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홍당무는 보기보다 조심성이 많은 아이였다. 솔직히 나팔이 더 갖고 싶었다. 나팔은 손에서 발사될 일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또래 남자아이들은 총이나 칼처럼 전쟁놀이를 할 수 있는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홍당무도 화약 냄새를 맡으며 때려 부수는 놀이를 할 나이였다. 아빠는 당연히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나이에 맞는 선물을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총을 갖고 싶어요”
.........
홍당무는 음식을 더 달라고 조른 적이 없었다. 마치 금지 조항이라도 있는 것마냥 철저하게 나름의 규칙을 지켰다.
...
홍당무는 좋아하지도 않는 밥을 억지로 먹으며 배를 채웠다.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밥을 좋아하는 르픽 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 질 르나르, <홍당무> 가운데
홍당무는 나팔을 더 갖고 싶었지만 아빠가 홍당무가 총을 가지고 놀기를 더 바랄 것 같아서 총을 갖고 싶다고 했지요. 그런데 예상 밖으로 아빠가 선물로 나팔을 준비했다고 하자 홍당무는 얼른 말을 바꿉니다.
"아니에요. 아빠, 농담이에요. 저는 총 같은 건 정말 싫어요. 어서 나팔을 주세요. 나팔을 불면서 노는 게 얼마나 신 나는 일인지 보여 드릴게요"
슬픈 일입니다. 홍당무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 있는 그대로의 자기 마음을 드러냈다가는 사랑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머리를 굴리고 굴렸던 게 아닐까 싶어요.
르픽 부인은 홍당무를 계속 때리고 욕하고 괴롭힙니다. 그런데도 홍당무는 좋아하지도 않는 밥을 열심히 먹습니다. 엄마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이지요.
홍당무만 그런 게 아니라 많은 우리들이 자신을 바꾸고 꾸며서 사랑 받으려 애쓰며 사는 건 아닐까요.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은, 사랑을 줬으면 하는 사람이 좋아할만한 행동을 하고 말을 합니다. 상대가 기분이 좋아야 나를 예뻐하고 사랑을 줄 테니까요.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이 좋아할 경우입니다. 원하는 사랑이 크면 클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도 쉽게 포기할 수 있겠지요.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것조차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좋아하는 것처럼 합니다.
동시에 어느 누군가와 서로 보상을 주고 받는 뜻깊은 관계를 맺길 희망했고, 아동기에 받아 보지 못했던 애정 어린 돌봄과 배려를 간절히 갈망했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보잘 것 없는 친밀함이나 따뜻한 감정조차도 쉽게 지나치지 못하고 붙잡아 두려는 절망적인 시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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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 : 남편은 때로 나를 강간하고 했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때로는 그가 나를 강간했어요. 남편은 청소를 시키고, 내 돈을 가져가고 아니면 여분의 돈을 마련하려고 나를 팔아서 이득을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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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다른 남성들과 침대로 가서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몇 번은 그가 원하는 대로 했어요. 그가 나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바보 같았지만, 그를 사랑했어요.
- 글출처 : 주디스 루이스 허먼,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
사랑을 얻기 위해,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고통을 참고 나를 바꾸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얻기 위해 나를 바꾸고 또 바꾸는 세월이 쌓이고 쌓이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사랑을 얻고 마음에는 평안이 찾아올까요?
아니면 끝없는 갈망과 채워지지 않는 공허만이 가득하게 되는 걸까요? 어느 순간 문득 정말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떠오르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요?
나를 바꾸고 고통을 참았던 세월만큼 마음의 상처는 커지는 게 아닐까요?
수많은 아내들이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바꾸지만 결국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수많은 자식들이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바꾸지만 결국 사랑은 얻지 못하고 끝없는 기다림만 남게 되는 것처럼.
남편의 사랑이든 부모의 사랑이든, 해도 해도 안되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라면 이제는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다다를 수 없는 길을 걸으며 공허와 허무 속에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라도 포기할 것은 포기하고, 그동안 외면하고 억눌렀던 진짜 나를 보듬어주고 아껴주는 건 어떨까요? 연극처럼 꾸미며 살기를 멈추고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며 사는 건 어떨까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 작더라도 진심으로 나를 아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건 어떨까요?
홍당무는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가 햇볕이 드는 곳에 내려놓고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마리 나네트 할머니였다.
...
“...내가 너의 친할머니는 아니지만, 솔직해 말해서 너희 가족들은 너를 너무 괴롭히는 것 같구나.”
홍당무는 엄마가 들을까 봐 눈치를 살피며 마리 마네트 할머니에게 대꾸했다.
“그래서요? 그게 할머니와 무슨 상관이에요? 할머니 일이나 잘 하세요. 제 일에 상관하지 마시구요.”
- 질 르나르, <홍당무>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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