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 미래엔, 2015
“저는 뛰지 않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뛰려고 해도 뛸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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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해도 안 될 것이라는 생각부터 들지는 않는가?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불안한데 다시 해보려고 힘을 내봐도 곧 기력이 떨어지고 의욕을 잃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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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으나 에너지가 바닥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스스로의 힘으로 처지를 바꿀 수 없는 상황’.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무기력helplessness라고 한다. - 16
하고자 하는 일에 몰입하지 못하고 오늘 하루를 허비한다면,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절망이 스스로를 잠식한다. 그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하루 치만큼 병든다. 한 달을 하지 못하면 병은 조금 더 깊어진다. 일 년을 허비한다면 그 병은 만성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10년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 19
심리학에서는 무기력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 또는 ‘현저하게 의욕이 결여되었거나 저하된 경향’이라고 정의한다. 즉, 무기력은 자발성과 의욕이 상실된 상태이며 반대로 무기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발성과 의욕을 회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23
2009년 잡코리아와 비즈몬이 함께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73.4%가 “회사에 출근하기만 하면 무기력을 느낀다”며 이른바 ‘회사 우울증’을 호소했고 일은 가능ㅎ라면 피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 25
환경과 사건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 이를 두고 심리학에서는 ‘통제 불가능성’이라고 한다. 이런 통제 불가능성을 경험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귀찮아. 어차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자연히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지고, 시도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셀리그만은 실험을 통해 속수무책으로 전기 충격을 받은 개는 도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도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얻었다. - 27
무기력해지면 여러 가지 ‘정서 장애’가 나타난다. 슬픔·우울·불안·죄책감·분노 등 부정적 감정이 생겨난다. 이런 부정적인 정서는 육체에도 영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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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체스터 의과대학의 조지 엥겔 교수는 심리적 상실과 신체적 질병의 관계를 20년 이상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무기력을 느끼기 전까지 생리적인 병원체를 잘 막아내던 유기체도 무기력을 느끼면 저항력이 떨어진다고 한다.
즉, 무기력은 유기체를 각종 질병에 노출되기 쉽게 만든다. 원래는 건강한 체질이던 나도 무기력 때문에 우울증을 앓은 기간에는 여러 질병에 시달렸고, 지금은 그 증상들이 거의 사라져 다시 건강해졌다. 그때 나를 괴롭힌 질병이 단순히 노화에 의한 것만은 아닌 이유다. - 29
동물과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외부 공격에 반응하고 도피하며 때로는 반격하기도 한다. 그것은 생존과 직별되는 본능이다. 그러나 무기력에 점령당한 사람과 동물은 지극히 수동적인 성향을 띠기 때문에 공격에 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이는 온화함과는 다르다. 온화함은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수용하는 것을 말하지만 수동성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격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 29
무기력을 느끼기 시작하면 타인과 교제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사라진다. 자연히 가까운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혼자 있고 싶어 고립상태를 유지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집중한다. - 31
지남력 장애란 시간·공간·관계·성질·식별 등의 감각에 혼란이 온 상태를 말한다. 무기력한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면 사고 체계에 혼란이 온다. 집중하는 시간이 짧아지며 말을 더듬기도 하고 이름, 날짜 등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기억력과 언어 능력이 감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남력 장애의 원인은 내면의 동요와 스트레스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무기력했던 기간에 일어난 일 중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 게 많다. 그 이전의 일들은 상당히 또렷하게 기억하지만 그 무렵의 일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 33
일반적으로 고아원 같은 시설에서 양육한 아동이 일반 가정에서 자란 아이에 비해 의욕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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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원에서 양육된 아이는 아무리 울어도 보모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체험을 하면서 ‘내가 아무리 크게 울더라도 불쾌한 환경을 바꾸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통제 불가능을 학습하게 된다.
자연히 아이다운 호기심이나 관심을 표현하는 일이 줄어든다. - 89
심리학자 블래너도 직장인의 무기력에 대해 “피고용인은 개인을 무시하는 제도에 의해 생산수단과 완제품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전체적인 경영 방침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고용 조건에 대해서도, 작업 공정에 대해서도 통제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무기력을 느낀다”고 했다.
즉, 자신이 직장과 일에 영향력을 직접 행사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이다. - 103
당신은 일요일 밤, 다음 날이 기다려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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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일요일 밤이면 우울해지고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기 싫어 괴로워한 적이 많았다. 정규직 교수였을 때보다 비정규직 연구 교수로 지시에 따라야 했을 때 그런 생각을 더욱 자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는 분명하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적고, 마치 부품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 104
2002년 2월 나는 박사 학위를 받고 한 달 후에 결혼을 했다. 직장인 혜전대학교는 충청남도 홍성에 있었고, 결혼 후 내가 살던 집은 경기도 일산이었다. 결혼 후 승용차로 편도 168km쯤 되는 거리를 매일 출퇴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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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와 가사까지 완전히 내 몫이었기 때문에 나는 지방 대학 교수직과 주부, 엄마 역할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남편은 아이 기저귀를 간 적도 분유를 먹인 적도 단 한 번 없었고 설거지도 도와준 적이 없었지만 가사 도우미 조차 쓰지 못하게 하는 가부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남편에게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고 그냥 참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하는 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128, 129
인지 장애는 무기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인지란 살아오면서 배우고 경험하며 형성된 사고 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틀이다. 무기력을 학습하고 나면 이 인지 방식이 왜곡된다. 그래서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 앞에서도 “해봤자 안 될 것 같아. 또 실패할 거야”라는 잘못된 믿음에 지배당한다. - 183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지나치게 경쟁적이다. 타인의 성공이 곧 나의 실패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동료와 함께 성장하라고 배우지 않고 타인보다 유능하게 보이고 돋보여야 한다고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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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대학 대니얼 에임즈...초등학교 5학년 남자아이 두 명을 한 조로 해 문제 풀기 실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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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임즈는 ‘경쟁 조건’과 ‘비경쟁 조건’이라는 두 개의 실험 조건을 만들었다. 경쟁 조건에서는 두 사람 중 성적이 좋은 아이가 승자가 된다. 실험에 임하기 전에 이기는 아이에게 상으로 장난감을 주겠다고 미리 알려주었다. 비경쟁 조건에서는 연구에 협력해준 보답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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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별을 열 개씩 주면서 자신과 상대방이 각각 몇 개씩을 받아야 하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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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조건에서 이긴 아이는 필요 이상으로 자기에게 많은 별을 주는 대신, 진 아이에게는 별을 적게 주었다. 자신이 조금만 잘해도 아주 잘한 것으로 착각하고 경쟁에서 진 상대의 가치를 아주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런 판단은 그 아이가 나중에 실패를 경험할 때 큰 실망과 패배감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상당히 위험하다.
게다가 경쟁 조건에서는 진 아이도 자신에게 별을 조금만 주었다. 즉 경쟁에서 지면 패배감을 강하게 느끼고, 자신을 무능력하다고 평가해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벌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경쟁 조건에서는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양쪽 모두에게 열등감과 무기력이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비경쟁 조건과 달리 승패에 따라 감정의 기복도 심하게 나타난다. 에임즈는 경쟁과 정서 장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승자는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자기도취에 빠지고 패자는 심각한 자기 비하에 빠진다. 더군다나 승자가 실패를 경험했을 때 겪는 실의와 낙담은 매우 심각하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실패 지향 체제다.” - 25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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