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향약과 양반지주의 지배

순돌이 아빠^.^ 2013. 6. 9. 13:59




사족의 향촌지배기구로는 유향소, 향약, 서원, 사마소, 향고, 문중門中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향약이 사림파들의 지방지배 방법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였지만, 단순히 교화적 기능만을 갖는 향약이 아니라 서원, 유향소 등 지방지배기구를 통항 향약 실시를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에 따른 향촌지배를 관철시켜 나갔다. 이들 향약에서는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부세의 수취, 환곡의 분배, 군역의 차출 등에 관여하여 향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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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세력은 자신들의 지방지배의 한 가지 방편으로 향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퇴계는 예안을 중심으로 예안향약을 실시하였다. 율곡도 자신이 수령을 역임한 청주, 외가가 있는 해주, 선산이 있는 파주에서 각각 향약을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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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 특히 동계는 사족중심의 신분제적 질서가 강화되고 지주제가 발전을 보익 시작하는 16세기의 산물로 이해된다. 이는 상하신분질서를 유지하고 동 내의 賦役을 조정하는 데 기본목적이 있었다. 향약에서 <不勤租賦圖免徭役>, <多接人戶不服官役>을 과실상규의 중요 조목으로 수록하고 있는 것은, 재지사족들이 부세운영과 관련하여 관권과의 마찰을 피하고 향촌사회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를 살필 수 있으며, 이는 국가적 측면에서도 이들 사족의 일정한 권리를 인정한 상태에서 원활한 부세운영을 위해 이들의 도움을 받았던 것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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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민에 대한 교화와 상부상조를 근간으로 하는 향약은 16세기에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점차 전국에 걸쳐 파급되었다. 조선에서 향약 보급운동이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시기는 사림 세력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중종대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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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의 조목에서는 지친至親 간의 분쟁을 비롯하여 민이 송사를 일삼는 것은 교화에 위배된다고 하여 가능하면 관에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억제하도록 규정하였다. 율곡의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의 과실過失에 대한 처벌 조항에 따르면 <비리호송非理好訟>은 가장 무거운 벌인 상벌上罰로 규정하여 손도損徒의 처벌을 내리도록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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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이 시행한 향약인 율곡의 [서원향약西原鄕約]에서도 민간에서 쟁송하는 자가 있는 경우 반드시 계장契長과 유사有司가 일단 처리하고, 이들이 독단할 수 없는 경우는 사류회의士類會議를 통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향중鄕中에서 결정할 수 없는 중대한 것만 관에 소장을 올리는 것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서원향약의 경우 면단위로 조직되어 각 면마다 계장, 유사를 두었기 때문에 각 면에서 발생하는 쟁송爭訟은 1차적으로 계장을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들이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계장과 유사의 경우 수령으로부터 태笞40의 형벌권까지 위임받아 이들이 자체적으로 집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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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지사족들의 강력한 형벌권은 양반사족들의 거주촌락 단위로 조직된 동계洞契에서 극명하게 엿볼 수 있다.
향약과 향규 등이 일향단위의 사족 지배를 규정한 것이라면, 동계․동약은 사족의 거주촌락 단위에서 마련한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재지사족들의 자체처벌권과 관련하여 안동지역에서 시행된 퇴계의 [온계동규溫溪洞規]를 통해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 온계동규는 재지사족들이 그들 소유의 동내 가문노비에 대한 많은 규제 조항을 동령洞令 항목에 수록하여 이들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행하였다. 여기에는 노비의 통제를 위한 각종 처벌조항이 마련되어 있는데 <본주本主와 타주他主에게 무례無禮하고 불손不遜한 자>와 <부모父母에게 불순不順한 자>에게 최고의 처벌량으로 <태오십배笞五十倍>를 명시.

...이는 양반지주 중심의 신분질서 유지와 지주제의 안정을 위한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강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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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국가가 유지하고자 했던 지방지배의 기본방향은 여전히 수령-이․향 주도의 관치보조적 향촌질서였다. 그것이 그 때까지 그 질서 위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지배계급에 익숙한 것이었고, 또 그 질서만이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질서는 1894년 농민전쟁기 반농민군이 되어 민보군을 구성했던 양반토호층과 향리층이 지키고자 했던 향촌질서였다. 그 구체적이 내용은, 수령이 주도하는 향약과 오가작통법에 기초한 통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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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12월에 민종열이 나주에 부임하여 문묘에 배알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향약을 講修한 다음, 의견을 물어 約의 내용을 정하고 이에 따라 향약절목을 印貼하여 각면에 파급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道學忠節의 기운을 잇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동학의 흥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강구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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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은 통한 향촌질서의 통제는 전라도 차원에서도 시도되고 있었다. 농민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1년 전인 1893년에 전라감사 김문현이 여러 군의 유생들에게 권유하여 鄕約條規를 세우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익산, 김제, 장성 등에서 향약을 講修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향약에는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이른바 4대목 이외에 <守防相助>라는 조항이 추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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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보군의 조직은 이 때를 전후하여 나타나고 있었던 방위조직적 성격을 지니는 동약(또는 동계)의 시행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가운데



관료들이나 농촌 유생들은 그 대책으로서 전통적인 작통제와 향약의 시행을 생각하였다. 농민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지방사회의 질서를 재확립하여 동학을 비롯한 외부의 침투에 동요되지 않도록 하여야 했고, 그에 적합한 조직과 교화체계가 바로 조선시대부터 시행하여온 작통제와 향약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 이영호, '농민전쟁 이후 농민운동조직의 동향', 한국역사연구회,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향약은 북송 때 여대균이 섬서 지방에서 처음 실시한 뒤, 주희에 의하여 정비, 소개되었던 결과 이것이 명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향약은 교화와 상호부조를 통하여 지역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만큼 지역사회의 자치를 지향하는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것의 조직과 관리가 사대부의 역할로 기대되어 있고, 결국 사대부들이 향약으로서 지역사회의 실제적인 지배층으로 활동하려 하였다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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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이 지역사회에서 지배층으로 활동하는 제도적 기반으로 마련하고자 했던 조직

- 하원수, '송宋대 사대부론',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