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는 물류회사에 다니는 30대 여성입니다. 2년 전쯤 결혼을 해서 동갑내기 남편과 함께 살고 있구요. 두 사람은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연애를 했고 결혼까지 했습니다. 남편은 프로포즈를 하면서 나와 결혼해 주면 너를 평생토록 행복하게 해 줄게,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못하겠냐고 큰 소리를 쳤지요. 하지만...
같은 회사에 다니고 같이 일을 하면서도 남편은 집에 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움직이는 손가락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면 리모콘을 누를 때와 과자를 집어 먹을 때 정도지요.
빨래, 청소, 밥, 설거지 등 그 무엇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일 한 번 시키려면 온갖 잔소리를 해야 되고 신경전을 벌여야 돼서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포기하게 되더라구요.
결혼한 지 딱 6개월이 지나니까 ‘평생토록 행복하게 해 줄게라는 말에 속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집에 오면 그렇게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남편이 잠자리에 누우면 섹스는 왜 그렇게 하자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리모콘 움직일 힘 밖에 없어 보이던 사람이 남의 가슴을 왜 그렇게 세게 주무르는지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그냥 헤헤 웃기만 합니다. 어디 허리가 부러졌는지 청소기 한 번 돌리라고 해도 ‘아이고 아이고 힘들어’하던 사람이 섹스할 때 왜 그렇게 힘은 좋은지... 회사 일만으로도 피고하고 집 안 일 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는데 밤마다 섹스를 하자고 하는 남편 때문에 미치겠습니다.
그냥 적당히 하고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누워라 엎드려라 앉아라 일어서라 등등 무슨 놈의 요구사항은 그리도 많은지...아마 중학교 때부터 야동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봅니다.
그럴 힘 있으면 빨래라도 좀 하지
지난 밤 섹스의 불쾌하고 피곤한 기분을 안고 아침에는 된장국을 끓였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니가 아들이 된장국 좋아한다고 된장이며 직접 농사지은 호박이랑 무 등등의 야채까지 택배로 보내셨더라구요.
‘아~ 잘잤다’라고 기지개를 켜던 남편은 음식 만드는 소리를 듣는 둥 마든 둥 하면서 욕실로 들어갑니다. 청소라고는 한 번 하지 않던 남편이 제 몸 가꾸는 데는 참 열심입니다. 아침마다 무슨 샤워는 그렇게 오래 하는지...자기가 무슨 연예인쯤 되는 줄 아나 봅니다.
숟가락 하나 놓지 않는 남편이 당당하게 식탁에 앉습니다.
우와 된장찌개 냄새 좋은데~
A는 생각합니다.
아이고 이 인간아 나는 니가 싫어
A가 밥을 먹든 말든 남편은 쩝쩝 소리를 내며 열심히 밥을 먹습니다.
역시 우리 엄마는 솜씨가 좋단 말야. 우리 엄마표 된장찌개는 우주에서 제일 맛있~어! 여보, 다음 달에는 엄마한테 보약이라도 한 번 지어드릴까?
A는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합니다. 말을 섞자니 귀찮아서 그저 속으로만 말을 할 뿐이지요.
보약? 아이고 이 인간아. 마누라가 새벽부터 끓은 된장찌개를 먹으며 어머니만 챙기고...그렇게 엄마가 좋으면 엄마하고 살지 왜 나하고 사냐?
이런 A의 속도 모르고 남편은 신이 났습니다.
여보, 된장찌개 완전 맛있어. 당신도 좀 먹어봐.
숟가락으로 된장찌개를 가리키며 먹어보라고 합니다. 남편의 입에서 나온 밥풀이 둥둥 떠다니는 된장찌개.
먹지 않으면 왜 먹지 않느냐고 또 뭐라고 한 마디 할 것 같아서 밥풀이 없는 쪽으로 살짝 숟가락을 넣어 맛을 봤습니다.
저 인간은 그렇게 맛있다는 된장찌개에서 왜 이렇게 쓴맛이 나지? 찌개를 끓이면서 맛을 여러 번 봐서 그런가...
그런 아침을 보내고 둘은 출근을 합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루를 보내고 퇴근 시간이 다가 옵니다. 남편은 오늘 다른 업체 사람과 술 약속이 있다고 하네요. A는 잘 됐다 싶어서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B에게 카톡을 날렸습니다.
A : 저녁에 시간 있어? 같이 저녁 먹을까?
B : 콜~ 좋지.
A : 뭐 먹고 싶어? 너 먹고 싶은 거로 하자
B : 음...뭐가 좋을까? 넌 뭐 먹고 싶어?
A : 글쎄...아무 거나 좋아. 너 먹고 싶은 걸로 정해
B : 나도 아무 거나 좋은데...오랜만에 우리 된장찌개 먹을까?
A : 그래 좋아
A는 아침에 엄마표 된장찌개 사건도 있고 해서, 된장찌개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B가 먹고 싶다고 하니 그러자고 했습니다. B는 몇 안 되는 입사동기인 여자로, A와 B는 학교 다닐 때 짝꿍 같은 회사 단짝입니다.
B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여자도 결혼할지 안할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격은 솔직한 편이지만 말이 많지는 않습니다. A가 무슨 말을 하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 생각을 말하는 편이구요.
그런 B와 함께 있으면 A의 마음은 편안합니다. 회사 간부 때문에 열 받았던 일, 남자들의 찝쩍거림 때문에 짜증났던 일, 남편의 게으름 때문에 답답했던 일까지 모두 털어 놓습니다. 기분이 좀 좋은 날에는 어제 남편과 섹스를 할 때 어떤 자세로 했는지까지 이야기 하면서 깔깔대곤 합니다.
퇴근하고 회사 정문에서 만난 둘은 회사 근처에 있는 진주식당으로 갔습니다. 여러 회사들이 모여 있는 동네에 있는 식당이라서 그런 지 가격은 모든 찌개 5천원으로 다른 집에 비하면 싼 편입니다. B는 이 집 주인 언니가 사람이 좋아서 오게 된다고 합니다. 반찬 나오는 거 보면 좀 허술해 보이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사람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게 마음 편하다는 게 B의 생각입니다.
밥 먹고 나서 요 앞 커피집에 가서 커피를 한 잔 하기로 하고서는 된장찌개를 시켰습니다. A가 된장찌개를 한 번 끓이려면 최소 30~40분이 필요한 데, 그 집 언니는 무슨 재주가 있는지 주문을 하자마자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를 들고 나옵니다.
B : 역시 우리 언니 된장찌개가 짱이야
언니 : 빈말이라도 고맙다. 별로 들어간 것도 없는데 맛있게 먹어 주니 좋네. 그래도 너 왔다고 두부랑 버섯이랑 좀 더 넣었다. 알지? ^^
B : 아이고 우리 언니가 역시 최고야. 음식이라는 건 역시 손맛이고, 만드는 사람의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니까
언니 : 야, 내가 이거 만들면서 니 욕 했으면 어쩌려고?
B : 그러면 손맛이 아니라 욕맛으로 잘 먹겠습니다. 하하하
언니 : 하하하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A도 같이 하하 웃었습니다. B가 맛있게 된장찌개를 먹는 모습을 보니 A도 왠지 끌리는 마음이 들어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먹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소한 맛이 기분까지 좋게 합니다.
그러면서 문득 아침에 남편과 함께 먹었던 된장찌개가 떠올랐습니다. 음식 재료로 보면 아침에 먹었던 것이 훨씬 좋습니다. 호박, 무 등등의 야채는 물론이고 된장을 만드는 콩도 어머님이 직접 농사를 지은 겁니다. 그에 비해 진주식당의 된장은 시중에 파는 흔한 된장이고, 다른 재료라고는 넣은 게 별로 없어서 약간 멀건 국 같은 기분까지 듭니다.
그런 된장찌개를 B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게 먹습니다. A도 된장찌개를 떠서 밥 위에 올려 비벼 먹기까지 했습니다. 진주식당의 된장찌개가 어머님표 된장찌개의 짜증나는 기억까지 싹 잊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는 밥을 딱 세 숟가락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나왔는데, 저녁에는 밥 한 공기 다 먹었습니다. 트림까지 꺼억 소리 내며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을 가렸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재료로 보나 뭐로 보나 엄마표 된장찌개가 더 맛있어야 하는데... 멀건 된장국 같은, 조미료 냄새 살짝 나는 진주식당 된장찌개가 훨씬 더 맛있다니.
그러다 보니 문득 얼마 전에 남편과 외식을 하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스파게티 같은 거는 싫다고, 조선 사람이 한국 음식을 먹어야지 라며 짜증을 내는 남편을 억지로 끌고 갔지요. 결혼 전에는 A가 좋아한다고 자주 스파게티를 사 주곤 하던 남편이었지요. 자기는 스파게티도 좋지만 피자가 더 좋다고 맛있게 먹던 남편이었구요. 하지만 결혼 때문에 입맛이 바뀌었는지 신혼 여행 다녀온 이후로는 스파게티나 피자 먹으러 가자고 하면 소파에 그냥 들어 누워 버리네요.
그래 알겠어. 순대국 먹으러 갈까? 아니면 뼈다귀 해장국?
A가 그렇게 양보를 하면 남편은 헤헤 웃으며 신이 나서 츄리닝을 챙겨 입지요.
아무튼 그런 남편을 억지로 끌고 레스토랑에 가서 스파게티를 시켰습니다. 대단한 심통이 난 것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앉아 있는 남편을 애써 무시하면서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말아 입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던 스파게티였고, 이 가게가 동네에서 소문만 맛집인데...이게 느끼한 비빔 국수인지 스파게티인지 무슨 맛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맛있어야 하고, ‘역시 맛집은 달라’라고 소리를 지르며 인증샷도 찍고 페이스북에 올리고 해야 하는데...
지금 인증샷을 찍으면 왠지 씁쓸하고 쓸쓸하고 쌉쌀한 표정만 드러날 것 같네요. 스파게티 맛있는 집이, 스파게티 맛없는 집이 되어버릴 것 같구요.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진주식당을 나와 커피를 마시러 ‘꿈꾸는 커피’로 갔습니다. 된장찌개와 커피라. 어찌 보면 잘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어찌 보면 된장찌개의 구수한 맛과 커피의 쌉싸름한 맛이 잘 어울릴 것도 같습니다.
B :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 라떼?
A : 그냥 아메리카노 먹지 뭐.
주인 : 시럽 넣어 드릴까요?
A : 네...듬뿍 넣어 주세요.
B와 함께 있어 편안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남편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커피를 달달하게 먹으면 기분이 좀 좋아질 것 같습니다.
B는 카페라떼를, A는 달달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놓고 앉습니다.
B : 어제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갔었어
A : 뭐 봤는데?
B : 비긴 어게인
A : 어? 그거 나도 보고 싶었는데...어땠어?
B : 음악이 참 좋았어. 여자 주인공이 술집에서 기타 하나 들고 노래 부르는 모습이 어찌나 매력적이든지...나도 좀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마음 통하는 남자와 밤새 음악 얘기를 하면서 거리를 걷고도 싶고.
A : 그래 맞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밤바다를 거닐며 맥주도 한 잔하고...하늘에서는 플라이 미 투 더 문fly me to the moon 노래가 달빛을 따라 흐르고...바다소리 찰싹찰싹...
B : 어이~ 너 아직 안 죽었네. 아줌마가 되고 나서 그 빛나던 감성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 주말에 남편하고 비긴 이게인 보러가지 그래.
A : 남편? 비긴 어게인? (손을 B의 눈앞에 흔들며) 아이고 말도 꺼내지도 마라. 우리 남편은 아이언맨이나 어벤져스 같은 영화만 본다니까. 무슨 초딩도 아니고...
깊이 생각한 것도 아니고 남편을 굳이 욕하려던 것도 아닌데...갑자기 말이 나와 버렸네요. 괜히 남편 욕을 한 것 같아서 일단 말을 끊고 커피를 입에 가져갔습니다. 달달한 커피를 먹으면 기분이 좀 좋아지겠지 싶었지요. 그런데...
이게 에스프레소인지 설탕 시럽 듬뿍 넣은 아메리카노인지 모르겠네요.
오늘 따라 커피가 쓴 건지 내 입맛이 쓴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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