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란시대의 시작을 알렸던 오닌의 난이 벌어진 1467년에서 오다가 일본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1575년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에 거친 전국시대의 초기에는 활로 무장한 군대가 주력을 이루었다. 전국시대가 끝날 무렵에는 대포로 성채를 공격하는 식으로 전쟁 양상이 발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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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군의 주력은 기마부대였다. 오다 군대의 주력은 조총 부대였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가운데
스페인의 해외활동의 또 다른 근본적 특징은 무역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정북과 식민주의 활동을 전개한 것이었다...신대륙의 사회들은 구세계의 정복자들에게 두 가지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군사적 조직화 수준도 낮았다. 무기와 군사기술의 열세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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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도 번성하는 사회였다.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는 10만에서 30만명의 인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제국도 정복자들의 표적이 되자마자 순식간에 멸망한다. 1532년 스페인 사람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167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이 제국에 당도한다. 피사로는 코르테스와 마찬가지로 기습전술을 활용했다. 총과 기마는 모두 잉카 제국인들이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무기였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이인과 웅치 효포전투를 시작으로 우리들은 우금치 능선을 오르내리며
관군·일본군과 밤낮없이 혈전을 벌였다. 전투가 거듭될수록 쏟아지는 왜놈들의 포탄과 총탄에 머리통이 꿰뚫리고 가슴팍이 찟기고 팔뚝이
떨어져나간 동학농민군의 주검들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쌓여갔다. 찢겨진 깃발 나부끼는 겨울나무가지 사이로 게걸스럽게 날아드는 숱한
까마귀 까마귀 떼, 까마귀 떼를 뒤로 한 채 우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후퇴를 거듭했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 있는 '갑오년(1894년) 11월 무명 동학농민군'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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