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국가와 교통/도로

순돌이 아빠^.^ 2013. 8. 29. 14:51

(중국) 허난성 얼리터우 유적지에서 얻은 방사성탄소측정연대와 하상주단대공정의 결과를 토대로 이 문화가 기원전 19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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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 남부 :... 이 지역은 종탸오산의 구리와 윈청 지역 하동 염지의 소금과 같은 천연자원이 아주 풍부한 지역이다. 동샤평의 25만 평방미터에 집중된 얼리터우문화 유적지 일곱 군데가 윈청 분지에서 발견되었고, 난관에 집중된 유적지 15곳이 웬취 분지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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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의 위치 역시 확실히 소금과 구리 운송 루트의 접점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종탸오산을 관통해 동샤펑과 웬취 분지를 바로 이어주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고대부터 존재하여 소금 운송에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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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수로 교통의 중요성 때문에 단강 연안의 샤왕강과 양자강 유역의 징난쓰와 같은 주요 거점 주변에서 얼리터우문화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이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유적지들 역시 주요 교통루트 장악을 위한 얼리터우 국가의 주요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 Li Liu, Xingcan Chen : <중국 고대국가의 형성> 가운데



(중국)진 왕조가 세워진 후 첫 번째 중대한 교통 토목사업은 바로 전국에 역도驛道를 체계적으로 설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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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의 도로망을 구축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통치 행위이다. 도로망은 천하의 동맥이고 우전(郵傳)은 “천하의 혈관”으로 불렸다. 큰길, 역참, 우전으로 구성된 도로망은 군사, 정치, 민간 부문이 모두 활용하는 대제국이 갖춰야 할 공공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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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진나라는 파촉을 공격하기 위해 험준한 바위 벽에 구멍을 뚫고 다리를 설치하여 ‘1000리나 되는 잔도를 만들어 촉한 땅과 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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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의 너비는 50보(69미터)이고 도로 양쪽으로 주변 석 장(丈)마다 푸른 소나무를 심고 금속 재료를 써 양쪽 노견을 만들었다“고 했다. 치도는 수도 함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종횡으로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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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인 도로망 정비사업과 동시에 역참망 구축도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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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망과 정보망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역졸(驛卒)과 신사(信使)는 중앙정부의 명령이나 지방정부의 보고를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런 대형 역참․우전망은 방대한 제국 통치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 장펀톈, <진시황 평전> 가운데

 



도로 건설은 정복과 제국 방어와 속주 교통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군사용 도로건설은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군사용 도로에 큰 관심을 쏟았고 최초로 이탈리아에서 속주들을 잇는 도로망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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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건설되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또 다른 업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공식 서신들과 급송 공문서들을 전송하고 관리들과 원로원 의원들과 그밖의 특권층 인사들을 호송하기 위한 제국의 역참제도로서...

- 세드릭 A.요/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가운데



 

통일국가에서 교통로의 정비는 국가권력의 강약과 통일유지에 중대한 관계를 지닌다. 중국에서 역대 왕조의 교통로는 그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며 송조(宋朝)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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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 방면에 건국한 서하와의 군사적 대립이 계속되면서 서북변 주둔군에 대한 군량과 양말(糧秣)의 운반로로서 새로운 역할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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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에는 수십만의 중앙군을 수도와 북변(北邊), 서북(西北邊)에 주둔시켜 그 군자(軍資)와 군량은 막대한 양에 달하였다. 중앙재정은 국초부터 이미 당(唐)의 2배에 달하였으며 이후 더욱 증가되었다. 이러한 방대한 중앙재정은 근접해 있는 개봉에 수도를 정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수상교통로를 통해 물자를 국가적 통제하에서 운바하는 것을 조운(漕運)이라고 한다.

- 이범학, '송宋대의 사회와 경제',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가운데



일제가 조선점령 후, 적극적으로 추진한 도로의 보수 및 신설은 철도 부설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군사적․경제적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조선에서의 이른바 치도공사治道工事는 일본침략자에 의해 일찍이 점령부터 시작된 사업의 하나였다. 1907년 5월부터 1910년 말에 이르는 36개월 동안에 만도 400만원의 경비를 투입하여 남포~평양, 광주~목포, 대구~경주, 전주~군산 간의 도로보수를 중심으로 총연장 800km의 자동차도로를 만들었다.
1910년부터 1914년에 이르는 5년 동안에 지방비를 가지고 1만 7,000여킬로미터의 도로를 수리하고 닦았다. 이것과 함께 일제는 제1기 사업으로서 1911년부터 1917년까지 7년 동안 장기적인 사업으로서 공사비 1,000만원을 투입하여 2,600여킬로미터의 1~2급 도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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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로공사에 필요한 자금은 조선인민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총독부예산 또는 지방예산으로 충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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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의 건설과 수축 공사는 당시의 일제에게 단기간에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철도망을 부설할 수 없는 조건에서 자원과 농산물 등의 반출과 상품반입을 위해 불가결한 사업이었다.

- 전석담, 최윤규, 이기수, 김한주, <조선근대 사회 경제사> 가운데

 

 


 

http://drspikecook.com/files/2012/02/istock_winding_road-1jdvrl0.jpg



지배와 돈벌이를 위해 만든 도로




한국 도로 공사 홈페이지에서 http://www.ex.co.kr

 


 


 


정부는 제2차 경제 개발계획의 성공적 추진과 당면 최대과제였던 육로수송체계의 개혁을 위해 국토를 종단하는 경부고속도로를 조속히 건설키로 함에 따라 5천년 민족사의 새 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68년 2월1일 각계의 들끓는 반대여론을 뒤로하고 구 서울영업소 자리에서 총연장 428km의 서울 ~ 부산간 고속도로건설의 첫 발파음이 울려 퍼지고 그로부터 2년5개월 뒤인 1970년 7월7일 감동적인 준공식을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가졌습니다.

군과 정부, 그리고 전 국민의 헌신적 노력과 적극적 호응, 특히 모든 기업이윤을 떠나 국력을 기울인 이 대역사에 흔쾌히 참여하여 불철주야 노고를 다한 건설업체의 애국적 희생 등 전 민족이 온갖 힘과 슬기를 집약시킴으로써 비로소 이 역사적인 사업은 성취된 것입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토의 일일 생활권시대 개막, 지역 개발과 경제발전 촉진, 인적·물적 자원의 지역 간 이동, 국민의식 향상과 평균화 등 금액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많은 효과도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