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지배층은 명화적을 정의하기를 “무리를 지어 물화를 약탈하는 도적”이라 하였다...명화적은 이처럼 무장력을 갖추었기에 동료가 관군에 체포된 뒤에도 탈옥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 평소 평화적이 활발하던 회양淮陽, 금성金城에서는 이들이 병기를 들고 관문에 돌입하였으며, 금화金化에서는 맹렬한 명화적이 아전을 살해하고 옥을 부수어 동료를 구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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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적은 각각의 단호를 세우고 노략질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장리將吏도 감히 토포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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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적은 포교, 영장 등 악형을 자행하는 포악한 관리들의 만행을 응징하였다. 안성, 죽산의 명화적인 관인을 때려 죽였으며, 평안도에 출현한 명화적은 불을 지르고 나팔을 불며 백주에 횡행하여 양덕 경내에서 官校를 구타한 후 곡산으로 향해 갔으며, 경기에서는 수개월 사이에 捕校를 칼로 난자한 사건이 거듭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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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지방지배력에 한계가 있어 이들이 산악지대나 도서지방을 활동근거지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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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에 대한 결당작란結黨作亂은 당시 심화되고 있는 토지겸병과 민전침탈에 대해 농민들이 폭력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1764년(영조40) 황해도 장연현에 있는 어영 둔전에서 탐학한 영교를 농민들이 응징한 사건...억울한 민인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 흙을 쌓아 영교 김상첨을 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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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정조8)에는 북청에서 민인들이 관아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청 전부사 고익경이 재관在官시 환곡거납인을 태苔하자 수십명의 민인들이 팔을 걷고 관아에 난입하여 장杖을 빼앗고 결박을 풀어 주었으며 수령 앞에서 머리를 치켜들고 쳐다보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 한상권, 18세기 중․후반의 농민항쟁,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가운데
조선과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이 조선이 대한민국에 비해 민중들을 더 억압했을 것 같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조선에 비해 더 자유롭다는 거지요.
앞의 글은 18세기 조선 영조. 정조 시절에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국가가 아닌 어떤 조직이 경찰서를 공격해서 갇혀 있던 동료를 빼냈고, 경찰들도 이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민중을 괴롭히는 포악한 관료와 경찰을 때리고 칼로 찌르기까지 했다는 거구요.
그런데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거의 가능성이 없겠지요. 왜냐하면 국가가 가진 폭력의 질과 양이 다른 개인이나 조직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국가에 정면으로 대항할만한 무력을 갖고 있지 않은 거지요.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면 국가가 지리산이든 흑산도든 쫓아가서 가만 두지 않겠지요. 조선에 비해 대한민국의 국가가 민중들을 더 지배할 수 있는 거구요.
국가가 보유한 폭력의 질과 양에 따라 민중을 지배할 수 있는 정도나 방식이 바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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