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묘인 주군에게 가신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질서와 권위의 변동을 당시 사람들은 ‘하극상(下剋上)’이라고 불렀다.
......
도쿠가와를 선봉에 내세워 다케다 가문을 멸한 1582년 6월, 오다는 어느 야심한 밤에 가신家臣 아케치 미쓰히데로부터 불의의 습격을 받는다. 불타오르는 교토의 절 혼노지에서 오다는 자살하고 만다. “혼노지의 변”으로 불린다. 오다의 또 다른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를 무찌르고 오다 가(家)의 실권을 장악한다. 이어 어린 주군을 물리치고 스스로 주군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렇듯 일본에서도 전국시대에 주군과 가신, 군신 사이의 의리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공민왕의 피살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우왕은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취약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무력 기반도 거의 없었다. 이에 비해 권문세족과 신흥 무장 세력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은 걸핏하면 사병을 배경으로 우왕을 협박하곤 했다...우왕은 아버지 공민왕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자신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내시 등을 느닷없이 죽인 것도 이런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그는
아무도 믿지 못했다. 우왕이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병을 거느린 신하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강력한 무력 집단의 지지를
확보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왕은 대표적인 무장 세력인 최영, 이성계와 손잡고 자신을 왕위에 오르게 해준 이인임 일파를 제거했다.
- 이성무, <조선왕조사> 가운데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라는 사군이충,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군신유의 등등을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충성과 의리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정말로 신하들이 충성과 의리에 가득하다면 굳이 이런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매일 매일 밥 먹어라, 때 되면 똥 싸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기 때문이겠지요.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 위계가 확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온갖 투쟁과 음모가 가득했지요. 황제나 왕을 암살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구요.
권력을 가진 자가 지위도 부도 여자도 가질 수 있으니 서로 권력을 가지려는 투쟁이 계속 되겠지요.
권력 투쟁이 멈추지 않고, 권력자에 대한 저항이나 도전이 계속될수록 지배자들은 충성이나 군신유의를 강조할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권력을 지키고 싶을 거구요. 북한이 그렇고 남한이 그렇고 일본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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