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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읽고

순돌이 아빠^.^ 2012. 2. 26. 22:56

왠지 누군가에게 빚진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송경동의 글을 읽을 때가 그렇고, 그의 글 속 사람들을 만날 때가 그렇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들이 내 눈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떤 말들이 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떤 말들이 움켜진 주먹처럼 내 안에서 뻗어져 나왔다. 세계가 내 몸을 타자기로 삼아 제 이야기를 두드렸다. 더 이상 내 몸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 ‘5월 어느 푸르던 날’ 가운데

 

몇 해 전에 무당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매]를 봤습니다. 무당이 죽은 자의 목소리를 산 자에게 전하는 대목에서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영화관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말하려고 해도 말하지 못하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이들을 서로 이어주는 것이  작가의 역할일까요.

 

잡부들에게는 가장 지저분하고, 가장 힘겨운 일들이 남겨져 있었다. 청년은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이 소나 말이 되는 기분을 종종 느꼈다. 하루 종일 말없이 골재를 옮기다 보면 인격이 아닌 체력으로만 존재를 인정받게 되는 자신이 서글펐다...함바집이 따로 없는 작은 건설 현장에서는 카스텔라 빵 하나와 우유 하나가 전부였다. 시원한 우유맛이 싫진 않았지만, 점심나절까지 그 힘으로 버텨야 한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 ‘그 잡부 숙소를 잊지 못한다’ 가운데

 

작가들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취재나 조사를 합니다. 그에 비해 송경동은 자신이 노동자로 살았던 삶을 글로 표현합니다.

 

가난한 마음들

 

헌병대를 나와 다른 일자리 없이 백수건달로 떠다니던 그는 언제고 불쑥불쑥 동생네 집으로 찾아들어 돈을 집어 갔다. “나가 누군지 알고 감히?”하며 어머니를 걷어차기도 했다...두 번의 군대 생활 동안 그는 포악해질 대로 포악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었던 것이다. - ‘깡패 큰아버지 잘 가시라’ 가운데

 

노름에 빠져든 아버지의 눈은 늘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3일에 한 번씩은 부서지던 그릇들,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들, 어머니의 눈은 종종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밤새 이어지던 곡소리를 피해 담 밖으로 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쯧쯧거렸다. - ‘동생의 행운목’ 가운데

 

송경동이 말하는 인생들을 보면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사장님, 사모님들의 모습이 아니라 때로는 난폭하고 때로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

 

그의 글을 읽으면 읽는 사람에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법합니다. 저의 아버지도 자주 엄마가 두들겨 팼습니다. 엄마가 두들겨 맞고 집안이 부서지는 것도 슬프고 마음 아팠지만, 다음날 아침 동네 친구들이 ‘너거 엄마 아빠 어제 또 싸왔제’라고 놀리면 얼마나 창피하던지.

 

종일 놀이방에 맡겨졌다 돌아와 다시 개량된 닭장촌으로 불리는 어둔 골목 다세대 주택 4층 방에 콕 처박혀야 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우나 가는 길이란 얼마나 멋진 일상 탈출의 길이었겠는가. 버스를 두 번이나 탈 수 있고, 따뜻한 물을 만날 수 있고, 작은 풀장(?)에서 거북 등에 올라탄 토끼처럼 아빠의 등을 타고 이랴이랴를 할 수 있는 재미를 무엇과 바꾸겠는가. - ‘사우나 가는 길’ 가운데

 

세상을 바꾸자고, 혁명을 꿈꾸자고 하던 사람도 제 새끼가 행복하게 지내지 못할까 싶어 걱정을 하는 법입니다.

 

작가인 아빠와 사우나 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면 짠한 마음이 듭니다. 어떤 아이들이 들으면 ‘사우나 가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라고 할테니 말입니다. 에버랜드도 노스페이스 잠바도 아닌 동네 사우나. 

 

 

이 세상 자본가들은 같은 인간인데도 그런 마음으로 인간을 대하지 않는다. 인간의 몸값과 같은 돈을 주고 산 기계는 무척이나 아끼지만 인간은 마모될 때까지 쓰고 싶어 한다. 안전을 위한 조치보다는 피치 못하게 책임져야 할 산재가 일어나면 그때 보상이나 해주고 끝나길 원한다. 그것이 일상적인 안전유지 비용보다 훨씬 덜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색을 낸다. -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가운데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한 해에 산업재해로 2,114명이 죽었습니다. 정부가 통계로 잡은 게 그 정도고 잡지 않은 죽음도 많겠지요. 1년이 365일이니 정부 통계만 봐도 하루에 6~7명 정도는 일하다 죽는 겁니다.

 

어느 연예인, 어느 정치인이 죽으면 텔레비전 뉴스에 크게 나겠지만, 매일 같이 노동자들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거들떠보는 이가 적습니다. 하루에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나간다면 대책을 세워도 무슨 큰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서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 가운데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나서는 이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기계 속으로 사람이 빨려 들어가도, 기계를 멈추는 비용이 산재처리 비용보다 더 많이 들면 기계를 멈추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임원들 월급 올리고, 주주들 배당 늘리는 데는 열심이지만 노동자들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자본가입니다.

 

못나고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되는 불량 표지판
말 안 듣고 버릇없는 것들이 가는
인생 종착역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이 우리였다

 

그런 우리의 요구는 소박했다
옷 갈아입을 곳이라도 있다면
점심시간 몸 누일 곳이라도 있다면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쉴 수 있다면
일한 돈 떼이지 않을 약속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 ‘추도시 낭송이 폭력시위 조장?’ 가운데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는 건설일용직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박한(?) 바램 때문에 큰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인생들에 관한 이야기구요.

 

잃어버린 신발

 

사지로 몰린 것은 사실 양민들만이 아니었다. 어린 전경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겐 이성이 있을 수 없었다. 끝끝내 진압하라는 절대명령 하나뿐. 양민들에게 밀려 고지를 탈환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절대복종의 명령. 그러니 그들이 사람이 아닌 개가 되고, 승냥이가 되고, 늑대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 ‘대추리에서 보낸 한 철’ 가운데

 

경기도 평택의 한 시골 마을. 이미 큰 땅을 차지하고 있던 미군이 한국 정부에게 땅을 더 내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한국 정부는 미군에게 땅을 줘야 하니 농민들에게 땅을 내어놓으라고 했구요. 수 십 년 살던 땅을 내어줄 수 없다는 사람들과 한미동맹·국익을 내세우며 빼앗으려는 정부 사이에 투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정부가 이겼지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쓸어버리는 데 밀려날 밖에요. 국가가 하는 일이 그런 거네요.

 

641,850원을 받던 노동자들이다.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이 받던 분들이다. 64만 원으로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여성노동자들이었다...퇴근하고 있으면 문자가 들어오곤 했다고 한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유명했던 문자해고다. 파견직 노동자들은 사람도 아니어서 뚱뚱하다고 해고시키고, 작업대에서 잡담을 했다고 해고시켰다고 한다. - ‘작은 코뮌, 기륭’ 가운데

 

641,850원. 65만원으로 한 달 생활을 하라고? 그 일자리마저 부르면 나가서 일하고, 그만두라고 하면 그만두고. 마치 기계에 전기를 넣으면 돌아가고 빼면 안 돌아가듯.

 

새벽 6시50분, 두 대의 차에서 여성 네 명이 후다닥 내렸다. 등산이라도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이 서울 페스티벌 행사를 위해 시청 앞 잔디광장에 세워진 25미터 조명탑 앞이었다...양 탑 아래로 네 개의 펼침막이 펼쳐졌다.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 철폐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  ‘작은 코뮌, 기륭’ 가운데

 

웃고 즐기자고 하이 서울 페스티벌을 여는데 마당에 웬 고공농성? 사람이 억세 지고 독해지는 것은 유전자가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답답하고 억울하고 속이 터져서 그런 겁니다. 어디 기륭전자 노동자들만 그럴까요.

 

평생 경찰서 구경 한 번 안 해본 선량한 철거민들이 갑자기 투사가 되어 화염병을 만들어 망루로 오르는 것은 그런 절망감 때문이다. 개에게 쫓긴 선량한 닭들이 퇴화된 날개를 퍼덕이며 온갖 힘을 다해 지붕 위로 날아오르듯 그들은 험악한 용역깡패들을 피해 망루로 올랐을 뿐이다. 누구를 해하려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이렇게 외로운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올랐을 뿐이다. - ‘시대의 망루, 용산’ 가운데

 

외국인이 한국 사회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한다면 경복궁을 보여 줄 것이 아니라 용산 참사에 대해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재개발인지 뭔지 한다고 주민들과 상인들을 내쫓으려고 하자 이들은 망루를 세우고 싸웠습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나선 것이 테러리스트 잡는다던 경찰 특공대였지요. 국가와 자본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테러리스트가 되는 셈입니다. 삼성을 비롯한 건설회사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줄 사업을 가로막았으니 가만 둘리 없지요. 철거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 자본이 직접 고용하면 용역깡패고, 국가를 이용하면 경찰이고 뭐 그런 거겠지요.

 

희망버스

 

김주익이 85호 크레인에 오르고, 곽재규가 도크 지하로 몸을 던질 때, 공교롭게도 그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김진숙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잘렸으나 그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잘렸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다.” - 김진숙과 ‘85호 크레인’ 가운데

 

이때의 대통령은 노무현입니다. 지금도 노무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얼굴 그림과 함께 ‘사람사는 세상’이란 말을 씁니다. 이때의 사람은 누구일까요?

 

김진숙이란 사람을 보면 ‘진심’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진심으로 가난하고 억울한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소리는 크나 그 속은 휑하니 비어 있는 수많은 구호들보다 그의 한 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겠지요.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들이 옳아서 이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연대하지 않음으로 깨지는 겁니다. 만날 우리만 죽고, 만날 우리만 패배하는 겁니다.

 

 

 

희망버스가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준 이유는 연대했기 때문이겠지요. 돈 주고 불러 모은 것도 아니고 누구의 지시를 따라온 것도 아니고, 제 돈 내가며 전국에서 온갖 사람들이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나섰기 때문에 희망이 되었겠지요.

 

이제 다시는 누구라도 혼자 외로운 고공으로 오르지 않아도 되게 만인의 연대가 굳건한 그런 세상이 그립다. - ‘희망의 근거’ 가운데

 

책을 덮으며 이 책을 나 혼자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듯이, 저도 아는 분에게 책을 한 권 보냈습니다.

 

송경동의 꿈이, 그의 글 속에 나왔던 많은 이들의 꿈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