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처럼 인도영화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인도에서 만든 영화를 보면 여러 사람이 떼거리로 나와 화려한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을 때가 많아요. 물론 맨날 춤을 추는 건 아니지만요. ^^
영화 <PK>에도 춤추는 장면이 잠깐 나오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이유에서 상큼 발랄 깜찍했어요. 재미나게 보면서도 인간과 사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구요.
<지상의 별처럼>에서 나왔던 아미르 칸이 주인공 PK 역할을 맡습니다. PK는 종교에 대해 여러 물음을 던집니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서 온 PK, 그러니까 지구인들이 가진 생각이나 감정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존재의 눈으로 지구인들을 바라보는 거지요. 흔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바라보는 겁니다.
종교
종교란 무엇이고, 우리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일까요? 종교는 우리를 평화와 안식으로 이끄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를 무지와 맹목으로 이끄는 걸까요?
스피노자라는 사람은 <신학정치론>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을 했지요.
[창세기] 9장 12절에서 신은 노아에게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둘 것이라고 말한다. 신의 이 행위 역시 태양 광선이 작은 물방울과 부딪칠 때 발생하는 빛의 굴절과 반사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
성서에 서술된 모든 사건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의 원인은 모두 신에게로 돌려진다.
...
성서는 신에 대한 일종의 경외심을 촉발하여 대중의 마음속에 신앙을 가장 잘 주입할 수 있는 방식을 예상하면서 대중의 상상력에 가장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차용한다.
종교는 온갖 거짓말로 대중을 속이고, 기적이니 신비니 하면서 힘없고 무력한 인간의 마음을 현혹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종교라는 것이 그렇다는 거지요.
그런 종교의 실상이 드러나려고 하면 종교는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분노를 쏟아내고 온갖 공격을 퍼부으며 이를 막으려 하지요. 우리 모두 신의 소중한 아이들이라고 하면서도 그 아이들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말하지 못하게 하며 괴롭히는 겁니다.
정말 신이 계시다면 생각이 다르다고 말하지 못하게 했을까요? 영화 <PK>를 상영하지 말라는 시위가 인도에서 있었다고 하네요.
지난달 29일. 인도 뭄바이 위치한 극장 앞에서 연말 개봉한 인도영화 ‘P.K.’의 포스터를 불태우는 힌두교 단체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힌두교 보수주의 단체 ‘바즈랑 달(Bajrang Dal)’은 ‘P.K.’가 힌두교 신들을 모욕했다고 주장하면서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P.K. 상영에 반대하는 이와 유사한 시위는 인도 전역에서 일어나, 몇몇 영화관은 기물이 파손되는 피해를 보기도 했다. - 서울경제, ‘인도서 힌두교 풍자 영화 논란...제2의 '샤를리 엡도' 되나?’, http://economy.hankooki.com/lpage/worldecono/201501/e20150119135947117900.htm |
종교인들의 사랑 부족과 불관용의 태도는 인도와 힌두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한국의 기독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가 멀티플렉스에 조직적으로 공문을 보내 대형 교회를 비판한 영화 <쿼바디스>의 상영을 중단하라고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쿼바디스>는 사랑의 교회 신축 문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탈세·배임 문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 문제를 비롯해 대형 교회가 안고 있는 세습과 전별금 문제 등을 파헤친 영화다. - 한겨레, ‘“쿼바디스 상영 말라”…기독교계 ‘조직적 압력’ 드러나‘,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668972.html |
물음들
만약 세상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왜 독일의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놔뒀을까요? 그것도 신의 뜻인가요? 만약 신이 곧 사랑이고, 신이란 자비의 존재라면 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무슬림들을 죽이는데 가만히 놔두고 있을까요? 만약 우리 인간이 신의 소중한 자녀들이라면, 왜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들은 여성을 학교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걸까요?
혹시 신의 존재를 이야기 하고,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고, 신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정작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신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그들이 느낀다는 것이 환상은 아닐까요?
신이 어느 곳에나 계시다면 교회는 왜 필요합니까? 신이 우리 마음 속에 계시다면 성직자니 종교인이니 하는 사람들은 왜 필요한 겁니까? 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왜 사람들에게 돈을 바치라고 합니까? 과연 신은 성직자 자리를 할아버지-아버지-아들로 이어주라고 하셨을까요?
종교에 관한 PK의 물음이기도 하고 저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혹시 종교인들이 신을 내세우며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현혹해서 자신들의 욕심만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거지요.
포이어바흐라는 사람은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이런 말을 했지요.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중요한 것은 종교의 어두운 본질을 이성의 횃불로 밝혀주어 인간으로 하여금 마침내 지금까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종교의 몽매성을 인간의 억압에 사용하고 있는 저 모든 인간에 적대적인 세력의 먹이나 노래갯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
나의 강의와 저술의 목적은 다같이 인간을 신학자가 아닌 인간학자로 만들고, 신을 사랑하는 자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자로 만들고, 내세의 수험생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만들고, 천상적이고 지상적인 군주제와 귀족제의 종교적 정치적 하인에서 자유롭고 자신감에 찬 지상의 시민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는 온갖 외로움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누군가 이런 마음을 조금만 건드리면 쉽게 움직이고 빠져들기 쉽지요.
외로움을 덜기 위해 신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정말 외로움에서 벗어났을까요? 정말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제가 아는, 종교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외로움에서 벗어나지도, 두려움을 떨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마음의 힘겨움을 종교를 통해 잠깐이나마 잊어보려고 애쓰지만 마음 밑바닥에 무겁게 자리하고 있는 힘겨움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요.
왜 그런 걸까요?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에 따라 열심히 살았는데도 왜 그들은 외로움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요?
어쩌면 종교는 인간이 외로움이나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게 아니라 인간이 계속 외롭고 두렵도록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인간이 외롭고 두려워야 종교 생활을 할 테고, 그래야 종교가 유지되고 성직자들이 힘을 얻게 될 거니까요. 외모에 대해 계속 불만을 가져야 성형외과가 잘 되듯이 말입니다.
종교는 정말 인간을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간이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종교라는 것을 버리고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아끼고 사랑하는 연습이 필요한 걸까요?
종교를 사랑하기 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성직자의 말에 따르기보다 다른 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종교로부터 벗어나 깊은 평화에 이르도록 하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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