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서원의 성격을 정립하고, 서원 발흥의 진원지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황과 영남사림파의 경우 그들의 다수가 대토지 소유형 지주계층이었다. 이황의 경우 소수서원 사액으로 서원설립운동을 점화한 후 이산서원․역동서원․도산서원 및 여타 수많은 서원의 건립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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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이황 가문의 [화회문기]만을 살펴보더라도 그들의 재산은 노비 367구, 전田이 1,787두락, 답沓이 1,166두락, 가사家舍가 5좌坐나 되었으며 전답의 분포지는 세거지 예안현을 위시하여 봉화, 영주, 의령, 풍산 등지에 이르렀다. 이황과 이현보의 영지산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나 예안향약 시행의 그 현실적 이유는 전답의 유지와 전민의 증식에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초기 서원의 설립은 이러한 물적 기반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이황과 그의 문도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역동서원의 경우는 그 주도층의 경제적 배경을 고려할 때 중소지주층 연합체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토지소유자의 연합체적 성격이 강했다. 역동서원의 설립에 적극 참여한 김부필, 김부의 등 오천 광산김씨光山金氏의 경우는 최소한 700여 두락의 전답과 230여 구의 노비를 소유한 대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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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유씨河回柳氏의 병산서원屛山書院이나 양동이씨良洞李氏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의 설립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유성룡대의 [성급문기]에 따르면 그들의 전답 수는 최소한 1,600~1,700맞기에 이르고 노비 수는 임란 중에 유리분산되고, 대부분 사망하고도 146명이 남아 있어 실로 엄청난 노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언적 가문의 옥산서원의 경우에도 그의 외가인 손소가문의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처변재산이 첨가되었고, 이에 그의 관직을 매개로 하여 상당한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산서원의 원위전이 17세기에는 대체로 20~30결의 수준을 유지하였고 서원노비는 1629년에 58구를 보유한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의 광대한 토지점유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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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과 서당의 설립과정에서 종종 향촌민들의 음사행위淫祀行爲를 배격한 것은 성황신城隍神 등의 봉사奉祀를 통해 지속되고 있던 농민의 공동체적 질서를 파괴하고 양반의 지배질서를 확고하게 하고자 한 것으로 이애할 수 있다. 이황이 서원설립의 명분으로 내세운 학령의 구애, 과거의 폐해, 세간의 분란 등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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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촌사회의 서당설립이 본격화된 16세기 전반기에는 그 주도 세력 중 다수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한 가문의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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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대지주의 교육활동은 지주 대 직접생산자의 모순관계를 조정하고 해소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주자가례]와 [소학]이 제시하는 바의 禮敎를 향촌사회에 그대로 실행하고자 핬고, 학당에서는 민간의 습속이나 상인들의 雜戲를 따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교육담당자층이 각 계층 간에 개별적인 문화형태가 존속됨을 거부하고 지배층 중심의 상층문화로 사회성격을 재편성하고자한 의도로 이해된다.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가운데
서원은 16세기 중반 이후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과거시험에 대비한 학문과 지방 권력의 구심점으로뿐만 아니라 지역의 자족적 성채로 성장하였다. 서원의 중심에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여기에서는 학문이나 공적이 두드러진 명성 있는 종족원을 정기적으로 추모하였다.
-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의 유교화 과정> 가운데
15세기 말에 공직 생활에서 축출된 저명한 학자들이(이러한 학자들은 유교의 충효사상에 크게 심취되어 있었던 인물들이다), 사사로이 설립한 학교들은 한동안 희미하게 되었던 사제 사이의 수직적 충성에 기초한 결속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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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의 수에 있어서는 1657년 효종은 사액 서원은 7명, 비사액 서원은 5명, 지방의 사우는 1명으로 제한했다. 이렇게 할당된 정원 외의 모든 노비는 사원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같은 무렵 백운동 서원은 초기인 1545년과 마찬가지로 18명이나 되는 많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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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현실 비판자의 한 사람인 부호군副護軍 허부許傅는 진정한 도덕적 수양 대신 개인의 이이과 관직의 획득을 추구하면서 유교의 정통성 대신 불교나 도교, 혹은 서학을 연구하는 학자를 비난했다. 그는 이러한 그릇된 학자들이 학교 제도의 몰락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성균관은 텅텅 비고 잡초가 우거졌으며 지방의 향교는 정치 투쟁을 위한 장소로 바뀌었으며, 서원은 지방사회에서 전제적이고 압제적인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 곳에 진실한 교사가 있는지 또는 학생이 있는지 묻는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 되어 버렸다”라고 개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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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 조 대비는 군역을 걸머져야 할 장정이 모자라는 주요 요인이 이들 서원이 중앙정부를 제쳐놓고 인구에 대한 사적 통제를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조 대비는 이들 서원을 강력한 귀족가문과 비교하면서, 이들 서원이 비자영 호구를 자신들의 보호 아래 빼돌려[이른바 양호(養戶)] 군역과 요역의 면제를 획득한다고 이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 제임스 팔레,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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