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진 왕조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군주에 대해 ‘황제’라는 칭호를 채택한다....이 칭호의 채택과 함께 그전까지의 정치질서인 봉건제는 폐지된다. 황제의 지배영역은 모두 황제가 직접 규율하는 군현(郡縣)으로 되었고, 인민들도 모두 황제의 직접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중앙집권의 강화를 핵심으로 정치체계를 전면적으로 혁신...기원전 350년에 현제를 시행해 그에 상응하는 관료 제도를 마련했다. “작은 향과 읍, 취락을 모아 현을 만들고 현령인 현승을 두었다. 이러한 현이 모두 31개 있었다.” 현령(縣令)은 현이 우두머리이고 현승縣丞은 민정을 주관했다. 현의 아래에는 향과 읍을 두었다. 또한 거주하는 백성을 대상으로 ‘다섯 집을 1보(保)로 묶고 10보를 연계하는’ 십오연좌제를 시행했다. 이 제도의 목적은 지방의 중요한 권력을 중앙 조정으로 집중시키기 위함이었다. 지방에 일괄적인 제도를 시행하여 “100개의 현이 한 가지 제도로 다스려졌으며” 관리라고 해도 임의로 제도를 바꾸거나 허위 조작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개혁은 진나라의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 장펀톈, <진시황 평전> 가운데
메이지 2년째인 1869년 다이묘들이 자기 관할하의 백성과 토지를 천황에게 반환하는 판적봉환, 1871년에는 다이묘들이 지배하는 봉건적 영지인 번(藩)을 모두 폐지하고 그것을 중앙정부가 직할하는 행정조직인 현(縣)으로 전환시킨 폐번치현을 급진 개혁파들이 주도하여 일방적으로 단행한다. 봉건적 정치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질서를 구축한 것이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중국식의 관료구조가 완전히 중앙집권화된 것은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인구에 대한 효과적인 또는 총체적인 통제를 보장할 수 있을 만큼 농촌의 촌락에까지 깊이 침투하지 못한 때문이다.
......
세금이나 지대의 수취 업무를 도장(導掌)과 같은 사사로운 경리인으로부터 수령과 같은 공적 임무를 맡은 직임자에게 이관했다. 그 결과 일부 세입이 중아정부로 되돌아왔으나 경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것도 개혁한 것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주요한 변화란 세금이나 지대를 반자율적인 기관이 받아들여온 것을 중앙정부가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는 사소한 변화인 것이다.
- 제임스 팔레, <전통한국의 정치와 정책> 가운데
중앙집권이라는 것은 '중앙'이라 불리는 지배 세력이 권력을 쥐고 인민들을 지배한다는 것.
개별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지배를 하느냐, 소위 말하는 '중앙집권국가'가 권력을 쥐고 지배하느냐는 권력 양태의 차이. 귀족이 지배하건 왕이나 황제가 지배하건 권력과 지배는 계속 유지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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