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신유정변에 의해 서태후, 공친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권이 성립된 이후, 1894년 청일전쟁까지를 일반적으로 양무운동 시기라 부른다. 이 운동은 태평천국을 비롯한 5,60년대의 여러 민중반란과 제2차 아편전쟁으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한 청조가 자강(自强)과 부강(富强)을 표방하며 강력한 군사력과 각종 근대산업의 육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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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의 관료들은 서구의 근대적인 무기의 위력에 주목하고, 포함을 이용하여 태평천국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영국으로부터 군함의 도입을 계획하였고 영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군사고문을 초빙하여 군대를 훈련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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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최신 장비로 무장한 군사력의 효능은 구체적으로 국내의 여러 반란세력의 진압에서 증명되었다. 1961년 이후 태평천국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한 증국번 휘하의 상군이 1864년 7월 태평천국이 수도로 삼고 있던 남경을 점령함으로써 태평천국의 반란을 진압한 데 이어, 1868년까지는 하남, 안휘성 경계지대에서 활동하던 염군도 이홍장 휘하의 회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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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진압에 해군의 필요성을 느낀 청조는 은 80만 량으로 영국에서 중형군함 3척, 소형군함 4척을 구입하기로 하고 영국에 귀국중이던 총세무사 레이에게 군함의 구입을 위촉
- 박혁순, '양무운동의 성격',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Ⅴ-중화제국의 동요> 가운데
한명기는 국왕을 포함한 조선 지배층이 민중의 이반에 대해 가졌던 두려움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선조는 조선민중에 의한
‘성중지변城中之變’을 우려했다. 그는 명군의 주둔, 그리고 명군 가까이에 거처하는 것이 왕권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일본군의 재침만을 우려한 것이 아니라 내부 변란을 못지않게 우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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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조에게 명군은,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강토(疆土)를 지켜주어 자신의 지배권을 회복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민심이 이반된 상황에서 내변(內變)이 염려됨에 이로부터 왕권을 지켜 줄 후원자”였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1894년의 동학혁명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커다란 농민반란사태였다. S.C.M 페인은 농민군의 기세 앞에서 무력으로 이를 진압할 자신을 갖지 못했던 국왕 고종이 민씨 척족세력과 그들의 후원자격이었던 이홍장의 대리인 원세개의 촉구에 따라, 동학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이 군대를 파견할 것을 청하게 된 것이라고 서술한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순조 11년 12월 18일(1812년 1월31일) 평안북도의 가산에서
시작된 민중봉기는 삽시간에 북에서는 의주의 성내 밖으로부터 남으로는 정주의 근교까지를 뒤덮었고, 정주에서의 농민군의 5개월에 걸친
농성을 거쳐서 다음 해 4월19일(음력)에 이르러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일반적으로 <홍경래난>이라고 불려왔던 평안도 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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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란은 흉작이 원인이며 즉흥적으로 봉기하였을 것이라는 식의 성격파악이 아니라, 흉작을 봉기의 계기로 이용하면서도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서 계획되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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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은 장기간의 농성에 따른 식료食料나 탄약의 부족 등에 의해서 최종적으로는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평안도의 <무전농민無田農民>을 중핵으로 한 농민군이 8,000명을 넘는 정부측 포위군에 대해서 5개월에 걸친 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측에 있어서는 큰 충격이었다.
-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上> 가운데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 출신의 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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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던 황해도 지역은 일찍부터 해택지를 비롯한 많은 땅이 개간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땅들은 모두 왕실과 지배층이 차지하고
농민들은 그 땅의 소작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특히 황주, 안악, 봉산, 재령 등은 일찍부터 바다에 가까운 하천에 인접한 지역으로
염분이 많고 저습한 지대였기 때문에 농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단지 갈대만이 무성한 곳이라 하여 이곳의 토지는 노전이라 불렀다.
부근의 백성은 갈대를 채취해 삿갓과 밥그릇을 만들어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노전은 결국 황무지라는 구실 하에
권세가의 토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자 그곳 주민은 갈대를 도리어 권세가에게서 구입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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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그 일당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임꺽정의 난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모여서는 도적이 되고 흩어져서는 평범한 백성이 되며 출몰이 무상해 잡을 수가 없다.”라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게릴라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관의 공격이 있으면 민중 사이로 흩어져 일반 민중과 도무지 구별할 수 없었다. 이것은 민중의
지지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 이성무, <조선왕조사> 가운데
임꺽정, 홍경래 등등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대항해 투쟁을 벌였을 때 이들을 살해한 것은 국가의 군대.
1894년 갑오년 조선의 농민들이 조선의 지배자들에 대해 투쟁을 벌였을 때, 조선 농민군을 공격한 것이 조선과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 1980년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을 두들겨 패고 살인한 것도 한국의 군대
군대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라 내부의 적으로부터 지배자들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기구.
때로는 자국 군대뿐만 아니라 외국 군대를 동원해 자국민들을 공격.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의 지배자들이 그랬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의 지배자들이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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