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물학자인 리하르트 보시들로는 메클렌부르크 지방을 대상으로 이 같은 민간전승을 수집한 바 있다. 이러한 민간전승에서는 학대와, 고용주의 자의恣意, <신성한> 복수와 의당히 가해질 수 있는 징벌 따위에 대한 이야기가 숱하게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농촌사회의 위계서열이라든가 주인과 하인 사이의 확고한 상하구분 등은 신에 의해 부여된 것,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같은 지각(知覺)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인가 하는 점은 한 목사가 동프로이센의 어느 노동자부인과 나누었던 인터뷰 내용-그는 이를 1909년에 발표하였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선거와 정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내가 들은 얘길 하자면요, 지주는 선거 때가 되면 자기 일꾼들한테 그랬지요. ‘N씨한테만 투표하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나면 일꾼들은 N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를 받고 투표를 했구요. 제 스스로가 손해를 보더라도 말예요. 우리 스스로는 옳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어요.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얘기는 참 많이 들었지요. 사람들이 그렇게들 말합디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우. 자유주의 정당이니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니 하는 게 뭔지에 대해선 아예 한마디도 말 못하겠네요.
낯선 말을 들으면 우린 아무것도 생각하질 못하니깐요. 쥔양반들이야 그런 데 대해 벌써 뭔가를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여러 모로 너무나 어리석은 걸요. 돈 많은 쥔양반들이 모든 걸 다 알 테지요. 우리네 같은 사람들은요 처음에는 똑똑한가 보다 믿게도 되지만 오래 두고 보면 제대로 똑똑한 것도 아니지요 뭐. 선거팜플렛이니 정당의 달력 같은 건 한번도 보거나 들은 적이 없다우.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야 부자들한테 맞서서 일어설 수가 있나요 어디”
농촌구역이 고립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이곳은 더욱더 확고하게 보수적 정책의 아성 노릇을 하게 되었거니와, 비스마르크가 제국의회에 대해 인준해 주었던 평등선거권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는 <무기>라기보다는 오히려 <함정>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동시에 농업노동자 계층의 <정신적이고 정치적인 해방>의 거의 추진되지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목사니 학교교장이니 영지감독관이니 재향군인회니 하는 이들과 공동체장로니 지방헌병이니 하는 관료등 등등이 위에서 가로막고 서서 합심하여 전력하는 통에, 농촌노동자계층은 <체제전복정당> 사상세계라든가 그들이 추구하는 바로부터 차단된 채 숙명론과 공손한 태도에 매달려 있었으며, 고용주와 농촌 관헌당국이 그들에게서 기대하고 있던 견해며 행동 방식을 재생산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좌파 자유주의적 성향의 평화주의자였던 헬무트 폰 게를라하는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이와 같이 개괄하였다. “농촌노동자들은 그 당시 오로지 보수주의적 지배를 지탱케 해 주는 요인이었다. 그들은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는 처지였던지라 본격적인 신문을 읽는다는 호사함을 누릴 수 없었다. 기사령 소유자는 자기의 비용을 들여 그들에게 소형의 보수주의적 일간지를 배달해 주게 하거나 아니면 심지어는 오직 신심(信心) 깊은 주일회보만을 배달해 주게 하였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들은 애국적인 이야기가 담기거나 순종, 복종 및 만족과 같은 기독교적 훈계가 실린 달력을 받았다...”
- 글출처 : '산업화시대의 농업노동 : <프로이센적 경로>', <노동의 역사-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산업사회까지>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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