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것들/스치는생각

교사가 교육의 주체라는 말에 대하여

순돌이 아빠^.^ 2012. 3. 23. 11:15

1. 소가 농사의 주체?

영화 <워낭소리>에 보면 할아버지가 소를 많이 아낍니다. 아내보다 소가 더 중요하다고 할 정도지요.

소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할아버지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주는 것은 좋지만 평생을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할 건지는 할아버지가 결정하는 거지요. 소는 할아버지의 ‘아끼는’ 도구가 아닐까요.





2. 노동자가 생산의 주체?

‘생산의 주체는 노동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필도 자동차도 핸드폰도 모두 노동자들이 만들기 때문이지요. 이건희가 갤럭시S를 조립하지는 않겠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맞지만 생산의 주체는 아니지 않을까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본가계급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생산할 지를 결정합니다. 노동자는 자본가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영화 <모던 타임즈>에 보면 자본가가 기계 관리하는 노동자에게 컨베이어 벨트 돌아가는 속도를 높이라고 합니다. 그 노동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기계 속도를 높입니다. 그러면 찰리 채플린과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높아진 기계 속도에 맞춰 일을 하기 위해 애를 먹습니다.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고 노동과정을 계획하거나 조절할 수도 없는 노동자가 생산의 주체일까요?

노동자는 생산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소와 노동자의 차이는 사람의 말을 누가 좀 더 빨리 알아듣느냐의 차이 정도 아닐까요.

3. 교육의 주체?

교사가 교육의 주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교사는 교육 과정이나 내용을 계획하고 노동 강도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나요?



이쑤시개를 만든다고 하지요. 재료인 나무를 공장에 투입하면, 노동자가 노동을 해서 생산물인 이쑤시개를 만듭니다.


재료→공장→노동자→이쑤시개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한 노동자를 만든다고 하지요. 학생을 학교에 투입하면, 교사는 노동을 해서 생산물인 노동자를 만듭니다.

학생→학교→교사→노동자


이쑤시개 공장의 노동자가 나무를 이쑤시개로 만들 듯이, 학교라는 공장의 교사는 학생을 노동자로 만듭니다. 그 대가로 월급도 받고 교사라는 지위도 가질 수 있는 거지요. 임용고시라는 건 학생을 노동자로 만드는 데 교사라는 지위를 가지고 참여할 자격을 얻는 과정일 거구요.

4. 지성의 동반자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를 만들고, 부르주아계급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육의 주체는 교사가 아니라 국가이거나 부르주아계급입니다. 그들이 어떤 교육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면 교사는 이를 실행합니다. 자본가가 컨베이어 벨트 속도를 높이면 노동자들이 그에 따라갈 수밖에 없듯이 국가가 수업 시간을 늘리면 교사도 그에 따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교사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교육의 도구인 거지요.





만약에 노동자가 노동 과정을 계획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적 의미의 노동자(Ⅰ)가 아니라 그야말로 노동하는 사람, 일하는 사람의 의미로 노동자(Ⅱ)가 될 겁니다.

교사가 교육의 주체로 교육 과정을 계획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적 의미의 교사(Ⅰ)가 아니라 그야말로 함께 배우고 함께 알아나가는 사람(교사Ⅱ)이 되겠지요. 교사와 학생은 지성의 동반자가 될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