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짓고 답답해하며, 화내고 안타까워하며 읽었습니다.
여성의 삶을 더 많이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박완서 작가에게 크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날을 시작하는 청희와
청희의 삶을 닮은 여성들에게 응원의 마음 보냅니다.
자유롭기를
행복하기를
박완서, <살아있는 날의 시작>, 세계사, 2011
남의 인상에서 즉각적이고 단일한 해답 – 저 여자가 나보다 잘났나, 못났나? 젊었나 늙었나? 잘살까? 못살까? -을 얻어내고자 하는 사람 – 12
그 여자의 남편 정인철은 아내와의 약속시간 따위에 구애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남자답다는 걸 좋아했다. 거의 신봉하고 있었다. 그가 신봉하는 남자다움에는 아내와의 약속시간을 희미하게 기억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
그들 사이의 모든 소유관계가 명백하고도 당연하게 그의 것도 그의 것, 아내의 것도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아내의 시간 역시 그에게 속했다. 아내만의 시간이란 걸 그는 의식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 13
그 여자는 남편과의 약속시간을 위해 그 여자 나름으로는 상당히 중요한 일을 포기하고 달려온 길이었다. 느긋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분노마저 느꼈다. - 13
바람이나 맞는 아가씨를 경멸했다. 동정의 여지 없이 경멸했다. 그 여자에게 이제 기다리는 사람들과의 동류의식은 없었다. - 14
그 여자는 누구나 거침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성질이었지만 인철이한테만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 여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력한 노여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러나 꾹 참고 다소곳했다. 인철이 말없이 어깨만 한 번 으쓱대보였다. 훤칠한 키와 지적인 얼굴에 그런 이국적이면서도 남을 무시하는 것 같은 몸짓은 매우 잘 어울렸다. 그 여자는 한층 주눅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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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무시하는 듯한 태도와 그런 까다로움은 약속시간을 근 한 시간이나 어긴 주제에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지만. 아무리 부부사이라지만에서 그 여자는 단연 엄격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가 제 아무리 자기 앞을 스쳐간 누구나의 얼토당토않음도 놓치지 않고 바로잡아주었대도 인철의 얼토당토않음에 대해서만은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은 운명처럼 그 여자를 압도했다. 그 여자는 다시 절망적인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덮어놓고 사과해야 할 것처럼 느꼈다. 남편을 기다린답시고 기다림에만 전념하지 않고 딴생각하고 있었음에 대하여. 안달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을 실은 느긋이 즐겼음에 대하여. - 16
그러나 그 여자의 또 다른 앙큼한 마음은 그가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지만 자기 마음은 결코 상하지 않았노라고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렇게 그 여자의 마음은 꼬이고 또 꼬였다. - 16
그 여자는 슬그머니 아부하는 것처럼 인철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꼬인 마음을 풀고 편하고 싶었다. 든든한 등이었다...그 여자는 차차 온몸을 실리면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그 여자는 그런 자세로 문득 남편과 화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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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느닷없이 엄습한 불행감을 떨쳐버리듯이 더욱 열심히 남편의 허리를 죄었다. - 17
“교외로 나갑시다. 아무데나 너무 멀지 않은 교외로...”
인철은 아내에겐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운전사에게 모든 걸 일임했다.
“저녁 식사를 하시게요? 가만있자. 그러면 광나루 쪽도 괜찮고, 벽제 쪽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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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우리는 자러 가는 거니까 그냥 값싸고 조용한 여관으로 데려다주면 돼요”
인철이 무성의하게 말하고 흘끗 아내 쪽은 보더니 야비하게 웃었다. 그 여자는 모욕감으로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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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더라도 그걸 생판 모르는 남에게 들춰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왜 내가 미화시키고 싶어하는 걸수록 이 남자는 똥에다라도 비벼대려고 하는 걸까. - 17
“당신 화났어요?”
“아니, 아냐”
그는 두 번씩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아내 쪽을 보진 않았다. 외로 꼰 목의 힘줄이 발딱 날을 세우고 있는 걸로 그의 심기는 매우 언짢아 보였다. 그 여자는 아기 달래듯이 그의 손에다 입술을 비비고 나서 자기 손으로 단단하게 깍지끼었다. 몸짓으론 이런 위무행위를 하면서도 이게 다 누구 때문이기에 감히 그가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하는 반발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 20
그 여자 문청희의 하루는 시어머니인 송 부인을 씻기고 거두는 일로부터 시작됐다. 그 일은 여간 힘과 꾀와 기술을 요하는 일이 아니었다. 노망만 났다뿐 기운은 정정한 송부인은 자기를 씻길 깸새만 채면 벌써 숨바꼭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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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닦아주는 일은 더욱 큰일이다. 칫솔 치약은 질색이라 손가락에 소금 묻혀 남의 입속에 집어넣는 일도 과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닌데 성치 않은 치아를 잘못 건드리기라도 했다간 당장 손가락을 물어뜯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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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빗기는 동안 송 부인은 며느리한테 소곤소곤 하소연과 고자질을 벌갈아 했다.
“글세 순자년이 말이다. 고 여우 같은 계집애가 말이다...”
순자란 부엌일을 하는 먼 친척뻘 되는 아이다. 착하고 부지런한 소녀다. 그러나 송 부인의 곶자리대로라면 고기도 생선도 떡도 과일도 혼자만 먹고 노인네는 온종일 굶기는 여우같이 매정하고 돼지같이 욕심스러운 계집이다. - 21
그 여자는 자신에게 온몸으로 의탁하고 있는 천진무구한 늙음에 대해 한없이 경건하고 따뜻한 마음이 될 수가 있었다. 남들이 고생한다고 동정해 주는 일에 그 여자는 거짓없이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뜻밖의 일이었다. 자신의 정신의 영토 내에 그런 곳이 따로 마련돼 있는 줄은 그 여자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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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시집온 날부터 효부였기 때문에 효라는 것에 대해 뭘 좀 알고 있었다. 그건 지어먹은 마음이었고, 이건 우러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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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송 부인이 앞으로 오래 못 살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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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건 효가 아니라 연민이었다. 사람이 낳아서 먹고 자고 싸고, 생식하고 욕심부리고 늙고 망령부리고 소멸해 가는 기본적인 과정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연민이었다. - 24
부부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행위를 못 하게 된 것 그 자체가 그 여자에게 고통이 되진 않았다. 그 여자는 거의 중년이었고 집안팎의 일로 심신의 소모가 대단했다. 자주 위로받기를 갈망했지만 뜨거운 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에 의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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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은 아내가 그런 일을 조금도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는 걸로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밤마다 그들 부부 사이를 차단기처럼 갈라놓고 있는 게 자기의 어머니라는 사실마저 잊은 것처럼.
“무슨 놈의 여편네가 저렇게 목석 같담. 저런 목석 같은 여편네를 내가 여지껏 데리고 살았으니, 에잇 매력 없어”
이렇게 함부로 아내를 구박했다. - 27
그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만 아니라면 이혼을 할 수도 있을 것처럼 생각했다.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여자는 구원을 청하듯이 인철의 팔에 매달렸다. 인철의 입가에 경멸하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 웃음이 그 여자로 하여금 아무것도 상의하고 싶지 않게 했다. - 29
그는 점잖고 근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당신 집에 전화 좀 걸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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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걸어. 당신은 집안일이 궁금하지도 않아. 명구 과외 공부 가기 전에 저녁이라도 제대로 먹고 갔나 물어보고, 참 명선이 눈다리깨 나려고 트집잡던 거 마이신 먹고 가라앉았나도 궁금하군 그래. 그러저나 순자란 년 어머님 저녁 진지랑 잠자리랑 제대로 보살펴드렸나 모르겠네.”
인철이 마음으로부터 근심스러운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게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인철이 지금 방까지 가는 동안을 못 참을 만큼 급하게 알고 싶어하는 것들은 실상 그가 집에 있을 때 한 번도 관심을 가진 일이 없는 일들뿐이었다.
그도 웨이터를 의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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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간통이라도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웨이터에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는 정상적인 부부간처럼 보이고자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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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정인 노릇을 단념하고 집에 전화를 걸어 남편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해 골고루 안부했다. - 30
“당신은 그럼 우리 사이의 문제가 단지 어머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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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돌아가시면 당신과 헤어질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우리가 여지껏 어머님으로 하여 맺어졌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길, 당신 정 이러기야? 영감이 오래간만에 기분 좀 내려고 하는데...”
“마누라에게도 기분이라는 게 있다는 걸 한 번 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당신 삐딱하게 나오니까 매력 있는데. 좀더 약올려주고 싶을만큼, 정말이야. 홀딱 반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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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또 그런 방법으로 근본적인 문제를 피할 셈이군요” - 32
“당신은 지금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야. 그 원인은 당신의 성적인 불만 때문이야. 그게 우리의 문제의 전부야.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그 문제는 잠정적인 거지 영구적인 건 아냐”
인철은 마치 무슨 일만 났다 하면 한마디씩 하는 라디오나 텔레비전 교양프로의 단골손님처럼 간단명료하고도 무책임한 진단을 내리고 뽐내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여자는 말문이 막혔다. 수치심과 절망으로 경직된 몸을 똘똘 뭉치면서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인철의 손과 턱과 코끝과 입술이 함부로 그 여자의 옷깃을 파고 들어 집적댔다. 그러나 그 여자의 몸은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 32
그 여자가 되고 싶은 것과 인철이 그 여자에게서 바라고 있는 것이 엇갈렸다. 모든 것이 엇갈리게 되어 있을 뿐이라는 체념과 참으로 화합하고 싶은 열망이 엇갈렸다. 그 여자의 몸도 마음도 엇갈렸다.
그 여자가 아직도 경직된 채 똘똘 뭉친 몸에서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여자의 뺨은 얼룩져 있었다.
욕실에서 나와 그 여자 앞에 뽐내는 것처럼 버티고 선 인철의 알몸도 덜 닦은 물기로 얼룩져 있었다. 그 여자는 발딱 일어나 구럭 같은 큰 백에서 타월을 꺼내 인철의 몸의 물기를 닦아주었다. - 33
그 여자는 엇갈리고 있는 느낌을 속이고 화합을 꿈꾸었다. 화합에의 꿈이 너무 조급했으므로 그 여자는 정직하지 못했다. 그 여자는 눈치껏 격정적으로 인철의 몸을 받았다. - 33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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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이 킬킬대며 말했다. 대단한 자선이라도 베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의 인철의 태도는 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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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는 정말 기뻐한 것일까? 다만 기뻐한 체한 것일까? 나는 여태까지 행복하게 살았을까? 혹시 행복하게 사는 체한 데 지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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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나인가, 남이 어떻게 느끼고 남이 어떻게 생각하나에 비위맞추기 위한 나인가?
매력 있는 여자란 무얼까? 나는 왜 매력 없는 여자란 소리를 가장 두려워하는가? 나는 매력 있는 여자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변경시켜왔다. 앞으로 어디까지 자신을 변경시킬 수 있을까? 남편이 네 발로 기는 여자가 매력 있다고 하면 나는 발로 길 수도 있을까? - 34
남자들 사이에서 신봉되고 있는 여자의 육체에 숨겨진 마성(魔性)에 대한 수많은 미신에 대해 생각했따. 나의 몸속에도 그런 마성이 깃들여 있는 것일까?
그 여자는 소리없이 웃었다. 자신의 몸속에 그런 마성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몸이 마성의 허구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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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몸뚱이에서 여자다움이 시들면 그 허구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건 아닐 게다. 다음은 어머니라는 신성(神性)이 준비돼 있을 테니까. 여자의 마성에서 어머니의 신성 사이엔 아무런 경계선도 없나 보다. 누구나 쉽사리 옮겨가니까. 왜 남자도 여자 자신도 마성에만 관심이 있고, 그 이전에 인간성이란 걸 여자도 갖고 있다는 데는 관심을 두진 않는 걸까. - 35
“저 이번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헤어쇼를 가져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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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있네. 참 여러 가지 하시는군”
인철이 씹어뱉듯이 불쾌하게 말했다.
“당신 그런 식으로 말씀 안 하실 순 없어요?”
“당신이야말로 그런 식으로 날치지 않을 순 없을까”
“제발 다짜고짜 기죽일 생각부터 하지 말아요. 자세한 설명은 들어보지도 않고...”
“들어보나마나야. 당신 역시 내가 기죽인다고 기죽으 여자도 아니겠지만 말야. 도대체 언제까지 그놈의 기는 살아 있을 거야? 머리 깎고 중노릇을 해도 머리에 꽃 꽂고 할 그 빌어먹을 기말야? 에잇 창피해서...” - 37
한때 그 여자는 인철이와 함께 지방대학에서 강사로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대학에서 강의시간을 얻긴 인철 쪽이 훨씬 먼저였건만 전임이 되리란 소문이 떠돌긴 그 여자 쪽이 먼저였다.
그 소문이 믿을 만한 소문이고 아니고는 차치하고 그 소문 때문에 가장 마음이 상한 건 인철이었다. 길길이 뛰면서 그 소문의 출처를 대라고 그 여자를 못살게 굴었다.
자존심이 극도로 상한 남편은 아내를 마치 허위사실유포죄 다루듯이 심하게 다루었다. 결국 그 여자는 그런 심적 고문을 견디다 못 해 그 자리를 내놓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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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들의 형편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부부 중 누구라도 하루빨리 전임이 되어 고정수입이 생긴다는 건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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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필 아내 쪽이 먼저 그 물망에 올랐으므로 그건 화근이 되었고 그들은 두 다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화근이란 일찌거니 뿌리뽑는 게 수라는 걸 알고 있었다. - 37
그 후 그 여자는 될 수 있는 대로 남편이 하는 일과는 반대방향 쪽으로만 돌면서 돈벌이할 만한 것을 찾아야 했고 그게 뜻대로 안 될 때마다 코앞까지 가서 놓치고 만 전임자리를 아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었다. - 37
문득 생각했다. 아직도 나는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다본 남편은 섬뜩하도록 낯설었다. 그 여자는 그런 느낌이 생소하고 싫은 나머지 어떡하든 남편에게 발붙여야 할 것처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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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당신이 그렇게 싫어하시면 그까짓 거 안 할 수도 있어요. 실상 그런 일이란 돈만 많이 들고 그렇다고 나중에 뺄 가능성이 있는 투자도 아닌 그냥 낭비의 방편 같은 거니까요. 힘만 들고요. 지금의 우리 형편으로 무조한 짓인지도 모르죠. 어머님 병환도 그러시고 학원이라고 인수한 지도 얼마 안 되니 아직 손 가고 돈 들고 신경 쓰일 일 천지고...”
그 여자는 인철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차근차근 말했다. - 38
“제발 그 날친다는 표현 좀 안 쓸 수 없어요?”
“그럼 뭐라고 말해 줄까? 여자들이 기운이 넘쳐서 아무데나 발산을 하지 못해 하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한심한 작태를...”
인철이 한층 난폭한 표현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화내지 않았다. - 38
제법 물이 분 개천 건너로 4.19묘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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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화강암으로 된 벽면에 부조된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신기한 감동에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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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곧고 긴 머리가 비를 머금고 무겁게 늘어졌다. 그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석벽 뒤로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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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청승이야?”
우산 속에서 인철이가 소리질렀따. 그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4.19때 애인이라도 잃었어?”
“당신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우린 피차 4.19세대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뭐. 바른 대로 대. 그렇게 엄숙하게 누굴 애도하는 거야?”
“그냥...4.19를요, 그 전체를요”
“여자가 가당치도 않아. 매력 없어. 차라리 애인을 애도하면 귀엽기나 하지”
인철이 우산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 41
단골손님은 일부러 버스 타고 찾아오는 살림집에서 미장원 할 때부터의 순정파 단골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는 신흥주택가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터무니없이 고상하고 터무니없이 후하고 거의 결사적으로 아름다워지고자 했기 때문에 미용실은 성업중이었다. - 43
“여러 가지 하시는군. 제발 날치지 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비웃던 인철의 목소리는 아직도 그 여자의 귓전에 생생했다. 그 후 문득문득 그 여자는 그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을 맛보았다. 그의 마음을 거슬르고 그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를 잃는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 46
“정말 십 년은 젊어지신 거 같네요”
청희는 울적했으므로 입에서 신물이 나게 써먹은 상투적인 아부의 말밖에 생각해 내지 못한다.
...
“조글조글하다니요, 당치도 않아요. 고우시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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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실은 내 얼굴 이거 땡긴 거라고...”
“그러세요? 몰라봤어요”
청희는 놀라움을 의식적으로 과장하면서 말했다. - 48
“고삼 치르기가 그렇게 어렵나요?”
“참 마담은 이제 맏이니까 뭘 모르는구료. 그리고 이렇게 나와 있으니까 더 뭘 모를 수밖에...”
...
“공부는 잘해요. 과외도 시키고 있고요”
“얼마짜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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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뭘 모르는 건...내가 삼류라면 삼륜 줄 알고 있어요. 과외 삼류시키면 대학도 삼류 보낼 각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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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예쁘게만 해줘봐요. 그 방면엔 내가 도사겠다. 얼마든지 길도 터주고 정보 제공도 해줄 테니까” - 51
단골손님과의 수다여서 이런 유의 아부는 마치 음식의 고명 같아서 너무 헤퍼도 안 되지만 너무 인색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청희는 부인의 입가가 헤벌어지는 걸 보면서 그런 일에 능숙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 50
“...참 학교나 자주 나가봐요?”
“아뇨. 우리 애 학교는 소집일도 없던데...”
“이런 딱한 양반. 이래서 직업 가진 엄마 애들 중 문제아가 많다고 하나보지” - 52
“글쎄 얘 혼자 벌어서 오빠 하나 남동생 둘을 공부시킨다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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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부치는 고된 밀만 있고 사랑 없음은 어차피 콩쥐의 운명이었다. 다만 현대판 콩쥐에겐 기적이 안 일어난다뿐이었다. 현대판 콩쥐에겐 인자한 황소친구도 의뭉스러운 두꺼비친구도 명랑한 참새친구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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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는 과로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신은 같은 걸 할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스스로의 과로에 굴종하고 있었다. - 54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 모여도 엄마 아버지를 화제로 삼는 일이란 거의 없지만 한번 화제로 삼았다 하면 사정이 없죠. 부모를 미워하고 있다는 말을 처음 꺼내기가 힘들지 누가 먼저 꺼내기만 하면 그것처럼 공감을 쉬 얻는 화제도 없어요. 미워하는 게 아니라 저주까지 하죠. 자못 열렬하게...” - 62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아들을 문득 생판 타인처럼 느끼며 정중하게 말했다. 낳고 기른 건 아들의 덩치일 뿐 덩치 속에 들어 있는 정신세계에 대해 영향을 끼친 바도, 앞으로 끼칠 가망도 없을 것 같은 고약한 무력감 때문에 그 여자는 점점 더 착잡해졌다. - 63
그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들의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져 종주먹 대고, 욕을 퍼부었다. 이런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는 명구의 얼굴에 혐오감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그 여자는 사정없이 갈팡질팡하고 애걸복걸하고 뉘우치고 부끄러워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추태를 부리고 있다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 그걸 피하지 못했다. - 66
“엄마, 학교친구도 그렇고 과외친구도 그렇고 불량한 애와 순진한 애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들을 제각기 다 다를 뿐이에요.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우리는 다 달라요...” - 67
그 여자는 그런 아들의 뒷모습에서 교복 소매가 한 뼘이나 뜯어진 걸 발견했다. 저런...그 여자는 미소지었다. 쉽게 할 수 있는 엄마 노릇이 남아 있다는 데 그 여자는 천진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그 밖의 엄마 노릇은 너무 어려웠다. 자신이 없고 난감했다. - 67
식구들은 누구나 그 여자의 손이 그만큼은 간 식사를 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소홀히 한 음식을 단박 알아맞혔다. 식구를 위해 끼니 때마다 그 정도의 일을 한 건 그 여자의 여무였고 기쁨이었다. - 74
그러나 명구방에서 나온 그 여자는 자기를 위해 정확하게 남겨진 그 정도의 일 앞에서 잠깐 어쩔 줄을 몰랐고 곧 짜증을 느꼈다.
...
자기의 이런 주부노릇의 무의미성에 간간이 몸서리를 치면서
깔끔하고 먹음직스러운 저녁상이 차려지고 식구들이 모였다. 그 여자가 가장 사랑하는 일가단란의 시간이었다.
...
그러나 그 여자는 지금 소리없이 절규하고 있었다.
아아, 이 화기애애야 말로 믿을 게 못 돼. -74
그 여자는 송 부인에게 바싹 다가앉아 생선가리를 가려냈지만 송 부인의 왕성한 식욕을 따르지 못해 자신의 식사는 숫제 뒤로 미루고 있었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식후에 마시는 한 잔의 차까지도. - 75
요즈음 들어 바싹 공부보다는 매명(賣名) 쪽에 기울고 있는 데 대해 말해 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게 얼마나 인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위험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고만 있는 중이었다.
인철은 지금 그 일에 한창 신나게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오냐 오냐 그저 받들기만 해서 키운 아들답게 인철은 그가 몰두하고 있는 일을 비판받았을 때 그걸 귀담아들을 성품이 아니었다. - 76
“이런 무식하게 말귀 못 알아듣긴...동네에 미군부대가 들어섰었거든. 양놈들이 풍기는 것 중에서 제일 먼저 우리에게 옮아붙은 건 성적인 거였으니까. 지독하게 가난한 시대였지. 가난하면 뻗을 데가 성적인 돌파구 밖에 없거든” - 77
그 여자는 잠든 인철을 보면서 생각했다. 완전한 결합은 없는 것일까 하고. 그 여자는 거침없이 그걸 갈망했다. 인철이 그 여자의 갈망을 눈치챈다고 해도 결과는 뻔했다. 경멸하는 것처럼 능글맞게 웃으면서 흥, 또 때가 됐군, 당신은 색골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치 커다란 자비나 베풀 듯이 집밖의 잠을 베풀 것이다. 남자란 여자의 갈망과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일까 – 78
그런 느낌은 필연적으로 그 여자가 신앙처럼 떠받들고 헌신하던 가정의 화합이란 게 실은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
그 여자가 이십 년 가까이 공들여 쌓아올린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관록 붙은 안정과 행복이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건 결코 반석 같은 게 아니었다. 마치 세공품처럼 위태롭고 섬약한 걸 억지로 엉구어 그 모습을 지탱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78
그 여자가 시집올 때 송 부인은 오십대의 건강하고 당당한 부인이었다.
...
그 갑주 속의 여자의 제일성을 그 여자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잘나고 공부 많이 했어도 여자는 여자니라”
그 여자는 그 제일성으로부터 모든 걸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때까지 그 여자가 알고 있던 건 모조리 틀린 거고 다만 송부인이 알고 있는 것만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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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짠지나 오이지를 담그는 데도 송 부인만이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여자가 설사 더 맛있는 걸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차선이었다. 그 여자 위엔 항상 최선이 군림하고 있었다.
왜 그것만이 최선인가라는 물음은 용납되지 않았다. - 79
그런 송 부인을 인철은 또 얼마나 잘 거들었던가. “매력 없어” 이런 뼈아픈 말로 미처 송 부인에 의해 마멸되지 않은 그 여자의 본디 모습을 다스렸었다. “여자는 여자니라”와 “매력 없어”는 전혀 딴사람의 목소리면서 일맥상통하는 공모자의 목소리가 되어 그 여자를 주눅들게 했었다.
그 여자도 차차 그들 모자가 손발이 잘맞는 공모자가 되어 내쫓으려는 자기 속에 있는 자기 나름의 것을 마치 못된 악령처럼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푸닥거리꾼한테 맡겨진 병자처럼 스스로를 억제하기에 전념을 다했다.
...
그 여자는 느닷없이 어둠을 향해 힘껏 솟구치면서 소리없이 절규했다. 돌아오라. 돌아와. 그때 내쫓겼던 나의 참모습은 지금 어디 있는가. 제발 돌아오렴. 제발 – 81
청희는 방 여사와 닮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말 자매처럼. 내친김에 어떡허든 엄마노릇을, 그 거룩한 의무를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거룩한 걸 의심없이 다만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86
그런 콩쥐에게 매달려 편히 공부를 한다는 무자비한 콩쥐의 오라비들을 생각했다. 그런 콩쥐가 번 돈을 이 집에다 갖다 바치지 못해 애걸복걸하고 있는 자기는 그 무자비한 오라비들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다르지, 암 다르고말고. 이건 엄마노릇이니까, 엄마노릇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거니까. 그 여자는 망설임 쪽으로 기울려는 마음을 이렇게 부추겼다. - 91
그 여자는 엄마노릇이라는 것에 거의 미신적인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번 이 엄마노릇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앞으로 닥쳐올 어떤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린 것처럼 혼자서 정하고 있었다. - 94
청희는 거기서부터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엄마노릇이란 주문도 잘 듣지 않았다. 한껏 부풀어서 흐느적대면서 넘쳐흐르는 이상한 시대의 이상한 엄마노릇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 그것이 결코 그 여자 속에서 우러난 엄마노릇은 아니었다. - 97
엄마노릇의 참다운 것, 거룩한 것은 모조리 퇴화하고 추악한 흔적만 남은 시점에 그 여자 시대의 엄마노릇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참담한 불행감과, 그 여자가 서 있는 지점의 황량함은 참으로 잘 어울렸다. - 100
제 방 책상 앞에 앉아서 졸다가 깨어났다가 하는 꼴은 빈둥대는 것처럼 시답잖게 보여 그 여자는 못마땅하고 불안했다. 명구는 빈둥댄다는 말을 제일 싫어해서 불끈 화를 냈고, 자연히 모자간에 충돌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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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이한테 상의해봤댔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런 일은 여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그 여자는 남자 여자가 할 일을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어하는 남편이 어째서 돈버는 일의 구분만은 흐리멍덩한가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습관화된 이런 흐리멍덩함을 새삼스럽게 따진다는 건 한 가정의 안정기반을 해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때문에 그 여자는 꾹 참았다. - 101
방 여사 이상가는 위대한 엄마들과 새롭게 사귀고 흉내내는 일이 시작되는 게 겁났다. 그 여자는 흉내내지 않는 우러나는 자기 나름의 엄마노릇을 꿈꾸었다. 아기를 누이거나 안고 볼 비비고, 젖 먹이고, 눈 맞추고, 냄새맡고 흥얼거릴 적 같은 - 108
그 여자는 그런 수모를 겪으면서까지 그 멤버가 돼야 하나를 문득문득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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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희는 그 엄마하고 통화만 하고 나면 이만하면 남부러울 게 없이 살 만하다고 자족하던 생활이 별안간 누추하게 빛바래 보이는 데 깜짝 놀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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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희는 그걸 반가워하기에 앞서 우선 첫 모임에 나갈 때의 몸차림 걱정부터 됐다...그 여자는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는 최고의 것으로 입고 달았는데도 헐벗은 것처럼 주눅이 들었다. - 110
엄마들은 제각기 선생님의 지난날의 백발백중의 솜씨를 찬미하고 앞으로 선생님만 믿고 있겠다는 신앙을 다짐했다. 그리고 행여 선생님이 자기 자식만은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앞을 다투어 우리 철이는...우리 혁이는...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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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각성처럼 이제 더 이상 자기의 엄마노릇을 남의 장단에 춤추게 할 순 없다는 걸 알았다. 베레모한테 명구를 맡기고 명구를 번호로 부르게 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깨닫자 그 여자는 소리없이 그러나 감연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113
청희는 벌써 여러 번째 옥희네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까짓 몹쓸 계집애 내버려두라고 다들 말했다. 그러나 결핵환자의 미열처럼 오후만 되면 옥희에 대한 별로 열렬하지도 않으면서 집요한 열성이 그 여자를 들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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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는 지금 곤경에 처해 있었다. 콩쥐의 곤경엔 기적적인 구원의 손길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현대는 기적이 없는 시대이므로 그 여자는 스스로가 현실적인 구원이고자 했다. - 115
한길에서 동네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는 전자오락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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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들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간헐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은화는 그 누나에게서 얻어 가진 것이리라. 그러니까 지금 그 기계가 넙죽넙죽 삼키고 있는 은화는 돈이 아니라 콩쥐의 자부심이었다. 천대를 받든 뼛골이 빠지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오라비들을 공부시키고 있다는 콩쥐의 거룩한 자부심은 그렇게 소모되고 있었다. - 118
“설마 네 혼자 힘으로 대학생 고등학생 재수생 뒷바라지를 다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여자는 텔레비전을 빼놓고는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게 뒤죽박죽돼 있는 두 평 정도의 안방 속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엄마도 벌고, 셋돈도 들어와요” - 122
이때 콩쥐의 오라비들이 들어왔다. 세 사람이 같이였다. 마치 화적떼가 달려드는 것처럼 시끄럽고, 거칠고 안하무인이었다.
그들에게선 차가운 바람과 소주 냄새가 함께 풍겼고, 각자 하나씩 들고 있는 작은 봉지에서 뭔가를 입으로 빠르게 집어넣으며 우지직우지직 왕성하게 씹고 있었다. - 125
“정말은요, 아주머니 저도 아주머니네서 일하는 게 좋아요. 그렇지만 눈물을 머금고 떠날 수밖에 없는 걸요. 전 꼭 먹고 자고 있을데가 필요하거든요”
“먹고 자고 있을 데? 왜 진작 나한테 그 말을 안 했니?”
콩쥐가 그 오라비들로부터 벗어나 따로 먹고 잘 곳을 구하고 있다는 실은 그 여자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정체 모를 잡동사니가 첩첩한 두 평 미만의 방에 폭력에의 충동이 수시로 용솟음치는 건장한 세 명의 남자와, 족발과 빈대떡 냄새에 전 늙은 여자만 있으면 족하지 거기다 콩쥐까지 함께 몰아넣어야 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지옥의 풍경처럼 눈살이 찌푸려졌다. - 126
“그럼 넌 뭘 상관하니? 도대체 뭐가 네 마음을 우리집으로 내키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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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댁은...”
콩쥐가 말끝을 흐리며 몸을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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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댁은 참 행복한 가정이라면서요?”
“그래?”
그 여자는 행복한 가정이란 말에 심한 위화감을 느꼈으나 내색하지 않고 쿨록쿨록 기침하듯이 메마르게 웃었다.
“그래서?”
“그런 가정집에서 살아보고 싶어서요. 우리집도 싫지만 미장원에서 먹고 자는 일도 이제 지긋지긋해요”
콩쥐가 문득 기나긴 생애를 회상하는 늙은 여자처럼 쓸쓸하게 말했다. - 132
“아저씨가 대학교수시라면서요?”
콩쥐의 입가에 천진한 미소가 감돌면서 눈에 동경이 서렸다.
...
“그래 대학교수시란다. 그게 그렇게 신기하니?”
“그런 점잖은 집에서 밥 얻어먹고 잠 잘 자고 고운 말 쓰면 누가 알아요? 저 같은 것도 좀 고상해질지. 딴마음은 없어요. 그뿐이지” - 134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스스로 송 부인의 아침단장을 콩쥐가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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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그 일로부터 놓여난 게 당장은 혹이라도 떼어낸 것처럼 시원했으나 혹 떼어낸 자리는 날일 갈수록 허전해서 자신이 어딘지 균형을 잃을 것처럼 느끼곤 했다. - 136
인철의 연구실은 전망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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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진 못했지만 북구라파 쪽의 근사한 대학촌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착각으로 남보다 오래 걸려 얻어가진 전임자리가 겨우 지방대학이라는 열등감을 무마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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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방을 일부러 찾아오는 친구는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밖에서 만나는 친구한테나마 허풍스럽게 그의 방의 전망을 예찬했다.
“좌우지간 공기 좋고 경치 좋고...여북해야 내가 내 방 전망에 반해서 그 시시한 대학을 못 떠난다니까”
그러나 그의 경치예찬은 결코 순수한 게 아니었다. 그는 어떡허든 자기가 방이 따로 있는 신분이 됐다는 걸 널리널리 풍기고 싶은 거였다. - 137
그의 방의 전망을 마음으로부터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출세의 본고장에서 따돌림받았다는 걸 그에게 뼈아프게 일깨워주는 유배지의 풍경일 뿐이었다. - 139
텔레비전 프로에 같이 출연하기로 정해지고부터 그는 자기와 홍 박사를 각각 조금씩 에누리하기 시작했다. 상대방을 야금야금 깎아내리면서 자기에게는 듬뿍듬뿍 덤을 얹어주는 일의 재미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마약처럼 황홀했다. 이렇게 해서 순식간에 그는 홍 박사와 동등해질 수가 있었다.
동등해지자마자 그는 질투를 느꼈다. 질투는 심각하고 쓰라렸다. 질투 끝엔 그렇게 갈망하던 전임자리가 누더기처럼 창피할 수도 있었다.
그는 자기의 늦은 출세가 억울할수록 남의 빠른 출세에서 옳지 못한 비결 – 천사의 손기를 알아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는 홍박사가 빨리 출세한 비결이 매스컴 타는 솜씨인지도 모른다고 성급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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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지...그렇게 생각해도 인철의 마음은 조금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 141
아내하고는 둘이 다 시간강사 시절에 결혼했다. 결혼하고서도 아내는 그 일을 계속하더니 감히 남편을 앞질러 먼저 전임 물망에 올랐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그는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그의 어머니 송 부인까지 나서서 그것은 아내의 도에 크게 어긋나는 집안망신이라고 설득한 게 먹혀들지 않았더라면 그 일은 아마 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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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가 마치 아내의 유능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제력과 출세에의 의욕을 상실하고 무능력자가 돼버린 것처럼 느꼈다. 모든 게 아내 탓이었다. 빌어먹을...그는 아내와 이 세상의 모든 유능한 여자에게 이를 갈았다.
거기까지면 그래도 또 참아줄 여지가 있겠는데 아내는 그가 천신만고 전임자리를 얻어가졌을 때 원장님이 돼 있었다. 비록 이용학원 원장일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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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는 아내가 원장이란 호칭으로 그의 너무도 때늦은 전임자리를 모욕하려 한다고 생각했었다. - 143
여자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돈벌이하는 것까지는 봐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여자에게 순수한 사업욕이 있다는 거야말로 그가 참으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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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집안일 외에 일을 가지면 집안일은 엉망이 되어야 옳았다. 그건 곧 여자는 집안일 외에 일을 가질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되니까. 아내가 그렇지 않다는 걸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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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인철이 특별히 이성이 마비된 이상성격자는 아니었다....평범한 대인관계를 가진 온화한 사람이었다. 참다 참다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를 잘 참고 사는 평범하디 평범한 상식적인 남자였다.
그러나 상대가 여자일 때 한해서 그는 얼마든지 상식적이 아닐 수도 있어진다. 하물며 상대가 아내에 있어서랴. - 143
여자를 상대할 때 한해서 무경우해도 된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 거의 천성같이 보였지만 실은 용의주도하게 길들여진 거였다. 너무 어려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에 본인도 천성처럼 천부의 권력처럼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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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한테 얻어맞았다는 걸 알자 인철이 깜짝 놀라도록 송 부인은 노발대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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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 충격이 힘이 되어 그는 그 계집애를 갑절, 세 갑절이나 패줄 수가 있었고 송 부인은 그제서야 인철을 개선장군처럼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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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에게 누이동생이 태어나자 이런 폭군노릇은 더욱 틀이 잡혔다. 그는 누이동생을 때릴 수 있었고, 명령할 수 있었고, 빼앗을 수 있었고, 먼저 먹을 수 있었다. 물론 마음내킬 때 놀아주거나 귀여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보다 만은 가해와 유린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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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부인은 여러 남매를 두었고 그들이 자라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는 걸 제일 좋아했지만 딸이 아들보다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우울해 했다...그런 분위기에서 인철은 저절로 사내는 우월하고 계집애는 열등하다는 걸 배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통용되는 옳고 그름과 남자와 여자 사이에 통용되는 옳고 그름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는 무조건 남자 쪽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 144
인철에게도 사춘기는 있었다. 그러나 못되게 굴고 무시하는 걸로만 돼 있던 대상에 대한 느닷없는 그리움은 그를 혼란과 수치감에 빠뜨렸다. 그는 자기 속에서 저절로 싹튼 그리움을 그리움이라고 인정하기조차 싫었기 때문에 그건 어느새 두려움이 되고 있었다. - 146
딸은 근심덩어리였으므로 죄가 많아야 딸을 낳는다는 게 송 부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딸을 날고기로, 세상사내들을 굶주린 이리떼로 비유해 가며 딸에게 피해의식을 끊임없이 불어넣는 걸로 딸 단속에 만전을 기하려고 했다. - 147
송 부인은 딸이 피해자가 될까봐만 걱정했지, 아들이 가해자가 될까봐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걱정은커녕 은근히 그걸 기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쯧쯧 사내녀석이 저렇게 골샌님이어서 뭣에 쓸꼬”
이런 말 속에도 그런 기대는 충분히 포함돼 있었다. 송 부인의 태도는 인철에게 남자는 가해자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고도 남았다. - 147
인철과 청희는 사랑에 빠졌다. 가해자일 필요도 피해자일 필요도 없었다. 화합에의 예감으로 그들은 행복했다. 그리고 곧 결혼했다. 그러나 예감은 예감으로 끝났다.
쏘곤쏘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인철의 귓전에서 송 부인은 속삭였다.
계집한테 쥐어지낼라, 쏘곤쏘곤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하느니라 쏘곤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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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범아 계집을 그렇게 길들여 어쩔 셈이야. 쏘곤쏘곤...이건 숫제 세뇌였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일대일의 화합의 방법은 없다는 - 148
홍 박사, 네가 나보다 출세를 빨리한 건 네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야. 다만 네가 나보다 처덕을 더 입고 있기 때문이야. 단지 그뿐이야. 나는 그걸 알고 있어, 나를 속일 생각일랑 말아. 이렇게 거듭 다짐함으로써 홍 박사를 만나러 가기 직전의 흥분과 열등감을 달래려 들었다. - 152
그의 아내는 그가 가져다주는 월급봉투가 많든 적든 불평이 없었다.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도 몰랐다. 따라서 소위 바가지라는 걸 안 긁었다. 모자라는 걸 보탤 힘이 있으니까 그럴 테지만 남편의 입장에서 그건 모욕이었다. 남편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의사표시라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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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돈 때문에 바가지 긁을 때 큰소리치면서 내줄 돈이 있고, 그럴 마음도 굴뚝 같건만 아내는 한 번도 그래주지 않았다....괘씸했다. 모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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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라는 바가지란 그의 자존심이 아픈 데는 되도록 덜 건드리고 가려운 데만 살살 긁어주는 무척이나 까다롭고 기술적인 거였다. - 153
그는 이미 점잔 빼고 유식한 체하기 위한 가장 그럴듯한 몇 가지 표정을 거울 앞에서 지어보고 있었다.
지성, 인격, 관록...그런 게 적절하게 조화된 듯싶은 표정을 몇 번 반복 연습했다. - 156
“자네 촌사람 다됐군 그래. 이놈의 도시는 자기 차 부릴 데가 못돼”
홍 박사가 무시하는 것처럼, 비꼬는 것처럼 쌀쌀하게 말했다. 그 한마디는 인철의 싸고 싼 약점의 정곡을 찔렀다. 단둘이만 있는 것도 아닌 초면의 여러 사람 앞에서 그럴 게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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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분하고 억울했다. 그는 속으로 열심히 앙심을 품었다.
그러나 그 자리의 아무도 그가 그 말로 그렇게 깊이 마음 상한 걸 짐작도 못 했다. - 157
“혹시 시청하신 선생님은 아시겠지만 매주 토요일 저녁 여섯 시에 방영되는 ‘우리들의 문제’라는 프로는 시청률도 높고 교양프로입니다. 저희 방송국의 명예를 걸고 제작하는 프로에 이렇게 고명하신 어른들을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래? 그런 프로가 다 있었던가? 자네한테는 여간 미안한 얘기네만 텔레비전 프로라면 난 아주 깜깜이야. 다 그렇고 그러려니 싶어 숫제 안 보는 지가 하도 오래 돼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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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니랍니까? 저희는 수상기를 아주 벽장 속에다 쳐박아버렸어요. 해도 너무한다 싶게 저질로만 치달으니까 시청자로서야 그 정도의 자구책이라도 써야지 어쩝니까? 정말로 한심해요. 한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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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에 출연하려고 나온 저명인사들이 이렇게 점잖게 텔레비전 무용론을 펴는 동안 피디의 얼굴엔 사람 우습게 보는 데 이골이 난 직접적인 권태가 거침없이 드러났다. - 158
“산업사회 속에서의 가정이라면 바로 자네 전공분야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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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이까짓 데서 몇 마디 지껄이는 데 전공이고 뭐고가 어디 있나?”
인철은 겸손한답시고 불쑥 한 소리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빛나간 것 같아 말끝을 흐리면서 피디의 눈치를 살폈다.
.....
“내 생각엔 자네 그러는 게 아니었어. 전공을 도중에서 사회적인 수요의 눈치봐가며 바꾸는 법이 어디 있나? 기술이면 또 모를까 학문을...보게 결과적으로 얼마나 손핸가. 당초의 전공을 끝까지 밀고 갔더라면 자네 지금 그 시골구석에서 겨우 전임자리 밖에 못 올랐을 리야 없지 않은가?”
홍 박사가 거침없이 그를 비난했다. 인철은 당하고만 있었다....그는 겉으로 창백해지고 속으론 참담하게 비틀렸다. - 159
피디는 그를 그들이 출연한 프로의 사회자라고 소개했다.
...
그러나 모든 출연자들은 텔레비전을 안 본다고 할 때와는 딴판으로 각자 한마디씩 그의 해박하고 재치 있는 명사회 솜씨에 대해 알은체도 하고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홍 박사는 따로 악수까지 청하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따.
“나 선생의 열렬한 팬이오” - 160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런 일에 이골이 난 사람들처럼 적당히 권태롭고 적당히 무관심해 보였다. 그러나 닥치며 아는 것보다는 많이 지껄일 자신만은 막상막하로 누구나 다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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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은 하고많은 외국 중 가장 흔한 미국밖에 못 갔다왔기 때문에 미국 노인 얘기를 할 기회를 딴사람한테 빼앗길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장황한 프랑스 노인 얘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일단 노인 얘기의 바통을 이어받자 인철은 누구보다도 유창하게 미국 노인의 외로움에 대해 얘기할 수가 있었다. 말에 굶주린 노인의 말동무가 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그런 적이 없었다...그는 직접 자기가 그 일을 한 것처럼 말하면서도 거짓말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조금도 안 했다. 그는 다만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 161
텅 빈 속에서도 가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홍 박사한테 뒤졌다는 느낌, 졌다는 생각, 당했다는 모욕감은 그의 마음속에서 가시가 되어 그를 성가시게 했다.
가시 같은 건 품기가 잘못이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가시였다. 품은 당사자를 수시로 괴롭힐 뿐, 다른 아무에게도 고통이나 아픔을 주지 못하는 게 가시였다.
...
인철은 이미 홍 박사를 상대하고 있지 않았다. 도시에 범람하고 있는 모든 사내들이 자기보다는 나아 보였다. 그는 모든 사내들에게 지고 있었다. - 166
그의 패배감은 결국은 핑계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앙갚음을 꿈꾸고 있었다. 핑계도 앙갚음도 함께 아내에게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도 못 이겼다고 생각할수록 그래도 가장 만만한 게 아내였다.
그는 아내에게 이길 각오로 씩씩하고 거칠어졌다. 아내의 보이지 않는 콧대를 와지끈 소리가 나게 부러뜨려놓고야 말겠다는 난폭한 충동이 그를 뒤흔들었다. 그는 비틀댔다. 동네 어귀 족발집에서 소주로 이차까지 치렀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기고만장해서 대문을 걷어찼다. - 167
인철이 술이 깨면서 임종이 가까운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연장할 수 있는 데까지 그 일을 연장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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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연기하고 싶은 건 어머니의 임종이 아니라 그가 맏상주노릇을 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의 형식적인 번거로움을 당해 보기도 전에 겁내고 있었다. - 169
그는 버럭 화를 냈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 독한 사람이군.어머니가 저 지경이 되실 때까지 뭘하고 있었느냐 말야...나 하나 망신이며 참는다구, 참아. 그렇지만 저 지경이 된 어머니를 내팽개쳐놓고 나갓따는 건 나 정말 용서 못한다구. 어머니에게 만약 무슨 일만 있어와? 우리 끝장이야. 각오하고 있어” - 170
인철은 아침저녁 두 번씩만 송 부인을 건성으로 문병했다. 그때마다 송 부인의 변함없는 용태는 그를 크게 실망시켰고 그런 실망은 아무리 정직하게 표현해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가 봐도 어머니의 더딘 쾌유를 안타까워하는 지극한 효성을 비쳤기 때문이다.
빠른 쾌유보다는 차라리 빠른 악화를 기대하면서 병상을 찾는지도 모른다는 건 어디까지나 그 혼자만의 음모였다. - 173
“...아버지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참 근사하던데요. 말도 참 잘하세요”
“난 또 뭐라고, 그게 참 오늘이던가. 난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주머니도 보셨냐?”
깜박 잊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며칠 전서부터 아내에게 귀뜸해 놓고 있었고 오늘도 실은 그 시간을 피해서 일부러 늦은 거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아내의 평가가 궁금했지만 아내가 평가하는 자리에 같이 있기는 거북살스러웠던 것이다. - 174
“아뇨. 그렇지만 돼먹지 않은 말을 마구 지껄이는 사람들을 아무리 모욕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그 여자는 아직도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가는 참담하게 주름져 있었고 수면 부족으로 핏발선 눈엔 만만찮은 고집 같은 게 번득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여자는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생기 있어 보였다.
...
“...당신은 미국에 이년밖에 있지 않았어요. 이십 년을 살아도 말이 다른 이방의 속사정을 알기가 힘들텐데 그 짧은 동안에 그쪽 노인이 우리 노인보다 불행하다는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아셨어요? 그렇게 자신 있게 단정을 내리고 장담을 할 만큼. 암만해도 우스워요. 한집에 모시고 사는 노인이 행복하지 불행한지도 모르는 양반이...” - 177
“우리 어머니는 이날이때 맏아들 맏며느한테서만 진지 얻어잡수셨어. 앞으로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건 변함이 없겠지. 그만하면 행복하신 거 아냐?”
“노후엔 어떡허든 맏아들 밥을 얻어먹어야만 행복하다는 미신을 빼도 어머님은 과연 행복하셨을까요?”- 179
“달리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모르게 만드니까요. 어차피 당신 어머니 대에서 끝나야 할 낡은 속임수니까요”
“말 다했어? 당신 어머니라니? 그게 어디서 배먹은 말버릇이야?”
“말버릇이 아니라 그건 사실일 뿐이에요. 그 어른은 당신의 어머니고, 당신은 저의 남편이고, 우리 세 사람의 관계에서 그 사실이 좀더 분명해져야 한다고 생각 안 하세요?”- 179
“당신이 너무 쉽게 효도 소리 하는 걸 참을 수가 없군요”
그 여자가 작은 소리로 절규했다.
“그렇담, 그렇담...당신은 효도를 부정한 셈이로군. 원 세상에 환장을 했군.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자기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한 핏줄에 대한 사랑과 책임은 자연스럽고도 신성한 의무야. 아니, 의무 이전이고 의무 이상이야 천륜이야”
...
“말 조심해요. 겉 다르고 속다든 간에, 거짓이든 정말이든 간에 효도를 실제로 하고 있는 건 나지 당신이 아니란 말예요. 당신뿐 아니라 모든 남자가 다 마찬가질걸요. 어디 정말 효자가 있으면 데리고 와봐요. 효자가 있는 게 아니라 효부를 아내로 둔 남자가 있을 뿐이에요. 효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이 있는 건 여자지 남자가 아녜요” - 181
“...당신이 구호로 삼고 있는 효도야말로 정말은 얼마나 거짓투성이의 위선인가를 당신이 더 잘 아실텐데. 그건 바로 당신 자신의 체험일테니까...저는 지금 그분한테 손톱만큼의 거짓도 없이 사람이라면 늙고 병들었을 때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건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거기 때문에 저는 요새 아주 편안해요
...
제일 힘들었던 건 당신이 툭하면 채찍처럼 휘두르는 효도라는 걸 극복하는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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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말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축복스럽게도...남자들이 효도라는 걸로 억압하지만 않았어도 세상의 고부간은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졌을걸” - 183
고질병처럼 남편과의 사이의 모든 것이 엇갈리는 느낌이 도졌다.
...
언젠가는 정직해야 할 것 같았다. 남편이 원하는 것을 눈치보느라 꼭꼭 감추고 있던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뭔가에 대해, 나는 여태까지 행복하게 산 것일까. 행복하게 산 체한 것일까에 대해, 남편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에 대해.
그 여자는 두려움없이 정직해질 자신이 없었다. - 190
기다리고 있던 애리 엄마의 친정식구가 우르르 몰려와 그들을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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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리 엄마도 청희가 알고 있는 냉담하고 말수 적은 막내올케가 아닌 딴사람처럼 생기발랄해져서 이 사람 저 사람하고 골고루 수다를 떨고 포동도 하고 악수도 하고 울고 웃고 표정이 자유자재로 풍부했다. - 194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렇게 골똘하게 빗소리를 듣는 것일까? 그 여자는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어머니라는 것밖에 서로 의사소통이나 느낌의 교류가 있었던 적은 너무 오래 되었다. - 210
그것은 그 여자가 조금이라도 자기를 드러내려고 할 때였다. 그걸 거꾸로 하면 여자답기 위해선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를 드러내선 안 된다는 이치가 됐다. 그 여자는 자기를 드러낼까봐 조마조마해야 되는 삶에 위기의식 같은 걸 느꼈다.
...
나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불안해 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거든. 여자답다는 건 나에겐 연기야. - 215
그 여자는 일이 끝나자마자 샤워에 몸뚱이를 맡겼다. 뜨거운 소나기가 그 여자의 털구멍을 열고 그 속의 미세한 먼지까지 씻겨내렸다....그 여자의 마음 속엔 참패감과 굴욕감이 찬바람처럼 불고 있었다.
...
이십 년 동안이나 같이 산 소위 조강지처가 친정어머니를 잠시 모셔야 한다는 일로 그렇게 오래 남편의 눈치를 보고 나중엔 스스로의 몸뚱이로 미인계를 써가면서까지 어려운 승낙을 얻어내고자 했으니 그에게 있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 222
그 여자가 흐느끼는 게 인철의 등에 잔물결처럼 전해 왔다.
“효녀군”
“엄마 때문이 아녜요. 제가 비참해서 그래요. 아아, 왜 이렇게 비참할까요. 미치겠어요” - 227
한쪽은 애걸하고, 한쪽에선 마지못해 선심을 베푸는 식으로 해서 얻어진 결과에 그 여자는 굴욕감을 느꼈다. 그 여자가 바란 건 화합이었다. 그 여자는 늘 화합을 꿈꾸었을 뿐 한 번도 도달해 보진 못했다. 그 여자가 비참한 것 그 때문이었다. - 227
남자 여자 만나서 사랑하고 원하고 살 비비고 살면서 자식 낳고 살림 늘리고,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는 일의 소중함은 그 여자의 신앙 같은 거였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만 하는 화합을 신앙하던 것이 실은 멀쩡한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 227
재남이는 마지못해 일어서면서 이렇게 빈정댔다. 그러나 콩쥐에게로 다가오더니 안으로 밀어붙이면서 말했다.
“술값 내”
...
“도대체 얼마나 타왔게 요게 제법 큰소리치고 있어. 요걸 그냥...”
재남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당수폼으로 누이의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콩쥐는 몸을 움츠림녀서 대들었다.
...
“치사하고 더러우면 오빠도 나서서 벌면 될 거 아냐?”
...
재남이는 때리는 대신 콩쥐의 멱살을 잡아 전파사 불빛이 새어나와 환한 곳으로 끌고 갔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콩쥐가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 238
“큰오빠는 지금 대학생이에요. 아버지가 아까 보신 사람은 작은 오빠구요. 작은오빠는 작년에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했어요. 아무 대학에나 갈려면 갔을텐데 엄마하고 누이가 자기 땜에 희생하는 생각을 해서라도 껄렁한 대학을 어떻게 가냐는 거예요...”
...
“정말 기특도 하지. 감탄했다. 여자란 뭐니뭐니 해도 누구를 위해 희생할 때가 가장 아름답거든”
인철이 되는 대로 콩쥐의 도취를 부추겼다. - 244
미소가 사라진 어머니의 얼굴은 조막만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폐허처럼 끝간데없이 쓸쓸했다. 오로지 종적인 인간관계에 생애를 건 어머니, 젊은 날은 그런 관계의 지고의 이상인 효를 몸소 실천하는 데 바치고, 훗날 반드시 효로써 보상받게 되리라는 걸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가 어이없이 허탕치고, 지금 달랠 길 없는 배신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누워 있었다. 그 여자는 그 참상에 전율했다. - 257
“...여봐, 계집은 노글노글 품안에 들어야 맛이야, 높은 데서 구버보는 잘난 여잔 이제 질색이라구. 지긋지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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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은 표시로 처가살이란 말을 입에 담을 때의 냉혹하고 교만한 표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병든 장모에 대한 그의 냉혹하고 교만한 마음일 것 같아 그 여자는 두려움마저 느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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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잠든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그를 절연된 사람처럼 낯설게 느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따. 그 여자는 고독했다. - 258
그 여자는 분명히 집 속에 있으면서 내쫓긴 여자처럼 불행했고 올 데 갈 데 없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 여자는 아무도 없는 부엌과 거실의 불을 켰다. 그리고 그 여자가 손수 장만하고 오랜 세월 손때 묻혀가며 길들인 세간과 그릇 나부랭이들과 대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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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돌연 그 여자의 정을 저버리고 정없는 사물이 되어 놓여 있었다. 마치 고물상에 들어선 것처럼 그런 것들이 낯설고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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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과 정적은 곧 공허였다. 그 여자는 그 공허를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할 것처럼 느꼈다. 그렇지 않고는 미칠 것 같았다. 마침내 그 여자는 쥐어짜듯이 목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 261
“그 서방에 그 계집이라더니, 잡아뗄 셈이로군요?”
재남이의 고수머리 그늘에서 두 눈이 당장 튀어나올 것처럼 툭 불그러지면서, 내부에서 폭력에의 충동이 돌파구를 찾아 용솟음치듯이 그의 몸이 꿈틀 파도쳤다.
그 여자는 소름이 끼쳤다. 그 여자의 삶에 전혀 새롭게 전개된 엄청나고 추악한 상황에 대한 판단력보다는 당장 눈앞에 폭력을 피하려는 자기 보호본능이 더 앞섰다. - 305
“...사람이면 다 사람인 줄 알아. 사람처럼 층수 많은 것도 없다구”
인철이 배짱 좋게 능글댔다.
“당신 그래도 되는 거예요? 사람을 하나 짓밟고 나서 버러지를 짓밟았다고 꾸며도 분수가 있지”
그 여자가 마음으로부터 놀라서 부르짖었다.
“여보 여편네가 매력 없게 제발 그 인도주의자 같은 낯짝 좀 하지 마. 휴머니즘은 당신만 있는 거 아냐. 나도 그런 거 있다구. 그렇지만 사람값에 못 가는 것들한테 그런 거 남용했다간 이쪽 꼴만 우습게 되는 걸 알아야지” - 313
한창 사랑받고 꽃답게 피어나야 할 나이에 세파에 뛰어들어 갖은 수모를 겪고 남의 눈까지 속여가며 번 돈을 무자비하게 뜯기면서도 아깝다든지 억울해 하는 눈치가 전혀 없었다. 본성이 착하다든지 정이 많다든지 하고는 다른 문제였다. 여러 남매를 다 공부시킬 능력이 없는 집안에서 누이는 마땅히 오라비를 위해 희생해야 된다는 도덕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을 뿐이었다. - 314
그녀가 남편과 더불어 열심히 이룩한 건 허구였을 뿐, 껍질이었을 뿐, 알맹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일종의 허탈감이 그 여자를 엄습했다. 껍질을 벗겨내고 나서 주워가질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엾어라. 그 여자는 자기자신에 대해 이렇게 부르짖었다. 가엾어라. 가엾어라. 그건 좀 전에 콩쥐가 못견디게 불쌍해서 중얼대던 것과 같은 소리였다. 실지로 그 여자는 콩쥐에 대해 동기간 같은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밑빠진 가마솥에 물붓기 식의 일방적이고도 허망한 희생을 해왔다는 걸로 그 여자와 콩쥐는 같은 처지였다. - 319
그는 소처럼 우물우물 하품을 되새김질하며 마고자와 바지저고리를 훌훌 벗어 던졌다. 누가 따라다니면서 일일이 뒤치다꺼리를 해주려니 하고 행동하는 게 집안 내에서의 인철의 버릇이었다. - 320
인철이도 그 수표 한 장으로 그 감때사나운 콩쥐네 족속을 무마시켜 뒤끝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이상의 일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고 그의 능력 밖의 일은 아내가 어련히 알아서 처리해 줄까 하는 아내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는 그렇게 마냥 속편할 수가 있는 거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에 대한 믿음은 문청희라는 한 여자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는 상관없는 현모양처라는 유구한 고정관념에 대한 응석에 지나지 않는 건지도 몰랐다. 그는 나서부터 이날이때 현모양처에 편안히 길들여지며 살아왔다. 그런 의미로 그는 태어나서 여태까지 한 번도 어른이 된 적이 없는지도 몰랐다. 그의 어머니는 마치 포대기에 싸인 아기 넘기듯이 그의 재롱과 버릇을 고스란히 며느리에게 넘겨주면서 행여 그걸 다칠세라 소홀히 할세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
그들이 같이 낳은 아기도 벙글벙글 재롱 필 땐 그가 안았고, 보채거나 똥싸면 당장 그 져달의 품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현모양처는 꾸준히 그를 궂은일, 어려운 일, 싫은 일로부터 보호해 왔었다. - 325
“그걸 몰라서 물어. 그 집을 고쳐 팔아서 시골에 텃밭이 낀 작은 집을 장만해서 휴양지로 삼을 계획으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들떠 있었다는 건 당신도 알잖어? 물론 내 힘으로 그만한 거 장만할 형편이 됐으면 좀 좋아. 그렇지만 학문밖에 모르는 학자한테 그만한 여유도 없다는 게 어디 내 잘못인가. 이 땅의 학자라면 처음부터 각오해야 할 청빈인걸...내가 본 단 하나의 처덕이자 학자로서도 꼭 탐나던 걸 빼앗아가버렸으니...” - 334
인철은 문득 그 여자를 두들겨패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자와 북어는 팰수록 맛이 난다는 게 그의 단순소박한 여성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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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철은 두들겨패주고 싶은 충동의 표현처럼 거칠고 힘차게 그 여자를 끌고 안방으로 들어가 소리나게 문을 잠그고 가학적인 애무를 시작했다. - 335
“건방진 예긴지는 모르지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란 있을 수 없는 게 부덕(婦德)이라는 그 좋은 거 아닌가요?
명구가 눈을 똑바로 뜨고 추궁하듯이 강경하게 말했다....명구의 얼굴은 그 여자가 뒷걸음질치는 속도보다 조금씩 빠르게 육박해 오면서 확대됐고 확대되면서 남편의 얼굴을 닮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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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자랄수록 너희 아버지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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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덕이란 여자들이 지닐 최고의 덕목이고 바로 우리 엄마가 그 부덕의 화신이란 걸 저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엄마는 훌륭하셨어요.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제 그만해두시고 체통을 지키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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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불행이라는 거라도 꼭 만져보셔야겠어요?”
명구가 비꼬는 것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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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를 고쳐요?”
명구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고함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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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버리고서 말인가요? 엄마가 대단히 잘난 여자로 보이지만 정떨어져요...” - 344
“부덕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자학적이고, 자신의 미명의 그늘에서 악덕을 키우기만을 일삼는지를 알아낸 이상, 그런 게 결코 덕목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상, 이미 그것의 화신으로 살 수도 없는 거 아니니? 엄마는 엄마의 참모습으로 사는 일을 아마 피할 수 없을 것 갔다.”
그 여자의 얼굴이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생각을 하면 가슴이 막 울렁거린단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상 그것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걸로 덮어놓고 복종하던 모든 것에 왜?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거야. 그게 만져보지 못하게 하던 걸 만져볼 수도 있을 거야. 그게 금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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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게 행복하게 사는 체하기 위해 애쓰느라 나 자신을 너무 돌보지 않았다. 이제부턴 안 그럴거야. 행복하게 헛사는 것보다는 불행하게라도 참으로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
“...엄마가 팔자를 고치겠다는 건 그것과는 아주 다른 뜻이야. 여지껏 사람들이나 도덕으로부터 배운 좋은 팔자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별안간 든 거야. 다만 그런 거짓을 믿도록 오랜 세월 길들여졌을 뿐이라고...남들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할까봐를 눈치보기 위한 나로부터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나로 고쳐 살아보려는 거야” - 346
“...어쩌면 굳이 그 모든 것을 들춰낼 필요 없이 화해한 체할 수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가 무엇을 단념했나를 결코 잊지 못할걸. 그건 꼭 해 보고 싶은 일이었어. 내 쪽에서 너희 아버지를 버리고 혼자가 돼보이는 일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증거하기 위한 유일한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
“화해할 수도 있기야 있겠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날 그날의 삶을 이어갈 수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건 가면일 뿐이야. 나에게 진짜 얼굴이 있다는 것까지 잊진 못할걸. 결국 이중의 삶을 살겠지. 그래서 끔찍하다는 거야.” - 350
“후회하실텐데...”
“후회도 사람 사는 맛일 테지. 아무것도 못 느끼고 사는 것보다는 그거라도 체험하고프다.”- 351
그는 계속해서 낄낄거리면서 빈정댔다.
“날치고 싶어서 그러지. 당신은 처음부터 끼가 있는 여자였어. 오래 참았지. 젤 먼저 뭘 하실까. 응 참 언젠가 헤어쇼를 하고 싶댔지. 해보시지. 해보면 그게 얼마나 허황한 짓거리라는 걸 알게 될 테지”
“그래요. 당신 그 말씀 한번 잘하셨어요. 그전엔 당신이 그게 얼마나 허황한 짓거리라는 걸 가르쳐줘서 해보기도 전에 알았지만 이제부턴 안 그럴 거에요. 이제부턴 내가 직접 해보고 나서 그게 허황하다든가 해볼 만하다든가를 분간할 거예요. 앞으론 당신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한 게 되겠죠.” - 360
“아이들 생각을 해서라도 어떻게 그렇게 헤어지는 일에 자신이 있을 수 있지?”
“자신 있구말구요. 다 큰 아이들한텐 사는 방법을 옳게 가르친다는 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새롭게 선택한 제 살는 방법에 대해 전 아이들한테 한점 부끄러움도 없어요” - 362
헤어져 사는 일을 내일 또 내일로 미루는 것이 거의 습관화되다시피 한 인철 – 362
그 여자가 집 나오는 것과 동시에 벗은 부덕(婦德)이란 탈은 여자가 조상대대로 써내려오는 동안 거의 육화된 거기 때문에 그렇게 피흘리지 않고는 벗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싱싱한 상처에서 피가 번져가듯 그 여자의 얼굴에선 계속해서 눈물이 번졌다. -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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