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의 요구가 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기원전 494년 정치군사적 투쟁의 형태를 띤 최초의 분리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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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들의 군사적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던 상황에서 귀족들은 국가와 군대의 분열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평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기원전 494년에 평민 출신의 10명의 호민관직이, 뒤이어 기원전 471년에는 트리부스 평민회가 창설되었다.
- 글출처 : 김진경 외, <서양 고대사 강의> 가운데, '로마 공화정의 발달과 몰락'에서
이탈리아 중남부에 유입된 많은 수의 노예들이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던 현실은 대규모 노예반란들의 원인을 설명해 준다. 시실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노예전쟁들(B.C. 134~101 그리고 B.C. 104~100)이나 스파르타쿠스(Spartacus)에 의해 지도된 이탈리아에서의 노예봉기(B.C. 73~71)는 물론 노예제 자체를 폐지하기 위한 노예들의 혁명운동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수 많은 노예들이 노예소유주들이나 국가에 커다란 위험이 될 수 있음이 드러났다. 노예반란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던 많은 수의 농촌노예들, 즉 이목노예들이나 농장노예들이 노예제에 항거하기보다 자신들의 개인적 자유를 갈구하던 염원이 반영된 즉자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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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반란 이후의 바로와 콜루멜라가 그들의 농업서에서 카토와 다른 노예관을 보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노예반란들을 경험한 노예소유주들은 노예들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면서 경제적으로 더 많은 수익을 끌어낼 수 있는 당근과 채찍의 방식들을 모색하였다. 바로가 농장소유주가 감독노예들에게는 보상이나 특유재산을 허용하라고 말하는가 하면, 농장의 일반노예들에게도 가능하다면 채찍보다 회유책을 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가 이목노예의 경우 농장노예보다 남녀노예간의 동거를 보다 광범히 허용하도록 한 것도 우선적으로 이목노예들의 통제를 고려한 조치였다.
다 른 한편 로마 국가는 노예들에 대한 국가적, 집단적 통제방식도 모색하였다. 공화정 말과 제정 초기에 로마국가는 노예반란의 주요 무대였던 방목지역과 그 인접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맡은 정무관들을 파견하였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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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농장의 소유주들은 지하감옥을 마련하여 도주를 시도한 노예나 규율을 어긴 노예들을 엄격히 처벌하도록 함과 동시에 노예들의 불평에도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경제적 수익을 증대시키고자 하였던 것
- 글출처 : 김진경 외, <서양 고대사 강의> 가운데, '로마시대 노예제의 발달'에서
노예와 노예 소유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 로마인들 자신은 “노예가 많을수록 불화도 많다”라는 짤막한 문귀로써 정곡을 찔러 표명한 바 있다. 노예들의 태도는(기원전-옮긴이) 200년부터 70년 사이에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뒤흔들어 놓았던 대규모 노예전쟁에서 가장 철저하게 표현되었다.
봉기의 중심지가 된 지역은 대토지 소유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전통적인 사회적·정치적 구조가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이와 동시에 대규모의 노예집단이 대농장에 집중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이 노예들 가운데서도 문제의 초점이 된 것은, 자유민으로 태어났으나 부채, 전쟁포로, 또는 인간약취 등의 원인 때문에 처음으로 로마인의 노예상태로 떨어져 버렸던 사람들, 무엇에도 비길 바 없을 만큼 자유를 다시 획득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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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전쟁은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반란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카푸아에 있는 글라디아트르(검투사) 양성소에서 도망쳐 나온 후 고대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남부 이탈리아 지방을 진군해 가면서 스파르타쿠스의 추종자들은 수천 명의 사슬묶인 노예들을 해방시켰으며, 바로 그 노예들을 얽어매고 있던 사슬로 무기를 주조하였다. 스파르타쿠스군은 상당히 많은 로마군대를 격파하면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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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힘을 다 동원하여 대항...크라수스는 육천 명이나 되는 살아 남은 노예들을 카푸라와 로마 사이의 가도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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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국가는 농촌지역에 대한 감시를 보다 효과적으로 실시하는 한편, 잔인한 노예주인의 무자비한 폭행으로부터 노예를 보호하는 입법조치를 취함으로써 새로운 반란을 막는 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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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이 언제나 염두에 두고 획득하고자 희망하였던 것이 무엇이었건간에, 여기에서 한 가지 점만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들의 의도를 실현시킬 수가 없었으며, 그들의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말은 물론,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압박과 착취에 맞서서 노예들이 전개하였던 반항이 헛된 것이었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노예들의 반항은 로마의 농업을 변형시키고 따라서 로마의 사회를 변형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고 생각한다. 농장에서는 노예들의 저항이 끊임없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노예에 대한 감시가 계속 강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 같은 사실은 - 다른 요인들과 함께 작용하여 - 마침내, 농업 전반에 있어서 노예노동이 점차 폐지되지 않을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까닭에서이다.
- 글출처 : '고대의 노예경제 : 로마제국의 경우', <노동의 역사-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산업사회까지> 가운데
1840년대에 직물공업에 한해서 처음으로 공장노동자의 노동조건 및 생활조건의 향상이 이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저절로 발생한 일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 하사품으로 주어진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다. 이러한 성과는 기업가의 거리낌 없는 이윤추구욕에 맞서서 보다 높은 임금을 획득하고 작업시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이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던 투쟁의 대가로 획득된 것이었다.
- 글출처 : '산업혁명 : 영국에 있어서 공장제의 성립', <노동의 역사-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산업사회까지> 가운데
지배자들에게 호소하고 간청해서
자유를 얻은 적이 있는가
로마의 노예들이 그러했듯이
조선의 동학 농민들이 그러했듯이
사회가 저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 받는 이들의 반란과 저항으로 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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