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을 만들 무렵에 고려 왕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오랑캐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다시 이루어 놓은 것이 팔만 대장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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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 간경 사업은 역사의 맥을 바로잡아 이어 가려는 민족의 염원이 그토록 간절하고 컸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족 의식의 총화라는 데에서 그 의미가 빛나는 것이다.
- [해인사] 홈페이지, <역사속의 대장경> 가운데 http://www.haeinsa.or.kr/tripitaka/history.html
몽고군은 이듬해인 1236년(고종23) 6월 다시 압록강을 건너 들어온다. 경기도와 충청도에 이어 전라도 전주까지 진출했다. 강화도의 고려정부가 집권자 최씨의 후원 아래 장차 16년에 걸쳐 진행되는 팔만대장경 각판사업을 시작하 것은 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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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강화)의 정부는 농민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대책을 서둘기보다는 오히려 가혹한 수취로 그 생활을 더욱 곤란케 할 뿐이었다. 이러한 귀족들의 수취는 농민들의 정부에 대한 반항심을 조장시킬 뿐 아니라 몽고에 대한 항쟁의욕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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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조정에서 내륙에 파견한 관원들은 평민들에게 가렴잡세를 가중시켜 조정의 총애를 받으려 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오히려 몽고군이 오는 것을 좋아했다. ([고려사] 권24, 고종 43년2월).” 강화도에서 파견된 고려정부의 탐관오리들을 쫓아주는 역할을 하는 몽고군이 오히려 반가울 지경이었다는 고려 내지 백성들의 정서를 [고려사]의 역사기록이 담고 있을 정도이니 그 사정을 가히 짐작할 만하였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해인사는 고려대장경을 설명하면서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라고 하고, '민족 의식의 총화'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삼성의 설명을 들어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몽고 침략 기간 동안에도 고려 정부는 농민들을 수탈 했고, 이 때문에 되려 몽고에 대한 항쟁 의욕이 꺾였다는 겁니다. 게다가 고려 관리들의 수탈 때문에 몽고군을 반길 정도였다니 임금과 귀족과 백성이 한결 같은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2&VdkVgwKey=11,00320000,38
농민들의 생명이나 안전과는 관계 없이 고려 정부 지배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만든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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