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국가가 유지하고자 했던 지방지배의 기본방향은 여전히 수령-이․향 주도의 관치보조적 향촌질서였다. 그것이 그 때까지 그 질서 위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던 지배계급에 익숙한 것이었고, 또 그 질서만이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질서는 1894년 농민전쟁기 반농민군이 되어 민보군을 구성했던 양반토호층과 향리층이 지키고자 했던 향촌질서였다.
-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가운데
결국 농민군의 패배로 말미암아 이들 농민들이 제기한 토지문제를 포함한 농업개혁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흥덕, 고창지역에서 보수적인 儒生層, 지주층들은 전쟁의 전세가 기울자 적극적으로 농민군을 탄압하는 민보군에 가담하여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 왕현종, '19세기 말 호남지역 지주제의 확대와 토지문제',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가운데
반농민군의 입장에 섰던 대표적인 군사력은 포군砲軍이었다. 포군은 지방관 및 재지양반에 의하여 위로부터 조직되어 농민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무력조직이었다....군사적 측면에서 민의 자체방어를 위한 대책 가운데 주요하게 논의되던 것이 민보民堡였다. 민보는 민간주도형의 향촌자위체제였다.
...
민보의 지휘권은 평상시 일 읍을 장악하고 있던 사족, 즉 토호층에게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민포군의 군병들의 계급적 지위는 협호등 또는 소작인으로서 토호적 지배하의 농민들이었다. 농민군과 동일한 계급이었다. 다만 이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토호적 기반을 갖는 재지양반의 지도에 의하여 강제로 반농민군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東學史>에서
동학군이 패하고 관병이 승한 시기를 타서 조선팔도에 육도이상은 곳곳마다 모두 守城軍의 천지가 되어 동학군을 모조리 잡아죽이는 광경이었다. 동학군이 성하던 시대에 있어서는 모두가 동학군이라 칭하던 것들이 동학군이 패하는 때에 와서는 모두가 수성군으로 화하고 말았다. 그러한 인물들은 어떠한 層人物이냐 하면 땅이나 파먹고 무식군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는 그런 인물을 볼 수가 없고 저 소위 말마디나 글이나 한다고 하는 자 중에서 그런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이었다.
- 고석규, '19세기 농민항쟁의 전개와 변혁주체의 성장',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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