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평화.함께 살기/삶.사랑.평화-책과 영화

마스터니 후미오, <아함경>

순돌이 아빠^.^ 2013. 12. 21. 20:44



마스터니 후미오, <아함경>, 2012, 현암사



지은이의 말

그는 공리․공론을 배척하고 어디까지나 사람에 따라, 문제에 따라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현실 생활 속에서 그것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그것이 붓다의 설법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그 원리가 몸에 배어 그것을 생활 속에서 살려 낼 수 있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또 그렇게 하여 파악된 원리가 인간 관계 속에서 실현될 때, 그것이 그대로 사랑일 것임이 명백하다. - 9


1. 그 사람

사문...그들은 모두 집에서 나와 전통적인 사회의 구속을 벗어난 다음, 자유로이 행동하고 사색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적으로 탁발과 공양에 의존하고 있었다. - 17

열심히 사유하는 성자에게 삼라 만상이 그 진상을 드러냈을 때 의혹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무지란 곧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 - 22

사람이 아무것에도 가리어지지 않은 눈을 뜨게 될 때,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그 진상을 우리의 눈앞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그리스 사상가들이 말하는 진리의 관념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들은 진리를 ‘알레테리아’라는 말로 나타냈다. 그것은 ‘덮여 있는 것’에 부정의 접두사 ‘a’를 붙인 것이어서, ‘덮여 있지 않은 것’을 뜻한다. - 23

오래 된 경전은 자주 “집에서 나와 집 없는 사문이 되었다”는 말을 쓰고 있다. 그것은 가정 생활을 버리는 것과 함께 가사를 걸치고 사문으로서 살아감을 뜻하는바, 그 속에는 적어도 두 가지 포기가 포함되어 있다. 그 하나는 풍족한 가정 생활의 포기요, 또 하나는 고귀한 사회 생활의 포기이다...이 ‘크나큰 포기’에 의해서 그는 우선 가정과 카스트(사회 계급)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던 것 - 24

보리수 밑에서의 정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오직 저 결정적인 순간에만 넋을 빼앗겨서는 안 되리라. 오히려 눈을 돌려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어떠한 장애물이 그의 눈으로부터 제거되었는지를 고요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 27

붓다 정각의 사상적인 내용은 앞에 든 [자설경]의 게에 의하건대 연기의 법칙이었다고 한다...그것은 관계성의 법칙이요, 상의성(相依性)의 법칙이며, 원인․결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 29

그것이 이렇게 법칙성의 것이라면 그것을 사실에 맞추어 보아서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검토해야 했을 것이다. - 30

세상 사람들도 가지각색임을 관찰한 붓다는 마침내 설법을 결심했다. 그리고 말했다.
...
귀 있는 이는 들으라. 낡은 믿음 버리고 - 34

먼저 설법의 상대로 옛 스승을 택했다는 것은 그들에게서 따뜻한 이해를 기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자기가 깨달은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 받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붓다는 결코 경솔하게 확신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신령에 충만하여 포효하는 사람과도 성격이 달랐다.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확신을 가지고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것이 붓다의 사람됨이었다. - 39

그것은 먼저 두 극단적인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그 하나는 쾌락주의의 입장, 즉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금욕주의의 입장, 즉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 43

‘네 가지 성제’는 흔히 줄여 '사성제‘ 또는 ’사제‘라고 일컬어진다.
...
“이는 고(苦)이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
“이는 고의 멸진(滅盡)이다.”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 - 48

“비구들이여, 이것의 고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생(生)은 고이다. 노(老)는 고이다. 병은 고이다. 죽음은 고이다. 시름․근심․슬픔․불행․번민은 고이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고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고이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은 고이다. 뭉뚱그려 말한다면 이 인생의 양상은 고 아닌 것이 없느니라.” - 49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후유(後有)를 일어나게 하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그것이다. 그것에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가 있느니라. - 49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이 갈애를 남김 없이 멸하고, 버리고, 떠나고, 벗어나 아무 집착도 없게 되기에 이르는 것이 그것이니라.” - 49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들어라.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도道가 그것이니,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니라.” - 50

그러한 깨달음의 경제에서 볼 때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이 갈애 즉 목마른 이가 물을 찾는 것에나 비겨야 할 불타는 욕망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 52

불타는 욕망을 가라앉히는 길이 있을 뿐 - 52

그것은 노호하고 절규하는 예언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또 신령에 충만하여 권위 있는 듯이 말하는 종교가의 그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격렬한 말을 내뱉어서 청중의 감정을 뒤흔들어 놓는 연설태도와도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처음과 중간과 결말을 일관하여 잘 설할 것이 요구되었고, 또 이론과 내용의 구비와 이성을 가지고 고요히 이성을 향해 호소할 것이 요청되었다. - 62

바카리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붓다여, 저는 가망이 없나이다. 병이 악화되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이오니. 얼굴을 우러러 뵈오면서 붓다의발에 정례頂禮를 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만 두어라, 바카리야.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이냐? 바카리야, 법(진리)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리라.”
...
붓다는 자기에게 예배하겠다는 청을 물리치고, 오직 진리를 파악하려 힘쓰고, 진리만을 의지함이 옳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 68, 69


2. 그 사상

하루는 물건을 훔쳐 도망친 여자를 찾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나

“도망친 여인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일은 어느 쪽이 소중하냐?”

고 말을 건 적도 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들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붓다의 가르침을 받드는 비구가 되었다. - 74, 75

어떤 경에서 붓다는 이런 비유를 설한 적이 있다.

“여기 통 안에 물이 있다 하자. 그 물이 불에 데워져 부글부글 끓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든지,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든지 한다면, 그 통 안의 물은 사물의 모습을 여실히 비출 수 있겠는가?”
...
그런 것이 제거되고 맑은 마음으로 객관을 대할 때, 일체의 존재는 그 진상을 드러낸다. - 77

“...어떤 사람이 깊은 호수에 바위를 던졌다 하자. 그때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바위야, 떠올라라. 바위야 떠올라라.’하며 기도했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바위는 기도의 힘으로 떠오르겠는가?” - 79

허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내용이었으며, 편견을 떠나 눈을 들어 본다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기에 “와서 보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이며, 만인 앞에 ‘열려 있는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87

‘열반’...마음속에서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 - 88

“지혜 있는 사람이면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만약 모든 종교의 내용을 분류하여 자각의 길과 구제의 길로 나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붓다의 가르침은 자각의 길 - 89

“대덕이시여, 흔히들 ‘악마, 악마’ 합니다만, 악마란 무엇입니까?”
...
이 제자는 매우 솔직한 젊은이였던 것 같아서, 지극히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경우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김없이 물은 듯 보인다...이 솔직한 젊은이는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샅샅이 묻고 있을 뿐 아니라... - 90, 91

많은 고대 문헌에 자주 악마가 나오지만, 그런 경우 대개 악마를 비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불교 문헌에서조마 후대의 것은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붓다와 그 제자들에게는 악마란 필경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였다. 결국 악마라는 낡은 개념을 빌려 인간의 내적 방해물이나 불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쁜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 - 92, 93

자기는 과연 이 사람들에게 설법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것에 정말 어울리겠는가. 또는 탐심이나 노여움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겠는가, 이런 인간다운 불안이나 반성이 마음에 오고 간다는 것은 도리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임에 틀림없다. - 99, 100

사람이란 흔히 그 도리가 진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 104

세상 사람들이 욕망에 빠져 있을 때에는 아무리 연기의 도리를 설해 보았자 도저히 그들에 의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없다고 하여야 될 것이다...욕망 이외의 것은 알려고도 들지 않는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104

"이것이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 106

"이것이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 107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생(生)이 있는 것으로 말미암아 노사(老死)가 있느니라. 이 사실은 내가 세상에 나오든 안 나오든 법으로서 확정되어 있는 바이다. - 108

일체의 존재는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또는 우연히 또는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의 내용이다. 또 그것을 뒤집어서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 것, 따라서 독립․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연기 사상이다. - 109

갈애(渴愛)라는 말의 원어는 팔리 어로...원래 ‘목마름’의 뜻이어서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듯이 사납게 타오르는 욕망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
...
붓다는 결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부정한 것은 그 지나치게 사나운 작용이었다.
...
갈애의 분류...성(性)에 대한 욕망...개체 존속의 욕망...명예․권세에 대한 욕망 - 119

‘바른 것’의 둘째 조건은 “전도(顚倒)’를 떠나는 일“이다...전도란 관찰과 판단에 임해서 그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놓치는 일이다. 대(大)와 소(小)를 거꾸로 아는 것도 그것이요, 미와 추를 잘못 판단하는 것도 그것이다. 또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마치 영원 불변한 듯이 착각하는 것도 그것이다. - 126, 127

우리의 생각은 자칫하면 극단으로 달리기 쉽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자기가 위대해지기나 한 듯이 좋아하는 점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견해만 하더라도, 좌냐 우냐 확실히 그 입장을 가르려고 드는 것이 우리이다. 그리하여 그 노선을 일단 책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미심쩍은 일이 있든 말든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려 든다. - 129

대지를 경작할 때도 일단 개간한 땅이라고 하여 내버려 둘 수 없는 문제이다. 잠시라도 눈을 땅에서 뗀다면, 모처럼 자라던 곡식도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여 벌리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도 어느 만큼 계발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리하다가는 악성의 잡초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139

계(戒)...이 말의 원어인 ‘시라’라는 말은 습관․성격의 뜻이다. 에로부터 불교인들은 흔히 이것을 설명하여 소극적으로는 ‘악을 막는 일’, 적극적으로는 ‘선을 향상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국 나쁜 버릇을 없애고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성격을 개조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행위(身)와 언어(口)와 생각(意)에서 나날이 악의 풀을 제거해 감으로써 뿌려진 진리의 씨를 잘 자라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계요, 성격을 개조해 가는 불교적인 방식인 것이다. - 140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한다.” - 142

“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싱,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었으므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 144, 145

대저 ‘열반’이란 그 원어의 뜻을 캐어 볼 때 ‘불이 꺼진 상태’ - 146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그 대상을 향해 타오르고 있다. 귀도 타고 있다. 코도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햐앻 활활 타오르고 있다. - 147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에속시키도다 - 150, 151


이런 예속 없는 상태...결코 공적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 151

자기를 잊고 자제함이 없이 온갖 욕망에 이끌려 가는 것, 그것이 방일이다. 그러므로 불방일이란 그런 상태에 바지는 일이 없는 자제와 집중과 지속을 그 특징으로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 153

붓다가 설명한 것은 꽤 길거니와,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먼저 계(戒)를 지킬 것, 그리고 오근(눈․귀․코․혀․피부)을 제어할 것, 다음에 또 정념(正念)․정지(正知)를 성취하여 지혜로써 번뇌를 누르고 온갖 집착과 불선을 떠나 점차 무상 안온의 경지인 열반에 들어갈 것, 그것이 명백히 점진적으로 도를 성취해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 158, 159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진리)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 - 160, 161

“그러면 비구들아, 나는 너희에게 이르리라. 모든 것은 변화하느니라. 불방일하여 정진하도록 하라.” - 162

제행 무상이란 불교가 내세우는 존재론이다...일체의 존재는 서로 어떤 의존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의 결부에 의해 생겨났고, 그 조건이 없어지는 데 따라 소멸하는 것이 연기설 - 167

제법 무아...일체가 무상하다면 영원 불변하는 자아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까닭이다. - 168


3. 그 실천

혈연에서 말미암지 않은 인간의 정신적 결합 - 179

“여러 강이 있어서 각기 강가․야무나․아치라바티․사라부․마히라고 불리거니와, 그것들이 한번 바다에 이르고 나면, 그 전의 이름은 없어지고 오직 대해라고만 일컬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크샤트리아․브라만․바이야․수드라의 네 계급도 일단 법과 율을 따라 출가하고 나면 예전의 계급 대신 오직 사문이라고만 일컬어지느니라.” - 180

불교에서는 머리 숙이고 비러야 할 어떤 대상도 없다. 거기에서는 모든 성원이 오직 법의 증지(證知)와 실천이라는 한 가닥의 길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 선두에는 붓다가 선구자의 자격으로 서 있어서 “너희들도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뿐이다. 이리하여 그 뒤를 따르고 그 수범에 힘입어 오직 자기 형성의 길을 걸어간느 것, 이것이 불교요 삼가(僧倻)인 것이다. - 182

“대덕이시여, 삼가(교단)란 우정의 교단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 184

“비구들아, 너희가 모여 있을 때에는 오직 두 가지 할 일이 있느니라. 법을 이야기하든지 성스러운 침묵을 지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 192

정사에서의 그들의 생활에는 성전을 독송해야 하는 의무조차 없었다. 신 앞에 예배의 의식을 올릴 필요도 없었다. 하물며 후세의 승려가 그 주요한 임무로 여기고 있는 불공을 드리느니 재를 올리느니 하는 따위의 일은 그들로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고 관계도 없는 일들이었다. - 192

원시 불교 교단의 생활상, 즉 붓다와 그 제자가 하루하루 어떤 생활을 했나 하는 점은 오늘의 사찰의 양상을 근거로 해서는 좀처럼 알아 내기가 어려울 것임에 틀림없다. 거기서는 장례식이나 추선(追善)의 의식이 거행되지는 않았다. 또 독경이나 불공이 올려지는 일도 없었다. 즉 그들의 생활은 사제자(司祭者)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하루하루였기 때문이다. 붓다가 설하는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몸에 구현해 가는 일, 그것밖에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란 없었던 것 - 195

탁발...“만약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 발우에 음식을 넣어 주시오.” 하는 것이 그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 196, 197

붓다도 어떤 날에는 깨끗이 씻은 발우를 그대로 가지고 돌아오시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그 돌아오는 길에 마라(악마)가 모습을 나타내어 붓다에게 말을 걸었다.

“사문이여, 음식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다”
“그러면 다시 마을로 돌아가라. 이번에는 공양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해주겠다”

그러나 붓다는 단호히 그것을 거부했다.

“음식은 비록 얻지 못했다 해도
보라, 우리는 즐겁게 사나니,
이를테면 저 광음천 모양
기쁨을 음식삼아 살아가리라.“

여기서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식욕의 유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196, 197

법에 의해 얻지 못하는 것과 법에서 말미암지 않고 얻는 것은 어느 쪽이 존귀한가? - 197

“나는 교만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또는 나에게 의심을 지니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여, 나를 가엾이 여기어 그를 말씀해 주소서. 죄를 알면 그를 제거하오리다.” - 204

“언젠가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그들을 데리고 어느 조그만 민간에서 함께 잔 일이 있습니다. 그때 두 사람은 밤 늦게까지 붓다의 법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잘 때가 되자 붓다가 계신 방향을 확인한 다음에 그 쪽으로 머리를 두고 나 있는 쪽으로 발을 뻗고 잤습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나에게 의지해 생계를 이어 가고 있는데, 나를 존경하기보다는 세존을 훨씬 더 존경하는구나. 이것은 필시 그들이 세존으로부터 더 없이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 211

“참으로 희유한 일이었습니다. 도장(刀杖)을 안 쓰고도 대중이 이렇게 통제된다는 것은!”

‘도장’이란 칼과 곤장이다. 왕은 그것으로써 신하들을 단속하고 백성들을 통치한다. 그 생사 여탈의 힘, 그것이야말로 왕의 권세일시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무력으로도 침묵시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마음으로부터 복종케 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집권자들의 고민이 있다. 그런데 붓다의 법좌의 광경은 어떤가? 거기서는 무력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건만, 이렇게도 완전히 통제되어 있지 않은가. - 212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 232

생각이 어디로 달리든간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이리저리 생각을 달리어 많은 재물과 제왕 같은 권력을 꿈꾸는 것도 결국은 자기라는 존재가 더 없이 소중한 까닭이다. 자기가 소중한 까닭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더 큰 권력과 명예를 획득함으로써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 239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용돌이를 떠나 제3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필연적으로 지성적인 맑음을 지닐 수밖에 없기에, 그 눈초리(이성)에서 받는 인상은 차가울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이란 자타(自他)의 대립 속에 파묻혀 있는바, 그런 대립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에고(自我)가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성은 그 대립을 떼밀어 젖히고 냉정히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 눈초리는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차갑다고 해서 반드시 바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열에 들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를 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차갑고 맑은 이성의 작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 241

이 인생이란 결국 괴로움이다. 너희는 먼저 이 사실을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붓다의 말씀에는 우리를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만약 그런 붓다의 말씀을 읽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글자의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붓다는 탐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마른 풀로 만든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불어 오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빨리 그 횃불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 불은 그의 손과 그의 온몸을 태우고 말리라고. 적어도 진지하게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가슴이 섬뜩해 오지 않겠는가. - 241

“제가 악을 행하여 스스로 더러워지고, 제가 악을 떠나서 스스로 청정해진다. 저마다 스스로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나니, 사람은 남을 청정하게 하지는 못하리.” - 242

두루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도록 말을 꾸민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될 수 없는 것이겠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직 전락의 길이 있을 뿐이다. 또는 가공(架空)에 취하고 환상을 뒤쫓는다면, 구제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 242

그는 인간 구제의 대업을 신에게 의탁하지도 않았고 기적에 맡기지도 않았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성, 그것에 의해 구제의 길을 발견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 243

만약 인간이 이러한 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애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인간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우리의 세계가 그런 수라장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이성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 243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 244

사람마다 자기에게 가장 요망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드날리고도 싶으리라.
생활이 풍족했으면 하는 욕망도 있으리라.
또 자기와 가족의 건강도 당연히 바라리라.
그러나 그 어느 소원도 자기의 생존과는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이요 가장 강렬한 소망이며,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인간 최대의 비원임이 분명하다. 이런 자기의 비원을 남에게까지 확장시키는 것, 그것이 아함사의 정신이다. 거기에서 사랑과 자비도 생겨나는 것이며, 평화와 번영도 그 위에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핵무기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 이성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 245

그 게를 밤낮없이 욈으로써 일체의 생명과 모든 사람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슴이 가득 찬 미구들은 이미 독거에서 오는 고독감이나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히말라야의 황량한 위력 같은 것도 문제로 느끼지 않게 된 것뿐이다. 자비심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250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란 어디까지나 진리에 의해 살아갈 것을 말씀한 것이지, 결코 공리 공론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붓다가 영원이니 내생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한 것도 그것이 수행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 251

우리는 기실 옳고 그른 기준을 남에게 두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남이 칭찬하면 자기 행위가 옳은 것으로 알고, 한 사람이라도 비난할 때에는 꺼림침하게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 254

우리가 신(神)을 설정하고 들어간다면, 신이란 모든 미덕을 구비한 절대자로 생각되르모, 신에게는 어떠한 과오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신의 관념을 배척하였다. 있는 것은 인간이며, 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할 때, 인간으로서 이제는 과오가 절대로 없다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붓다는 명백히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붓다도 끝없이 정진을 계속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일 수는 절대로 없다. 더욱이 이제부터는 어떤 짓을 하든 관계없다는 그런 경지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 256

거만...누구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 나면 흔히 남을 내려다보기 쉬운 까닭이다. 이 점에서도 붓다는 영원한 본보기이다. 대중 앞에 나서서,

“그 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그 무슨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나를 가엾이 알아 부디 지적해 달라.”

고 자자(自恣)할 때의 붓다를 생각하라. 조그만 것을 이해하고 깨달았다고 해서 어찌 거만할 수 있겠는가. - 258

자리와 이타는 본래 경중을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정말 추호의 사심도 없는 자비행으로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확립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경의 주장인 줄 안다. - 259

‘자(慈)’...그 어원을 캐어 보면 mitra(벗)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팔리어에서 mitta(벗)가 되고, 다시 추상화되어 metta(우정)으로 발전하여 그것이 그대로 ‘자(慈)’의 뜻을 지니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 260

사랑에서 근심은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은 생기나니
사랑을 넘어선 사람에겐 근심 없도다.
어디에 간들 두려움 있으랴. - 261

붓다는 남녀의 사랑․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재물에 대한 사랑 따위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간 노릇함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목석과 같아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결과가 되고 말리라. 그러기에 붓다는 그런 것을 더 높은 사랑으로 지양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것을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불순성을 부정했던 것이었다. - 262

무릇 사랑이란 일종의 인력이다. 끌어당겨서 연결시키는 힘이다...사랑이란 그런 뜻에서 선악 이전 생명의 본원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원적인 것이면 본원적인 것일수록 그 작용은 분방하고 거칠기 마련이어서, 그 자연적인 양상은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남녀의 사랑이라면 동물에게도 유사한 것이 있다. 부모 자식의 사랑은 조수에게도 있다. 가까운 것끼리 서로 끌고 맺어지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 262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러한 본원적인 힘을 조정하고 지양시키고 확대해 가야 한다. - 262

우리의 본능적인 사랑의 양상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가까운 이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 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자기에게 가까울수록 깊어지고 멀어짐에 따라 엷어진다. 원수에 대해서는 증오하는 것이 옳고, 적과는 맹렬하게 싸울수록 칭찬을 받기 마련이다. - 263

그들은 인간 본능의 사랑을 에로스라고 일컫는데 대해, 이런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라고 불러서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 264

붓다의 길은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의 깊은 내부를 향해 침잠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얼른 보기에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이도 보이리라. 그러나 매우 역설적인 말이긴 해도, 사람이란 자기의 내적 심층에 침잠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아, 그들도 또한 나처럼 인간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있구나!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자기 침잠의 심층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몸의 진상을 투시하여 그 위에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남의 처지에 대해서도 눈물을 뿌릴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동고동비同苦同悲의 감정이라는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비의 샘이 끊임없이 샘솟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 265

이런 점에서 볼 때 ‘자(慈)’라는 말이 ‘우정’도 뜻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매우 의미 심장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천차 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제왕으로서 만인 위에 군림하는 가 하면, 어떤 사람은 노예로서 일생을 매여지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억만 장자가 되어 주지 육림에 파묻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간 두옥도 없어서 거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인간성의 심층에 침잠하여 바라보면, 인간이란 똑같이 생로병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등에 걸머지고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 벌벌 떨고 있는 가엾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 눈뜰 때, 우리 앞에서는 제왕이니 노예니 가난뱅이니 부자니 하는 차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평등하여 누구나 친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이 동고 동비의 정으로 연결될 때, 거기에서 솟아나는 사랑(慈)의 샘이란 우정 그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에서 ‘자’가 ‘비(悲)’라는 글자와 만나 ‘자비’라는 숙어를 이루는 것이 상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비’는 karuna의 역어이어서 본디 ‘신음’을 뜻하는 말이다. 남이 괴로워서 신음하는 모양을 보면 누구나 가엾은 생각을 지니게 되거니와, 이 공감이 바로 ‘비’의 내용이다. -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