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모시던 주인이 죽으면 멀쩡한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왕이나 귀족이 죽으면 산 사람을 함께 무덤에 넣는 장례풍습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었다. 순장이란 풍습이다.
부여에서는 순장을 치를 때 많은 경우는 백을 단위로, 즉 백, 이백, 삼백하는 식으로 사람들을 죽여 순장하였다고 한다. 이보다 숫자는 적지만 5~6세기경 고령에서 흥기하였던 대가야에서는 왕족의 무덤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순장하였음이 지산동고분군을 발굴한 결과 낱낱이 확인되었다. 가야 지역에서는 부산, 김해, 함안 등 곳곳에서 왕릉급 무덤을 발굴하면 순장의 흔적이 확인되는 예가 아주 많다. 순장 당한 사람들의 신분은 매우 낮아서 한낱 물건처럼 취급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금속 장신구를 착용한 여성, 무기나 마구를 소지한 호위병 등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에서는 왕이 죽으면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섯 명씩 순장하던 장례풍습이 행하여지다가 6세기에 접어들면서 지증왕이 금지시키고 있다.
- 한국역사연구회,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가운데
부여...추장이 죽을 경우에 노예를 순장하는 것이 이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죽으면 여름엔 모두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시켰는데, 많은 경우에는 백 명이나 되었다”고 하였다...그 순장은 두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하다. 즉 하나는 사유재산제의 발생과 함께 싹튼 노예제도에 의해 어느 무리의 비자유인들이 일종의 생산수단으로서 부유층에 소유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소유관계에 의거하여 그 소유자가 그 비자유인의 생살여탈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이 야만적인 순장은 어느 나라의 노예 역사에서도 일반화되었으나, 가장 극단적인 예는 공산제의 붕괴기에 있는 아프리카의 흑인 치에와족 추장의 장례식에 아내와 자식을 순장하는 것이리라.
- 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가운데
(중국 상商나라) 대형 묘의 축조 과정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우선 묘구덩이를 판 다음에 순장인의 배치를 위한 많은 작은 구덩이를 바닥에 팠던 것이다. M1001 하나의 묘에서 9개의 이러한 작은 구덩이가 있었는데 각 구덩이에 사람 1명과 도끼창 1개, 개 1마리가 묻혀 있었다. 바닥면에 드러났던 그 밖의 모든 묘에서는 각 묘마다 사람의 뼈와 무기가 발견된 이러한 구덩이들이 하나씩 있었을 뿐이다.
- 장광직, <상문명商文明> 가운데
(중국)은 사회의 최하층민은 노예였다...이들 노예는 전쟁의 포로 또는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며, 대개 노예주인인 귀족에게 소유되어 소․말 등과 함께 생산 노역에 사역되었다. 그리고 주인이
사망하면 함께 순장되었는데 1950년과 1959년에 안양 무관촌에서 발굴된 대형묘에서는 순장인이 330여 명에 달했고, 1976년
역시 같은 지역의 상왕릉에서는 2,000여 명의 순장인 유골이 나왔는데 이같은 사실은 당시 귀족사회에서 순장풍습이 얼마나 크게
유행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 이춘식, <중국 고대사의 전개> 가운데
순장이란 주인이 죽었을 때 함께 죽어 묻히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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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에서는 황제나 황후가 죽으면 순장할 자를 뽑는다. 그 대상은 남자는 무사, 여자는 시녀로서 30여 명 정도인데 대개 시녀가 더 많았다. 순장하는 날이 되면 궁궐 뜰에서 밥을 먹인 다음 이들을 별도의 건물로 데리고 간다. 시녀들은 밥을 먹을 때 눈물을 훌쩍이며 울다가 이 건물로 들어서는 순간 통곡을 한다. 순장될 사람들은 작은 나무평상에 올라서서 천장에 매달린 올가미에 목을 건다. 그런 뒤에 평상을 치워버리면 목이 매달려 죽게 된다.
이들의 주검을 황제의 능에 함께 순장한다. 죽어서도 호위나 심부름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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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은 중국 은나라와 주나라 때에 널리 유행했다. 그 규모도 수백 명을 한꺼번에 묻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 풍습은 중국의 이웃 나라들인 흉노, 돌궐, 위구르 등지로 퍼졌고 우리나라에까지 건너왔다. 중동의 수메르와 이집트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 잔인한 순장은 지배자들이 내세에서도 현세의 영화를 재현하려는 의도였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1] 가운데
흉노와 스키타이가 공통점을 보인 대표적인 관습은 순장 방식이었다. 스키타이는 부족 수령의 처첩과 하인들을 그의 무덤 앞에서 목을 베었다. 그 숫자는 특히 흉노의 경우 수백 또는 수천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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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1227년, 중국 서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탕구트족을 토벌하는 전쟁 중에 사망하였다...40명의 젊은 여성이 40마리의 말과 함께 순장되었다고 한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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