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평화.함께 살기/생명.인간.마음

감정에 대한 두려움

순돌이 아빠^.^ 2015. 2. 26. 08:38

에릭은 자기 몸에 대단히 자신 있었지만, 다른 형태로 벌거벗는 데는 심할 정도로 수줍음을 탔다.
...
에릭은 강과 숲에서 벌거벗은 채 뛰노는 것을 좋아할지는 몰라도, 감정의 벌거숭이가 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다급하게 상징적인 ‘가운’을 찾아 헤맸다.
...
감정적인 벌거벗음은 남에게 자신의 약함과 모자란 부분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된다.
...
더는 거짓말하거나 허세 부리지 못하고, 뽐내거나 미사여구 뒤로 숨지 못한다.
..
내 필요를 고백할 때는 감정적인 벌거숭이가 된다 – 당신이 없으면 헤매게 될 거라고, 독립적인 사람처럼 보이려 애썼지만 꼭 그렇지도 않으며, 인생의 방향이나 의미도 모르는 형편없이 유약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
감정의 옷 입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른 속, 상징적인 생식기의 약함, ‘당신이 필요하다’는 엄청난 비밀을 나에게 들키지 않도록 만든 옷장 전체로 이루어진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사람, 곧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다른 사람과 시시덕거림으로써 우리를 미치게 하거나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
에릭은 무게를 폭넓게 분산했다. 여자 친구를 몇 명씩 유지하는 것[거절을 당하더라도 곧바로 구조가 무너지지 않도록 위험을 줄이려고], 어느 집단이 등을 돌려도 생존할 수 있게 충분히 많은 집단과 교제하는 것, 어느 거래가 실패해도 견딜 수 있게 돈을 많이 버는 것 등이 그 남자가 세운 기둥들이었다.

...


에릭은 육체의 욕구는 잘 받아들였지만, 감정의 욕구는 이런 식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편이 익숙했다. 그 남자는 앨리스의 관심을 끌고 싶을 때는 감기나 독감에 걸렸다거나 등이 아파 죽겠다고 말했다. 이런 행동 뒤에 있을지 모르는 진짜 아픔을 인정하기보다는 그쪽이 편했다. 


...


앨리스의 유년기 이야기를 들어야 할 위기에 처하자, 에릭은 두 번째 이유 때문에 눈을 돌렸다. 물어본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지만, 가장 고통스런 유년의 경험 이야기는 그를 불쾌한 감상에 빠지게 만들 터였다. 마음을 진정하려면 손수건이나 그보다 더한 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 알랭 드 보통, <우리는 사랑일까> 가운데







쉽게 잘 느껴지지도 않고

그게 무언지 생각해 본 적도 많지 않지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감정의 풍선들이 꽉 차 있다고 하지요

조금만 건드리면 빵! 하고 터져 버릴 것 같이 잔뜩 부풀어 있는 상태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풍선에는 이름이 붙어 있다고 하지요.

외로움, 두려움, 서러움, 모멸감, 고독, 긴장, 흥분, 혼란, 조마조마, 고통, 아픔 등등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빵빵해진 풍선들은 계속해서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고

우리 각자가 그런 감정들이 올라 오지 못하도록 마음의 힘으로 누르고 있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면 힘들고 괴로우니까요.






그런데 우연히 길을 가다가 길모퉁이에서 혼자 놀고 있는 꼬마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털쩍 주저 앉아 버렸다고 하지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멍해진 거지요.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아이가 돌을 던진 것도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털쩍 주저 앉아 버렸어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려서 길 옆 의자에 앉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해 보는 거에요. 그러고 보니 혼자 놀고 있는 꼬마가 자기 어릴 적 모습을 떠오르게 했던 거에요. 아빠와 이혼한 엄마가 자기를 혼자 키웠지요. 엄마가 가난해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했고, 엄마 일나간 사이에 하루 종일 혼자 있게 만들었던 거에요


엄마가 힘들까봐 어린이집 보내달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지요. 혼자  있으니 심심하기도 심심하고 무섭기도 무섭고 외롭기도 외롭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늘 그렇게 혼자 외톨이로 지냈던 거지요. 외롭지만 외롭다고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면 어린 시절을 보냈지요.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난 외롭지 않아...괜찮아 괜찮아...난 괜찮아...ㅠㅠ'하면서 자신을 달랬던 거지요. 



그동안 살면서 그때의 감정이 다시 떠오르면 너무 외롭고 춥고 쓸쓸해서 어떻게든 그 감정이 떠오르지 않도록 틀어 막으며 살아 왔지요. 학교 가면 어떻게든 친구들한테 잘 해 줘서 늘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을 수 있도록 했고, 꼭 좋아하지는 않지만 혼자 있기 싫어서 애인을 만나기도 했지요.





그런데 오늘 그 '외로움'이라는 풍선이 '빵!'하고 터져버린 거에요. 언제든지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풍선이었는데... 혼자 놀고 있는 아이를 본 것이 마치 바늘과 같은 역할을 한 거지요. 빵하고 터진 풍선이 온 마음을 덮어 버렸네요.


그러니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나지 않고 어찌 주체할 수도 없는 외로운 마음이 들어 털쩍 주저 앉아 버린 거지요. 오래전 어릴 때의 일이고, 이젠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의자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있다 정신을 차렸어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하네요.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난 괜찮아. 잠깐 옛날 생각이 났던 것 뿐이고, 잠깐 기분이 그랬던 것 뿐이야...그래 얼른 잊자. 내일도 출근해야 하잖아'


그러면서 이어폰을 끼고 쿵짝쿵짝 빠른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길을 걸었지요.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우울한 기분이 사라질까봐...사라지기를 바라며...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아무도 듣지 않는 주장을 하면서...






별다른 걸 하지 않았는데도 사는 게 힘들고 피곤할 때가 있지요. 별다른 걸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어쩌면 이런 감정의 풍선들이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 속으로 나타나지 않게 억지로 누르느라 너무 많은 힘을 썼는지도 몰라요. 우리가 의식하는 일은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을 너무 해 버려서 피곤할 수도 있겠지요


게다가 그런 감정들과 관련된 것들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해요. 관련된 사람도, 관련된 말들도, 관련된 일도, 관련된 장소도, 관련된 영화도, 관련된 노래도, 심지어는 관련된 날씨까지도. 자신이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말입니다.


이렇게 이것저것 다 빼고 나면 정작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을 해 봐도 늘 공허하고 나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구요.


그러다 보면 왜 사는 지도 모르겠고, 산다는 게 그저 '덜 힘었을면 좋겠어'라는 상태가 되겠지요. 그나마 바램이라면 오늘은 사장이 좀 더 지랄댔으면 좋겠고, 내일 만날 친구들이 내 과거를 가지고 그만 장난쳤으면 좋겠고...


그도 아니면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을 느끼기 위해 없는 에너지까지 쥐어 짜내어 난리를 피우거나 하기 싫은 감정의 연극을 계속하며 살아야 할 거구요.



우리 자신의 감정이 두려워 떠오르지 않게 하고 느끼지 않게 하며 살다 보니, 그와 비슷한 감정을 가진 다른 사람도 잘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지 몰라요. 내가 만약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는 존재라면 다른 사람이 배고프다고 말을 해도 그게 무언지 잘 모를테니까요.


나 혼자만의 감정 때문에라도 충분히 외롭고 피곤한데, 다른 사람과의 교류나 교감도 잘 안 되니 더 외롭고 혼자인 느낌이지요. 연애나 결혼을 해도 그렇고, 자식을 낳아 키워도 그렇네요. 무언가 열심히 하는 데도 뭔가 잘 안 되고, 뭔가 허전하고, 상대는 늘 나에게 불만인 상태.



아쉽고 슬픈 일이지만 많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