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1890년 함창민란

순돌이 아빠^.^ 2013. 7. 1. 10:45

1890년 함창민란...이장화가 통문을 써서 밤새 각 면․동에 전달하였다. 통문을 본 각 면의 면임은 곧 민정을 동원하여 8월3일 아침까지 모임 농민의 수가 천여 명이 되었다. 이에 유정점 앞의 냇가에서 민회民會가 개최되었다.
...
원래 남노선․이장화 등은 읍폐를 관에 등소하여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회民會가 열리고 농민들이 이․향에 대한 폭력행사를 강력히 주장하자 이들의 주장에 따라 그동안 수탈을 자행한 이․향 몇 명을 징치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좌수에게 통보한 것이다.
...
흥분한 농민들은 관아官衙를 포위하고 함성을 지르며 이장화로부터 영기令旗를 넘겨받은 남일원의 지휘에 따라 관아로 돌입하였다...농민들은 수령을 호위하던 관속官屬들을 몽둥이로 난타하여 쫓아버리고 수령을 구타하고 옷을 찢는 등 위해를 가하고 인부印符를 탈취하였다. 그리고는 수령을 떼메다 경외境外로 축출하였다.
...
항쟁과정에서 민회를 통하여 결집된 소민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항쟁의 방식을 결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항쟁은 “마치 적병을 향해 나아가는 병사와 같다”로 표현할 정도로 농민들의 조직적 뒷받침을 받고 격렬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 배항섭, '19세기 후반 ‘변란’의 추이와 성격',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1-농민전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