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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노복 해방 운동

순돌이 아빠^.^ 2014. 5. 20. 09:41

(중국) 노변奴變은 신사나 대지주가大地主家에서 사역하는 노복奴僕들이 집단으로 주가主家를 습격하고 그 매신賣身계약서를 빼앗아 파기하며 노복신분으로부터 해방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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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대의 노복은 ①가정내의 잡역雜役 ②농업 및 수공업 생산 ③주인의 수종(隨從) ④국가 요역의 대행 ⑤주인가의 가산의 관리·운용, 즉 주인의 상업·고리대경영의 실무나 소작지·소작인의 관리 등의 일에 종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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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⑤항의 노복은 ①~④항의 노복과는 크게 다르다. 이러한 일을 담당하는 노복을 ‘기강(紀綱)의 복(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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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로 가까워지면서 이러한 노복의 수가 격증하였다...이갑제질서가 해체되어 가고 갑수호는 물론 이장호·양장호마저 몰락해 가는 상황하에서 이들이 살아남을 길은 다음의 4가지가 있었다.


㉠관청의 서리나 아역인(衙役人)이 되는 길 ㉡고향을 떠나거나 지역에 따라서는 부업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길 ㉢파산된 후 채무를 변상하기 위해 전토를 팔고 전호가 되거나 자기의 몸을 팔아 노복이 되는 길 ㉣파산 직전에 토지를 신사에게 기탁하여 명의를 변경하고 아울러 자기 자신도 그의 노복이 되는 길 등이 었다. 명말로 갈수록 특히 ㉢㉣의 경우가 심하였다. 영향력 있는 신사나 대지주는 3,000~4,000의 노복을 거느린 예도 있었다.
노복 중 제 ①②③④항에 종사하는 노복은 기본적으로 주인에 대한 신분적인 예속도가 특히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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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복은 신계(身契 ; 노비문서)가 주인의 손에 있는 이상 이러한 차별대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주인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성 여부를 불문하고 노복이 주가에 대한 반항·폭행을 자행하고 폭력으로 신계를 탈취하려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명말·청초에 집중된 노변의 공통점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①노복의 요구는 대부분이 노비신분의 해방, 즉 양민신분으로의 회구였다. 노복들은 주인을 포박·구타·능욕·살해·방화·약탈 등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 신계를 탈취하려 하였고, 또 때로는 지방관에게 노복신분의 폐지를 승인해 주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신사층이었다. ② 노변은 어느 지역에서나 1현 정도 혹은 그 이상 지역을 포괄하는 광역적인 운동이었고 100명에서 때로 10,000명 정도에 이르는 대규모 집단의 운동이었으나, 강력한 지도자 아래에서 대단히 조직적인 행동을 보였다. ③이들 노변 지도자들이 제시한 주장의 공통점은 ‘명조가 망했으니 노비신분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변은 왕조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주인과 노복간의 신분질서를 명조 국가권력이 부지해 주었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 오금성, '명말·청초의 사회변화',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강좌 중국사 Ⅳ-제국질서의 완성> 가운데




(고려) 신종 원년 최 충헌 집권시에 개경에서 사동私僮 만적을 수령으로 한 대규모의 공사노예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이 만적의 난은 무신란 후에 일어난 노예반란 중 그 인원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또한 그 목표와 성격이 노예반란의 그것을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낸 대표적인 반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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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원년 5월 개경에서 사동 만적 등 6인이 수령이 되어 공사노예들과 공모하고 최 충헌 등 집권자를 죽인 후 천적을 불태워버려 삼한의 천인을 없애고, 자기들의 공경장상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자는 의논을 하여 난을 기도하였으나, 기일期日에 수백명밖에 모이지 않은 까닭에 다시 후일에 모일 것을 약속하였던 바, 그 중에서 밀고자가 나타나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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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무신란 이후 많은 천예출신이 장상이 되었다. 장상이라고 따로 무슨 씨가 있겠는가. 결국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노비만이 어찌 매질 밑에서 고역을 다하라는 법이 있겠는가. 우리는 최 충헌 등 집정자를 죽이고 천적을 불태워 삼한에 천인을 없게 하면 공경장상은 우리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변태섭, '만적난 발생의 사회적 소지', 변태섭 외, <전통시대의 민중운동 > 가운데



7, 8월 집강소 체제하에서 천민층 주도의 반봉건 투쟁은 오히려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영세 빈농층과 해방된 노비, 유민층 등이 주동이 되어 강경한 대부민 對富民 투쟁과 신분해방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천인들의 양반사족 징치가 예사로 이루어졌으며 노비들이 스스로 문서를 태우고 종량從良한다든가 그 주인을 결박, 주뢰를 틀고 곤장을 치는 등의 행위가 빈번

- 서영희, '1894년 농민전쟁의 2차 봉기', 한국역사연구회, <1894 농민전쟁연구 4-농민전쟁의 전개과정>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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