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부르주아. 투쟁. 정치

순돌이 아빠^.^ 2013. 8. 28. 21:08

일본의 명치유신은  위로부터 실시되었던 부르조아 혁명이었는데, 그것은 봉건제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한 것은 아니고, 새로이 대두되는 부르죠아지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또한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을 향해가도록, 낡은 봉건제도를 자본주의에 적응시켰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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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 통치자들에게는 조선을 경유하여 동북방으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위협하고자 하는 일본 침략자를 미리 견제할 의도도 있었지만 또한 조선에서의 전통적인 정치적 세력과 상업상의 이익을 유지․강화할 의도도 있었다. 그들은 1882년 군인 폭동(임오군란)에 대한 무력 간섭을 기회로 조선 정부에 조․청 상민수륙 무역장정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에서 청조 통치자는 조선의 봉건 통치자로 하여금 종속 관계를 인정하도록 함과 동시에 조선 무역에서의 청나라 상인들의 특혜적 권리와 서울 및 양화진에서의 영업권을 승인하게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청나라 상인들의 진출은 두드러지게 촉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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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상인들의 새로운 진출은 그때까지 조선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 상인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1885년 천진 조약의 성립에 따라 일․청 양군이 조선에서 철수하자, 청나라 상인들은 보다 유리한 정치적 정세 가운데에서 일본 상인을 압도하면서 한층 자기의 상권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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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직전의 1893년에는 청의 대조선 수출무역이 일본과 거의 같은 정도까지 이르렀지만 전쟁이 끝난 1895년에는 이미 현저하게 떨어졌다.




이 시기에 외국 상품이 전국 방방곡곡에 침투한 주요한 매개자였던 것은 조선인 거간9매매와 중간업)과 객주(상품매매 중개도매상 겸 상인 숙박업) 및 보부상(행상)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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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침략자는 조선인 객주, 여각의 존재가 자기의 상품을 좃너 내지에 침투시키는 매체로서 필요한 동안은 그대로 놓아 두었지만, 그들이 자국의 상인들과 대립하는 경쟁자로서 대두되자 이들을 제한, 청산하는 방침을 나타냈다. 그 결과, 이미 1901년에 목포 일본인 상업회의소는 조선인 객주의 활동이 사업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해서 자국 영사로 하여금 조선 정부에 항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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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일본 세력에 대항하여 조선에서 적극적 태도를 취했던 나라는 제정 러시아였다. 제정 러시아 정부는 1897년 11월 조선 정부로 하여금 러시아인 알렉세예프를 재정고문 겸 해관 총세무사로 초빙하고 (이 때 해관 총 세무사는 영국인 브라운이었다), 다음 1898년 2월에는 서울의 한․러 은행을 설립하여 조선에서의 일본 제일은행의 재정 경제상의 세력을 뒤엎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은 영국인과 협력하여 제정 러시아 정부의 기도에 대항했다. 그들은 먼저 조선 정부 내의 친일 분자를 사주하여 브라운을 총세무사에 복직시키고 다음에는 알렉세예프를 재정고문의 지위에서 해임시키고 같은 해 4월에는 한․러 은행을 폐쇄시켰다. 이렇게 하여, 한․러 은행은 창립 후 사업에 착수하기 전에 문을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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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山口精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 후, 천진 조약 체결의 결과 우리 2,500명의 주둔군을 철수시키자, 우리 권세는 현저히 감소되고 청국의 세력권은 곧 사방으로 뻗어나서 마침내 조선 정부를 강요하고 그 상권도 또한 크게 확장하여 잘도 서울의 무역을 농락 하기에 이름. 그 때문에 우리 상권은 압도되어 위축 부진의 비극적 처지에 빠져, 결국 일본인 발전의 일대 좌절을 가져옴.”([조선 산업지] 하권 p 386)

- 전석담, 최윤규, 이기수, 김한주, <조선근대 사회 경제사>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