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의 논리에 설득을 당했던 사실이 제1차 포에니 전쟁 발발에 네 번째 요인이 된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까지 장구한 세월을 끊임없는 전쟁으로 보낸 상황에서 많은 로마 시민들은 패배한 적국에게서 취한 전리품으로 수입을 보충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부유하고 번성하던 시칠리아는 로마 군인들에게 군침이 도는 대상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운집한 인민 앞에서 연설을 할 때 그 점을 빠뜨리지 않고 강조했다고 한다.
- 세드릭 A.요/프리츠 하이켈하임, <로마사> 가운데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에 [사고 시키우에몬 각서]가 있다....“임진년(1592) 다이코(히데요시)의 뜻에 따라 귀국(조선)에 군대를 보내, 나라 안의 사람들을 남김없이 공격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숨어 있던 수많은 남녀와 아이들을 본방(일본)으로 연행해 왔다. (그 결과) 지금까지 하인이 없던 사람들까지 별안간 주인이 되어 기쁜 나머지, ‘또 (다이코)가) 조선을 침략해주면 더 많은 하인을 부릴 수 있을 텐데’라고 모두들 말했다.
근세 일본 대외관계사 연구자인 요네타니 히토시는 임진왜란의 양상을 일본의 전쟁 전통과 연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진중(陣中)에서 앞을 다투어 조선인 ‘포획’에 열중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인을 얻기 위해 전쟁이 재개되기를 열망하는 일본인 무장(武將)들의 모습은, 이 전쟁이 일명 ‘사람 사냥 전쟁’으로 불리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국내 정치사회 혁명에 의한 정치통합을 이룩하기 전 단계에서도 유럽 사회들은 이미 식민주의로 말미암아 인종주의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국민통합의 길을 걸었다.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이전 유럽 국가들의 비유럽 지역에 대한 식민주의는 유럽 사회들의 계층 간 정치통합에 기여했다. 영국의 국가권력과 부르주아지는 식민지 착취를 통해 획득한 잉여를 자국 노동자들과 일부 나누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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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유럽 본국에서 각자의 지위가 어떻든 식민지에서는 모두 지배자의 특권을 누렸다. 다카르나 몸바사에서는 백인이라면 가장 하급의 관리도 주인이었다. 파리에서는 존재조차 인정받을 수 없었을 사람들이 비유럽지역에서는 ‘신사’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대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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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럽지역 다른 인종들에 대한 공동의 지배자로서 우월감의 정체성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그들 모두는 이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귀족적 정치공동체의 성원임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전시에도 국가가 주선해 주는 단체관광을 즐기고, 전후에 개인 승용차와 단독주택을 공급받을 거라고 약속받고, 나치당과 무장 친위대 등을 통해 여태까지 상상 못한 벼락출세의 가능을 얻은 ‘순혈 독일인’ 노동자가, 설령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수천 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 ‘불온 분자’가 죽어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 과연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겠는가. 실미도의 비극이나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다 알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의 의식을 봐도 알 만한 일이다.
- 박노자,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 가운데
일본인들은 노예를 얻기 위해 조선 침략을 지지하고
미국인이나 한국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 침략을 지지하고...
타인에게 100의 고통이 주어져도
나에게 1의 이익이 돌아온다면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 마음
일본은 삼국 간섭에 저항했지만 결국 물러서게 된다. 러시아를 포함한 세 열강과 전쟁을 무릅 쓸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요동반도를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시점에서 일본 정부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중국 영토를 차지하게 된 것에 대해 열광하고 있던 일본의 ‘국민정서’였다. 무쓰외상은 “외교정책의 요건과 국민정서를 조화시키기가 가장 어려웠다”는 말로 그 고민을 회고했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국가는 도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통일된 ‘국체’를 구축하려고 했지만, 이에 대해 국민은 오랜 기간을 주저하면서 때로는 강하게 저항하기도 했다. 그 전기轉機가 된 것이 청일․러일 전쟁의 승리이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그를 계기로 일본인들을 결속하기 시작했고 국민공동체에 가까운 것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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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전승을 거둔 후에, 국가 선전기구의 지휘 아래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중국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고 오만이나 경멸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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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러시아와의 싸움에서도 일본은 승리...뜻하지 않은 승리에 취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 국민의 심리를 이용해서 애국심을 고양하고 국가 비판세력을 분쇄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 오오누키 에미코,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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