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봄에 고종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학군에 대처할 것을 거론...3월25일 어전회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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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서울의 군사는 아직 파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군사를 빌려 쓰는 것은 역시 각 나라마다 전례가 있는데, 어찌 군사를 빌려다 쓰지 않는가?”라고 갑자기 하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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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다시 “중국에서는 일찍이 영국 군사를 빌려 쓴 일이 있다”고 주장한다. 1860년대 초에 청조가 태평천국을 토벌하기 위해 영국 등 제국주의 세력의 힘을 빌린 일을 가리킨 것이다. 이에 정범조는 “이것이 어찌 중국 일을 본받아야 할 일이겠습니까?”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고종도 물러서지 않고 고립을 부린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빌려 쓰려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 군사는 쓸 수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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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회의에서 청군 출병요청을 대신들이 반대하자, 고종은 전 협판 내무부사 박제순을 원세개에게 따로 보내서 청국의 의사를 타진하기까지 한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조선의 고종과 친러파들은 아관파천 후 조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러시아에게 확실히 요청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고종 개인에 대한 보호를 약속했을 뿐 조선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사업을 분명히 떠맡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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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식민지화가 진행되고 있는 땅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자유민권운동을 빙자한 “황제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데 비밀정보기관을 동원하고 있었다.
-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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