탱해주는 것이면서도, 그 자체가 과학성을 지녀야 한다. 헤겔은 “사람들이 종종 철학을 내용을 결여한 형식적 지식”으로 간주하지만, 철학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과학도 성립할 수 없다고 한다(프 81쪽, 독 49-50쪽, 한 1권 106쪽). 즉 헤겔은 과학적 노동을 위한 인식의 범주들이 철학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심지어 과학적 인식대상 자체가 사변적 성찰을 통해 제공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이 과학성 속에서 가치를 갖게 되길”(프 85쪽, 독 52쪽, 한 1권 110쪽) 희망했던 헤겔이 철학 자체의 과학화를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상과 같은 헤겔의 과학 개념은 맑스의 ?자본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고, 맑스가 철저히 공유했던 것이다. 물론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의식의 역사적 형태들을 핵심적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의 과학적 객관주의는 ‘주관성의 객관성’ 또는 ‘주체성의 객체성’에 관련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물을 내적 논리로부터 포착하려는 그의 개념적 노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갖는다. 첫째로, 특정한 주체성 형태의 필연성을 내재적으로 이해하고, 둘째로 그러한 주체성 형태의 한계를 사회의 객체적 짜임새와의 괴리로부터 드러내며, 셋째로, 또 다른 주체성 형태로의 필연적 이행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헤겔적 입장에서 볼 때, 각각의 주체성 형태 속에서 확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진리는 객관적으로는 오류이다. 하지만 그러한 객관적 오류는 그러한 주체성 형태 속에서는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객관적 오류는 그러한 주체성 형태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진실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는 ‘폐기’되지 않고 ‘지양’된다.
자, 우리는 여태까지 헤겔의 과학 개념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 개념을 ‘갖고’ 있는 것과 그러한 과학 개념을 ‘실천’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이다. 과학적 노동은 과학의 개념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한 실천은 잘 될 수도 있고 못 될 수도 있지만, 잘 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구상’은 힘겨운 노동의 현실 속에서 좌절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슐라르는 철학의 손쉬움과 과학의 어려움을 말한다.
이제 ?정신현상학?의 내적 구조를 두 단계로 나누어 검토하면서, 헤겔이 과연 ‘의식의 경험’을 내재적 필연성에 따라 엄밀하게 포착하는지를 더불어 살펴보도록 하자.
3.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제목으로 처음 생각했던 것은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이고, ?정신현상학?의 정식 제목은 ‘정신현상학(론)의 과학’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설」과 「서론」에서 ?정신현상학?이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임을 여전히 강조한다. 그렇다면 ‘정신의 현상형태에 대한 과학’과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은 동일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즉 ‘정신의 현상형태 = 의식의 경험’이다.
‘정신의 현상형태’라는 표현이 전제하는 것은, 정신이 현상하기에 앞서 미리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이처럼 현상하기에 앞서 미리 존재하는 정신을 제시한 것이 ?논리과학?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설정한 것과는 반대로 ?논리과학?이 ?정신현상학?에 선행할 수도 있다. 정신이 정신의 현상형태들에 선행한다면 말이다. 정신은 어떤 형태를 취하면서 현상할까? 그것은 물론 의식의 경험이란 형태 속에서이다. 의식의 경험의 역사는 정신이 형태를 달리하면서 현상하는 역사이다. 결국 정신의 현상형태는 의식의 역사적 형태 또는 주체성의 역사적 형태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신의 현상형태에 대한 과학’과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이 그 자체로 동일한 것이 아니고 다만 헤겔에 의해 동일성이 설정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경험이 정신의 현상형태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의 현상형태에 대한 과학’은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과 동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을 과학을 추구한 저술로 읽는다는 전제하에서도, 두 가지 독해방법이 다시 나뉜다. 첫째는, ?정신현상학?을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을 포괄하는 ‘정신의 현상형태에 대한 과학’으로 읽는 것이다. 둘째는, ?정신현상학?에서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에 대한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고서 ‘의식의 경험’에 대한 부분만을 읽어내는 것이다. 첫째 방법은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고, 그러므로 ‘정신의 현상형태에 대한 과학’이 성립할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이다. 둘째 방법은 보다 유물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방법이다.
하지만 둘째 방법을 택하면, ?정신현상학?의 특정 부분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겨난다. 예컨대 「의식」 장에서 무한성에 대한 마지막 부분, 「자기의식」 장 첫 부분의 무한한 생명에 대한 내용, 그리고 정신의 자기의식으로서의 「종교」 장 자체 등을 제거해야 한다. 이것은 정신이나 실체 등의 개념에서 양의성(兩義性)을 제거하는 것에 상응한다. 즉 헤겔에게서 정신은 한편으론 민중의 집합적 삶 속에서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이성 또는 민중적 삶의 역사적 총체성을 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주체에 의해 역사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내재적인 원리를 뜻한다. 또한 실체도 한편으론 집합적 주체의 행위에 따라 형성된 인륜적 실체를 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주체가 구현해야 할 원천적인 실체를 뜻한다. 이러한 용어들의 두 번째 의미들은 둘째 방법에서는 제거된다.
물론 ?정신현상학?에서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에 대한 언급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정신이 주체의 의식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의식하는 역사적 형태들의 전개를 다룬 「종교」 장 전체가 그 부분에 포함되지만 말이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을 정신의 현상과는 무관한 순수한 ‘의식의 경험에 대한 과학’으로 읽더라도 ?정신현상학?의 핵심적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에 대한 부분이 ?정신현상학?에서 무척 흥미로운 부분인 것도 사실이다.
징후를 통해 구조로 파고드는 것은 과학적 노동의 기본적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과연 우리는 정신의 특정한 현상형태들을 징후로 삼아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러한 정신은 칸트 식으로 ‘요청’된 것에 불과할까? 만약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이 자연 바깥에 있다면 징후의 고리는 구조에 가 닿지 못하고 끊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약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이 자연 내부에 있다면, 징후의 고리는 구조에 가 닿을 수 있다. 놀랍게도 헤겔은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의 짜임새를 ?논리과학?에서 제시한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현상하기 이전의 정신은 자연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종교」 장에서 개진되는 ‘정신의 자기의식’은 명백히 자연에 외재하는 정신의 자기의식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헤겔은 ?논리과학?에서 제시된 정신과 ?정신현상학? 「종교」 장에서 제시된 정신 사이의 접점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헤겔에 대한 보다 면밀한 서지학적 연구들을 통해 이를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 우리는 헤겔이 내재적 필연성의 고리를 정밀하게 추적하는지 아니면 그 고리를 놓쳐버리는지를 읽어내면 될 뿐이다. 그리하여 그가 그 고리를 놓쳐버리는 경우, 우리는 그가 과학적 노동을 일정하게 일탈했음을 파악하고, 그의 논의를 흥미로운 가설 정도로 여기면 될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정신현상학?의 내용 속으로 좀 더 깊이 진입해보자. 우리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의 역사를 엄밀하게 인식하기 위한 몇 가지 원칙들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원칙들은 연구의 전제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구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즉 연구 과정 속에서 의식의 경험의 역사를 지배하는 원리로 파악된 것이 서술 과정 속에서 마치 ‘전제적’ 원칙처럼 제시된 것이다. 맑스가 ?자본론? 2판 후기에서 말했듯이 연구 순서는 서술 순서 속에서 오히려 거꾸로 뒤집힌다. 그 원칙들을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
1) 개체성에 토대하지 않은 보편성에의 모든 요구를 부정해야 한다. 진정한 현실이란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개체성이다. 즉 “개체성이야말로 현실성의 원리”(프 374쪽, 독 257쪽, 한 1권 403쪽)이고, “현실성의 측면이란 결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개체성의 측면인 것이다”(프 373쪽, 독 256쪽, 한 1권 402쪽). 따라서 보편성은 개체성에 토대해서만 가능하다. “개체성의 운동이야말로 보편성의 현실”이고(프 375쪽, 독 391쪽, 한 1권 405쪽), 결국 “개체성을 희생시켜서 선을 만들어낸다는 그런 수단은 폐기”되어야 한다(프 375쪽, 독 258쪽, 한 1권 405쪽). 개체성을 억압해서 선을 실현하겠다는 모든 주장은 위선적인 것이고, 개체성이 악(惡)으로 규정되더라도 단호히 악의 입장을 편들어야 한다. 악이 오히려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겔은 개인이란 “스스로 짐작하기보다 더 훌륭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프 376쪽, 독 258-259쪽, 한 1권 406쪽). 결국 의식의 경험을 추적하는 헤겔에게서 최종적인 준거지점은 ‘개인의 구체적 실존’이다.
2) 하나의 의식형태가 또 다른 의식형태로 이행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의 논리적 지양을 통해서이다. 의식의 경험이 역사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논리적 모순으로 인한 것이다. 논리적 모순은 욕망과 현실 사이에, 주체성과 타자성 사이에, 개인성과 사회성 사이에 존재한다. 이러한 모순들을 지양하여 욕망과 현실 사이에, 의식과 행위 사이에, 개인과 사회 사이에 정합성 또는 통일성을 구성하려는 노력이 새로운 의식 형태를 탄생시킨다. 주체성 형태가 타자성 형태에 상관적이라고 한다면, 주체성 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타자성 형태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연대성 형태가 성립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결국 모순들이 논리적인 한에서, 그 모순들을 지양하려는 노력도 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역사학과 논리학이 통일되고, 의식의 경험의 역사는 역사에 대한 개념적 노동을 행하는 역사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 과학적 인식으로까지 이르는 의식의 경험의 여정은 ‘대상 = 자기’임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다. ‘자기’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외적 규정성들이 내재화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규정성들을 끝없이 열거할 수 있다. 화학적, 물리적, 생물학적, 가족적, 사회적 규정성 등등……. 이러한 사실을 달리 표현하자면, 대상이 자기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인식하면 자신을 알 수 있고, 또 거꾸로 자기인식이 곧 대상인식일 수도 있다. 결국 대상을 지배하는 논리와 자기를 지배하는 논리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와 대상 사이의 이러한 논리적 동일성을 파악하게 해주는 수단이 바로 개념인 것이다. ‘대상 = 자기’의 연장선 속에서 우리는 ‘타자 = 자기’임을 파악하게 된다. 타자들이란 또 다른 상황 속에서 형성된 자기이다. 내가 타자의 상황 속에 있었으면 타자와 똑같아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적 인식이 수반하는 것은 타자와 나의 근본적 동일성에 대한 인식이고, 「정신」 장 마지막에서 이러한 인식이 획득된다.
이러한 원칙들은 모두 유물론적이다. 첫 번째 원칙에서 개인의 구체적 실존을 벗어난 모든 보편성을 부정한 것도 철저하게 유물론적이고, 두 번째 원칙에서 논리적 모순의 논리적 지양을 의식의 역사의 동인으로 설정한 것, 세 번째 원칙에서 대상과 자기의 근본적 동일성을 설정한 것도 철저하게 유물론적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첫 번째 원칙에서의 구체적 실존의 유물론과 셋째 원칙에서의 결정론적 유물론이 헤겔에게서 합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별자의 구체적 실존과 자연법칙적 결정론은 헤겔적 유물론의 두 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두 축은 개별성과 보편성 범주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면서 「정신」 장 마지막 부분의 보편적 개별성 개념 속에서 결합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재적 필연성’의 해명을 관건으로 하는 헤겔의 과학적 노동의 치밀성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둘째 원칙의 실천과 관련해서이다. 헤겔의 과학적 노동의 핵심은, 한 의식형태에서 다른 의식형태로의 이행을 내재적 필연성에 따라 분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살펴보자.
4.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은 다섯 층위에 걸쳐 전개된다. 1) 의식, 2) 자기의식, 3) 이성, 4) 정신, 5) 종교가 그것이다. 이 다섯 층위는 각각 별도의 장을 이룬다. 반면, 마지막 장인 「절대적인 지식」은 형식적으로는 하나의 층위처럼 드러나지만, 실질적으로는 ?논리과학?을 위한 매개고리의 구실만을 할뿐이기 때문에, 내용적으로 독립적인 층위를 이루지는 못한다.
첫째 층위인 ‘의식’은 대상의식에만 국한된다. 대상의식은 ‘감각적 확신’, ‘지각’, ‘오성’의 세 형태를 거친다. ‘감각적 확신’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놓여 있는 ‘이’ 사물에 대한 확신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이것’은 ‘지금’이 지나감에 따라, ‘여기’를 떠남에 따라, ‘이것’이 아닌 ‘저것’을 바라봄에 따라 사라진다. 결국 감각적 확신은 확실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적 확신은 사물에 대한 지각으로 이행한다. 하지만 지각은 사물의 다양한 측면들과 사물의 단일성을 동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친다. 그래서 지각은 법칙을 추구하는 오성으로 이행하지만, 오성은 다만 형식주의적인 것으로 머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대상의식의 전개는 베르크손-들뢰즈적 직접주의를 비판하는 데에는 유효하겠지만, 아직 사회적 의식에 가 닿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과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매우 충격적인 것은 헤겔이 오성의 형식주의와 관련하여 뉴턴적 법칙을 동어반복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뉴턴적 법칙은 사물들의 운동을 원인들로부터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 오직 외적 형식에만 가 닿을 뿐 ‘내용’에까지 침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헤겔의 엄청난, 당혹스런 구상이 드러난다. 헤겔이 뉴턴의 형식적 법칙 아래 깔려 있다고 하는 ‘내용’이 뜻하는 것이 무한한 생명 과정이기 때문이다.
헤겔에게 무한이란 그 바깥이 없는 것, 자기에 대립하는 그 어떤 것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한 내부에 있으며, 무한은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것들의 분열과 모순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결국 헤겔의 뉴턴 비판이 뜻하는 것은, 헤겔적 과학이 무한한 생명과정 전체를 포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무한한 생명과정 전체는 결코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제’되기만 할뿐이다. 그 ‘내적 필연성’이 제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전제’는 반박될 수도 없는 것이고, 다만 그것이 과학적 담화에 대해 행사하는 교란효과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둘째 층위인 「자기의식」 장에서 무한한 생명과정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분열된다. 그리고 현실 세계로부터 이탈한 세 가지 자기의식 형태가 제시된다. 이 세 가지 자기의식이 현실 세계로부터 이탈한 것은 현실 속에서 욕망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고, 결국 자기를 견지할 수 있는 근거를 현실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자기의식 형태는 단순히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의 일반적 자기의식이 아니라 자기 속으로 칩거하는 특별한 자기의식들이다. 현실의 자기를 인정할 수 없는 이 자기의식들은 반드시 ‘노예 의식’이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노예적 의식’임에는 틀림없다.
자기의식의 첫째 형태는 스토아주의이다. 스토아주의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순수한 내적 세계 속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로부터 도피한 순수한 내적 세계는 공허하고 무력하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둘째 형태인 회의주의가 등장한다.
회의주의는 나르시스적 자기의식과 모순되는 현실 자체를 비(非)존재라고 부정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모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처럼 부정된 현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다는 모순, 또 자기자신을 부정하면서도 오히려 자기의식은 지키려한다는 모순에 봉착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셋째 형태인 불행한 의식이 등장한다.
불행한 의식은 실제의 현실을 비본질적인 것인 것으로 간주하고 보다 본질적인 가상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이라는 가상 세계에 다가서려 할수록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진다. 헤겔은 유태교로부터 중세 기독교에 이르는 불행한 의식의 형태들을 분석한다. 이 불행한 의식들은 실체와 부합하는 ‘종교’에 이르지 못하고 실체로부터 이탈한 주관적 ‘신앙’을 구성해 중세적 질서의 관념적 하부구조를 이룬다.
셋째 층위인 「이성」 장은 세 가지 절로 구성된다. 첫째 절 「관찰하는 이성」은 자연에 대한 여러 가지 유사(類似)-법칙적 관찰들의 한계를 지적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역사과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둘째 절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실현」과 셋째 절 「스스로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인성」이다. ‘이성’이란 세계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의식 형태이다. 즉 세계에 의해 자기가 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자기를 세계 속에서 실현하려 하는 것이 ‘이성’이다. 세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성’은 지배계급의 의식 또는 적어도 자유인적 의식이다. 다만 ‘이성’은 ‘정신’과는 달리 집합적 수준이 아닌 개인적 수준에서 논리적으로 설정된다.
둘째 절 「이성적인 자기의식의 자기실현」에서 제시되는 ‘이성적’ 의식형태들은 그러나 자기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형태들이다. 즉 어떻게 해야 자신을 유효하게 실현할 수 있는지를 모르는 나르시스적 형태들이다. 이러한 의식형태들은 세 가지인데, ‘쾌락과 필연성’, ‘마음의 법칙’, ‘덕성’이 그것이다.
‘쾌락과 필연성’은 죽음의 필연성에 대면해 성적 향유의 허망함을 깨닫는 의식형태이다. 이 의식형태는 허망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주관성을 사회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현하려는 ‘마음의 법칙’으로 이행한다. 즉 ‘마음의 법칙’은 자신의 주관적 ‘마음’을 객관적으로 ‘법칙’화 하려는 의식형태이다. 하지만 ‘마음의 법칙’은 타자들도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마음의 법칙들’에 의해 거부된다. 그 결과 등장하는 것이 ‘덕성’이다. ‘덕성’은 ‘마음의 법칙’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개체적 욕망을 희생시켜 사회적 선행을 행하려 한다. 하지만 이 위선적 의식형태는 개인의 구체적 욕망들이 부딪치는 장소인 ‘세계의 행로’를 이겨낼 수 없다.
셋째 절 「스스로 즉자대자적으로 실재하는 개인성」에서는 자기를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데 나름대로 성공하는 이성적 의식형태들이 제시된다. 이 절은 우선 행위에 대한 이론으로 시작하면서, 행위에 내재하는 온갖 모순들을 제시한다. 특히 문인들 또는 예술가들의 경우, 원래의 구상이 작품 속에서 완전히 실현될 수 없으므로, 자기의식을 실현한 작품들이 오히려 낮선 현실로 등장하게 되고, 타자들 또한 낮선 현실인 나의 작품을 배척하게 된다. 즉 예술 작품은 공유될 수 없는 특수성만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등장하는 것은 무척이나 미묘한 ‘사태 자체’(die Sache selbst)의 관념이다. 이것은 개인들이 현실 세계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에 대한 매우 추상적이자 기만적인 관념으로, 그것에 토대한 의식형태가 바로 ‘정신적 동물들’의 ‘정직한 의식’(Ehrliches Bewusstsein, conscience honnête)이다. ‘정직한 의식’은 “어떤 형태로든 역사는 그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헤겔은 이러한 기만의 행위론적 결과를 여러 가지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는 진정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타자의 행동 성과에는 참여하여 타자의 몫을 탈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행동하지 않는 위선과 기만이 오히려 보편적임이 인식되면서, ‘법칙제정적 이성’이 등장한다.
법칙제정적 이성은 ‘건전한 이성’이다. 이미 주어져 있는 풍속에 따라 무엇이 정의롭고 선한지 직접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전한 이성’은 다만 우연적으로 주어진 풍속만을 정당화할 뿐이다. 이러한 한계로 인해 다시 ‘법칙검증적 이성’이 등장하지만, 이것은 다만 법칙의 형식적 정합성만을 검토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성의 필연적 형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헤겔에 따를 때, 이러한 이성들을 통해 제정되고 검증되는 법률은 전제군주의 포고령과도 같은 것이다. 불행한 의식으로부터 귀결한 ‘신앙’이 중세적 질서의 관념적 하부구조를 구성했다면, 법칙제정적 이성과 법칙검증적 이성이 만들어내는 법률은 절대주의 국가의 제도적 토대를 이룰 뿐이다.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이성」 장의 둘째 절이 ‘인륜적 실체’로부터 출발하고 셋째 절이 ‘인륜적 실체’로 끝난다는 것이다. ‘인륜적 실체’ 개념은 이중적이다. 즉 첫째로는, 자립적 개인들의 사회적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윤리적 실체를 뜻하고, 둘째로는 풍속에 의해 통일된 비(非)자각적 실체를 뜻한다. 「이성」 장 둘째 절에서 첫째 의미로 드러났던 그리스적인 인륜적 실체는 결국 셋째 절에서 둘째 의미의 것으로 판명된다. 그래서 「정신」 장에서는 자립적 개인들의 사회적 공존을 위한 통로가 새롭게 모색된다.
넷째 층위인 「정신」 장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민중적 삶의 역사적 총체성’ 속에서의 집합적 주객대립이다. 「정신」 장은 세 가지 절로 나뉜다. 그리스-로마의 ‘참다운 정신’, 중세적 질서, 절대주의 국가, 프랑스 혁명의 ‘소외된 정신’, 그리고 새로운 사회성을 모색하는 ‘자기확신적 정신’이 그것이다.
‘참다운 정신’을 통해 헤겔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국가와 가족이 모두 진정한 사회성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로마에서는 국가와 가족의 대립이 한편으로 형식적 법과 다른 한편으로 사유재산에 입각한 원자적 개인 사이의 대립으로 발전하면서, 사회성이 완전히 무너진다.
중세와 절대주의 국가의 ‘소외된 정신’ 하에서는 국가와 부가 모두 지배계급의 손에 들어간다. 지배계급의 의식형태들인 ‘고귀한 의식’과 ‘정직한 의식’은 자신들의 개별적 욕망들을 숨긴 채 거짓된 ‘교양’을 매개로 국가권력과 부에 접근한다. 하지만 공공의 선을 내세우는 이들 의식형태는 결국 피지배계급의 ‘비천한 의식’보다 더욱 비천한 위선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결국 헤겔은 단호하게 ‘비천한 의식’과 ‘분열된 의식’ 편에 선다. 소외된 세계에서 자기를 유지하려는 ‘정직한 의식’은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한 ‘분열된 의식’은 자기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적 질서의 관념적 하부구조인 ‘신앙’에 대립하는 계몽사상은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한 채 유용성에만 근거하고, 계몽사상을 매개로 성립한 부르주아적 질서는 화폐의 힘을 통해 과거의 모든 가치를 폐기하고 대상적 유용성만을 사회조직원리로 삼는다. 그리하여 헤겔은 놀랍게도 프랑스 혁명이 부르주아적인 유용성의 질서와 대립했다고 설정한다.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적인 대상적 유용성과 맞서기 위해 주체성을 직접적으로 부과하려다 실패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프랑스 혁명에 따라 ‘소외된 정신’은 ‘자기확신적 정신’에 주도권을 넘겨준다. ‘자기확신적 정신’은 ‘사회의 자기인식’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참다운 정신’과 구별된다. ‘참다운 정신’은 이른바 자각의 결여로 인해 손쉽게 붕괴될 수 있다. 반면 ‘사회의 자기인식’을 획득한 ‘자기확신적 정신’은 자신의 집합적 존재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형성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주체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확신적 정신’은 칸트의 ‘절대도덕’, 야코비와 노발리스의 ‘양심’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세 가지 의식형태를 거친 후 ‘화해’, 즉 진정한 사회적 공존에 가 닿는다. 첫째로, 칸트의 ‘절대도덕’은 현실의 다양성을 무시한다는 한계, 그리고 오직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만 지켜질 수 있다는 한계로 인해 ‘양심’으로 이행한다. 둘째로, ‘양심’은 구체적 현실 속에서 행동을 통해 획득한 신념이긴 하지만 결국은 “나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면서 자의적 행위를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서로 다른 양심들은 양립 불가능하다. 셋째로, ‘아름다운 영혼’이 등장하지만, 현실적 갈등으로부터 도피하여 감정의 평온을 획득한 ‘아름다운 영혼’은 허구적이다. 아름답지 못한 세계에서 아름다운 감성은 허구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궤적을 거쳐 판단하는 의식(절대도덕)과 행동하는 의식(양심)은 서로의 특수성을 인정한 뒤, 서로의 근본적 동일성을 인식해서 ‘화해’를 이룬다. 이러한 ‘화해’의 귀결이 바로 새로운 ‘인륜적 실체’의 토대인 보편적 개별성이다.
이러한 ‘화해’는 과학에의 통로를 이룬다. ‘대상 = 자기’, ‘타자 = 자기’라는 인식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해’와 ‘절대적인 지식’인 과학 사이에는 ‘종교’가 놓인다. 이것이 바로 ?정신현상학?의 놀라움이자 당혹스런 매력이다. 종교가 보편적 개별성과 과학 사이에 위치하는 것은, ‘정신의 자기의식’인 종교야말로 사물을 뿌리로부터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헤겔에게서 종교란 최종적 원인인 신이 인간에게 내재화하여 인간 자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즉 사물을 뿌리로부터 인식한 인간은 ‘신의 인간적 형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자연종교, 예술종교, 계시종교로 이어지는 「종교」 장의 서술은 오히려 다른 장들에 비해 현저하게 묘사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것은 헤겔이 그 내재적인 필연적 연관에 침투하지 못했거나 또는 결코 침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결코 침투할 수 없었다’는 것은 징후로부터 뿌리로까지 이어지는 고리가 자연세계를 넘어서면서 끊어져버렸다는 뜻이다.
자, 이상의 것이 ?정신현상학?에서의 헤겔의 과학적 실천을 몇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학적 실천을 손쉽게 비판할 수 있다. 폭력과 착취의 문제를 사상(捨象)했다는 것, 지배기구로서의 국가의 성격을 경시했다는 것 등이 그러한 비판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들은 외재적이다. 헤겔의 인식대상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과학적 실천을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은 그가 자신의 인식대상의 운동을 내재적 필연성에 따라 엄밀히 파악했는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현실세계로부터 이탈하려는 자기의식들의 이행, 현실세계에 개입하려는 이성적 의식형태들의 이행, 민중적 삶의 짜임새와 집합적 실천들의 이행을 각각 그 내재적 필연성에 따라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의 노동은 단선적이고 비체계적이다. 즉 이행의 그러한 세 가지 형태들은 서로의 짜여짐 속에서 중층적-체계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제시되고 몇 차례 사후적으로 언급될 뿐이다. 게다가 그는 종종 부적절한 모델적-유추적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가 주체성 형태, 타자성 형태, 연대성 형태를 구조적 연관성 속에서 동시적으로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어쩌면 헤겔은 그토록 유명한 ‘체계에의 욕망’을 현명하게 자제했던 것일까?
어쨌거나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의식의 경험의 역사에 대한 헤겔의 서술이 얼마나 실재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몇 가지 확연한 한계 속에서도 헤겔은 의식의 특정한 경험들을 그 실재의 결에 따라 놀랍도록 섬세하게 드러낸다. 적어도 「의식」 장에서 「정신」 장까지 그가 다루고 있는 것들에만 한정한다면 말이다. 명백히 후대의 학자들의 정신적 부패로 인한 것이지만, ‘의식의 경험의 역사’라는 분야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아직도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책이다.
5.
?정신현상학?은 무척 어려운 책이다. 따라서 반드시 입문서가 필요하다. 문예출판사에서 두 권으로 번역된 장 이뽈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꼭 참조해야 하는 뛰어난 입문서이다. 하지만 입문서는 단지 입문서일 뿐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삐에르-장 라바리에르의 ?정신현상학 독해 입문?도 무척 좋은 입문서이지만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 꼬제브의 ?헤겔 독해 입문?은 좋은 입문서는 아니지만, 제일 뒤에 붙어있는 ‘목차 설명’은 꼭 필요한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1977년에 나온 영어번역본은 각 패러그래프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고, 제일 뒤에 패러그래프 별로 내용요약이 있어서 유익할 듯하다.
헤겔의 용어들은 무척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책을 읽어나가면서 개인적 용어사전을 만들면 좋다. 예컨대 정신, 실체, 주체, 이성, 종교, 신, 무한, 지식, 진리, 개념, 범주, 사태 자체, 즉자적, 대자적, 즉자대자적, 절대적 등의 용어들은 모두 사전을 만들어야 하는 용어들이다. 세 가지 프랑스어 번역본 가운데 이뽈리뜨의 것은 제일 뒤에 무척 편리한 색인을 싣고 있고, 그것을 곧장 용어사전처럼 사용할 수 있다. 또 한자경 선생이 번역한 셸링과 피히테의 초기 저술들을 읽으면 헤겔의 용어들에 훨씬 익숙해질 수 있다.
프랑스어 번역본들 가운데 특히 이뽈리뜨의 번역본과 삐에르-장 라바리에르의 번역본을 읽다보면, 번역자들이 독자들의 완전한 이해를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음을 알게 된다. 두 번역본 모두 친절하고도 간결한 역주와 색인이 매우 유용하다. 이뽈리뜨의 번역본은 문장이 명확하고, 라바리에르의 번역본은 독어 원문에 충실하다. ?정신현상학?의 난해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한글 번역자 임석진 선생의 오랜 노고에 감사할 뿐이지만, 한글번역본은 옮긴이 서문이 그다지 유용하지 못하고, 역주가 친절하고 체계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텍스트 자체와 무관한 얘기들을 너무 많이 담고 있으며, 문장도 명확하지 못하다. 보다 더 명확하고 엄밀하고 친절한 한글번역본이 또 한 권 탄생한다면, 임석진 선생의 노고를 깎아 내리기는커녕 오히려 완성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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