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동서문화사, 2012
[제1막]
바사니오 : 난 내 미약한 재력으로는 도저히 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호화스런 생활을 해놔서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말았어...지금 난 자네 우정을 믿고 내 계획과 의도를 모조리 털어놓겠네. 내가 진 빚을 청산할 방법 말이야...벨몬트에 굉장한 유산을 물려받은 여자가 있는데... - 80, 81
바사니오가 벨몬트에 있는 포셔에게 구혼하러 가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가진 재산을 모두 탕진할 정도로 호화롭게 놀고 먹었는데, 돈 많은 포셔와 결혼을 한다면 진 빚도 갚고 호화로운 생활도 계속할 수 있겠다 싶겠지요.
바사니오 : 여보게 안토니오, 그분들과 경쟁할 만한 재력만 있다면, 내 예감이네만 난 반드시 성공하여 행운을 누릴 수 있을 것만 같네. - 81
바사니오에게 결혼은 큰 돈을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큰 돈을 얻기 위해서는 종잣돈이 필요합니다. 보다 적은 돈으로 보다 많은 돈을 얻으려고 하는 거지요. 돈을 얻기 위해 돈을 구하는 것에서 <베니스의 상인>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50의 돈을 투자해서 100만큼을 얻으려고 합니다. 보다 적은 돈으로 보다 많은 돈을 얻으려는 거지요. 결혼도 우정도 그들에게는 더 많은 돈을 향한 일종의 거래가 됩니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만큼 남들 앞에서 자신을 과시할 수도 있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도 있겠지요.
샤일록 : 어쩌면 저렇게도 신(神)에게 아첨하는 세금쟁이 같은 낯짝을 하고 있을까! 저놈이 그리스도 교도이기 때문에 밉단 말이야. 그뿐인가, 바보 같은 자비심을 베풀어 무이자로 돈을 대부하고는, 베니스의 우리 대금업자 사이에 이자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더욱 미워 죽겠어. 나한테 약점을 한 번만 잡혀 봐라, 쌓이고 쌓인 원한을 톡톡히 갚고 말테다...저 녀석은 우리네 신성한 유대 민족을 증오하고 상인들이 운집한 곳에서도 나를, 내 장사를 비난하거든. 그리고 정당하게 모은 내 재산을 비난하거든 - 86
포셔와의 결혼을 위해 필요한 돈을 안토니오에게 구하지만 안토니오도 다른 곳에 투자해 둔 상태라 돈을 빌려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둘은 유대인 대금업자인 샤일록을 찾아갑니다.
여기서 샤일록은 안토니오에 대한 미움을 드러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안토니오가 그리스도 교도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대금업자 사이에 이자를 떨어뜨리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유대 민족을 증오하고, 네 번째는 샤일록을 모욕하기 때문입니다. 샤일록을 모욕하는 이유는 샤일록이 유대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금업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여기서 재미난 일은 샤일록이 돈 놓고 돈 먹기를 해서 재산을 늘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토니오 또한 어딘가에 투자를 해서 지금 돈이 불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공업을 하던 상업을 하던 대금업을 하던 돈 놓고 돈 먹기 하기는 마찬가지인 거지요. 샤일록의 말처럼 돈이 새끼를 치기를 기다리는 거지요.
샤일록 : 나를 이단자니, 살인자니, 개니 하면서 당신은 우리 유대인의 웃옷에 침을 뱉었소...당신은 내 수염에 가래침을 뱉고, 도둑개를 차듯이 날 문지방에서 차내더니, 이제 와선 돈을 청하시는구려 - 88
유대인에 대금업을 하기 때문에 안토니오가 샤일록을 미워한다면, 샤일록이 안토니오를 미워하는 이유가 조금 더 자세히 드러나네요.
[제2막]
포셔 : 제비로 운명이 결정될 저로선,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어요. - 90
포셔의 아버지는 포셔의 남편을 제비뽑기로 결정하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포셔는 그 유언에 매어 있구요. 남성인 아버지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여성이나 딸인 셈이지요.
제시커 : 사랑은 맹목이라, 애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가장 어리석은 짓도 알아보지 못한다잖아요. - 102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고, 오직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하는 등 지키지 못할 것이 뻔한 약속도 쉽게 해 버리는 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약속의 순간에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사랑의 힘이 그만큼 강한 거지요.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하게 놔두질 않습니다. 내가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이 나를 이끄는 거지요.
모로코 왕 : 첫째는 금궤고, 이런 글이 새겨 있구나. ‘나를 고르는 자는 만인이 소망하는 것을 얻으리라’고 - 103
만인은 아닐지라도 많은 이들이 소망하는 것이 금이고 돈이고 화폐입니다. 학문과 지식도 아니고 음악과 예술도 아닌 금과 돈을 그토록 소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금이라고 하면야 구리나 철과 같은 다른 것들과 같이 금속의 일부일 것이고, 지폐라고 하면야 종이에 그림이 그려진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일텐데 말입니다. 우리 앞에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돈의 힘이 있는 거겠지요. 돈을 가진 자는 사람을 부릴 수도, 물건을 가질 수도, 위세를 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거지요.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금을 소망하는 것일 거구요.
모로코 왕 : 무언가 씌어 있군. 어디 읽어 보자...빛나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 그 말 종종 들었으리라. 나의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목숨을 판 사람도 많다.
포셔와 결혼하기 위해 탁자 위에 놓인 세 개의 상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모로코 왕. 그가 선택한 것은 금궤.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괴롭히고 살인을 하고 전쟁을 하고, 목숨마저 판 사람도 있겠지요.
[제3막]
샤일록 : 제기 그년이 내 발목 밑에서 뒈져 버려도 좋으니까, 보석들이나 그년 뒤에 남아 있으면...내 발목 밑에서 그년이 입관돼도 좋으니까, 돈이나 관 속에 들어 있으면... - 113
사랑하는 사람과 살기 위해 아버지 몰라 도망쳐 버린 딸. 그 딸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으며 샤일록이 하는 말입니다. 돈이라면 부모고 자식이고 우정이고 사랑이고 모두 내팽개치는 부르주아들의 모습 같습니다.
바사니오 : 겉과 속이 전혀 다를 수도 있지...세상은 늘 허식에 속고만 있거든. 재판에서는 내용이 아무리 썩고 곪은 소송이라도, 교묘한 말로 양념을 하면 악행의 겉모습이 가려지거든, 종교를 보더라도, 무서운 이단설도 엄숙한 얼굴로 축복을 하고 경전을 인용하여 증명을 하면, 어떠한 모독도 아름다운 허식으로 은폐되지 않는가. 아무리 하찮은 악덕이라도 겉모습만은 그럴 듯한 미덕의 표지를 가장하지 않는가...허식이라는 건 사람을 악마의 바다로 꾀는 가짜 해안이요...허식이라는 건, 이 교활한 시대가 몸에 지니고 있는 현자(賢者)를 꾀어 잡는 외관만의 진실이 아닌가 - 116, 117
재판이란 게 진실을 쫓지 않고 힘과 돈을 찾는 것은 흔한 일이지요. 종교라는 것이 사랑과 자비를 쫓기보다 종교인의 권력과 욕망을 쫓는 것도 흔한 일이구요. 하지만 그 겉모양은 얼마나 근사하고 때론 얼마나 엄숙하기까지 한지.
포셔 : 그렇게 궁지에 빠진 분이 당신의 친한 친구분이신가요?
바사니오 : 제일 친한 친구요. 마음씨가 착하고 인품이 고결하고, 무엇보다 남을 위한 일이라면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이오 - 121
그렇게 착하고 인품이 고결한 사람이 왜 샤일록을 비롯한 유대인들에게는 욕을 퍼붓고 침을 뱉었을까요? 겉으로는 착하고 고결하지만 그 속은 약자들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는 잔인함이 가득한 것은 아닐까요? 인간에게 애정 많은 척하는 권력자처럼, 고상한 몸짓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르주아들처럼.
[제4막]
공작 : 이 괴이한 잔인성과는 딴판으로 의외의 자비와 연민을 보여줄 것으로 세상은 생각하고 있고...인간적인 우정과 애정에 감동하여...친절 같은 것은 전혀 배우지 못한 인정 없는 터키 사람, 타타르 사람들까지도 저 사람의 지금 사정을 동정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네. - 129
시간에 맞춰 바사니오와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빚을 갚지 못하자, 샤일록은 약속대로 안토니오의 살을 베어내겠다고 합니다. 재판장에 선 공작은 샤일록에게 자비와 연민을 보여주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샤일록은 정말로 잔인하고 나쁜 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샤일록은 왜 빚을 받는 대신 사람의 살을 베어내겠다고 했을까요?
샤일록 : 도대체 무슨 까닭에? 내가 유대인이기 때문이지...그래 유대인은 눈이 없나? 아니 유대인은 오장이, 육체가, 감각이, 감정이, 정열이 없단 말인가?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무기에 다치고, 같은 병에 걸리고, 같은 약에 낫고,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 어디가 예수쟁이들과 다르단 말인가? 찔려도 우린 피가 안 난단 말인가? 간지럽혀도 웃지 않는단 말인가?...유대인이 그리스도 교도를 모욕했다고 합시다. 그리스도 교도의 관용은 뭐겠소? 복수요. 그렇다면 그리스도 교도가 유대인을 모욕한 경우, 그리스도교를 본딴다면 유대인은 어떤 인내를 해야 옳겠소? 물론 복수요. 당신네들이 가르쳐 준 악행을 나도 실행하겠어. 모든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교훈 이상으로 철저히 실행하겠어. - 112
사람을 악 받치게 한다는 말이 있지요. 자꾸 괴롭히고 못살게 굴면 순하던 사람도 독오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교인이나 유대교인이나 매한가지 사람이니, 욕하고 침을 뱉고 때리고 괴롭히면 악 받쳐서 싸우고 복수하려 드는 것도 매한가지겠지요.
살아있는 사람의 살을 베어내겠다고 하는 샤일록을 욕하는 것과 함께 왜 샤일록이 그런 독한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를 따져보면 베니스 사회에, 그리스도교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온갖 모욕과 고통을 당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샤일록이라는 인간이 가지는 감정이나 행동 양식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보면, 유대인 샤일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이 지배하는 베니스 사회에 있을 수도 있는 거지요.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은 포함한 비참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왜 그들이 훔치고 거짓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모든 것을 개인의 악한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 노동자들이 사장이나 관리자들과 싸우면서 파업을 하겠습니까? 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국기를 태우며 시위를 벌이겠습니까?
샤일록 : 당신네는 노예를 많이 사서, 나귀나 개나 노새처럼 천한 일에 혹사시키고 있소. 왜 그렇지요? 돈을 주고 샀으니까 그렇겠죠. - 130
샤일록을 샤일록이게끔 만든 베니스 사회는 어떤 사회입니까?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물론이요, 노예를 사서 나귀나 개나 노새처럼 천한 일에 혹사시키고 있습니다. 사람을 돈을 주고 가서 마음대로 부려 먹는 거지요. 공작은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정작 베니스의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이나 노예들을 같은 인간으로 대우하는 자비가 없는 셈이지요.
포셔 : 베니스의 어떠한 권력을 가지고도 가정 법령을 좌우할 수는 없는 일이오. 그런 일을 하면 전례가 되어, 그 전례로 인해서 수많은 착오가 발생하여 국가의 화근이 될 것이오. - 134
유대인이나 노예의 입장에서 보면 국가란 무엇이겠습니까? 지배자들이 자신들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이겠지요. 그러면 법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지배자들의 선언이거나 지배자들이 만든 규칙이겠지요. 그런데 누군가 이 규칙을 어긴다면 그것은 지배가 흔들리는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법을 준수하라고 할 거구요.
포셔 :...이 증서에 명시된 벌금은 법의 취지와 목적으로 보아 충분히 정당하니까 - 135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는 조건으로 만약 돈을 갚지 못하면 살을 베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계약했으니, 그 계약이 법의 취지와 목적에 적합하다는 거구요.
하지만 저라면 법이 뭐라고 하든 계약이 뭐라고 하든 빌린 돈 대신에 사람의 살을 베어내지 못하게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돈이나 계약보다는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요.
포셔 :...이 베니스의 법률에 의하면 만약 외국인으로 베니스 시민에 대하여 간접 또는 직접적인 수단을 써서 그 생명을 위협한 범죄 사실이 명백히 인정되는 경우는 범인의 재산의 반은 피해자가 될 뻔한 피고의 소유가 되고, 다른 반은 국고에 몰수되오. - 137, 138
재판에서 안토니오의 살을 요구하던 샤일록은 포셔의 논리에 말려 결국은 요구하던 살도 못 받고 가지고 있던 재산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법률에 따른 재판이란 무엇입니까? 결국 지배자들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피지배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배자임을 다시 한 번 선언하는 거지요.
샤일록이 온갖 망신을 당하고 재산과 종교까지 빼앗긴 것은 법이 공정하거나 재판이 합리적이서가 아니라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재산과 종교를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법리나 공정성이 재판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힘에 따라 재판에서 승리하는 자와 패배하는 자가 갈리는 거지요.
지배자들이 만든 법에 기대어 무언가 얻어 보려고 했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되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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