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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책입니다.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6
군대는 일명 ‘남성다움의 학교’라고도 불린다...단순히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받는 훈련의 내용을 요약하면 적을 공격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한 스킬이다. 즉, 살인의 기술인 것이다. 죽여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는다. 살벌한 세계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살기를 부풀려 놓은 병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여자 앞에서 신사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리 없다. 연구에 따르면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경우 가정 폭력의 빈도가 증가하고 폭력적인 남편, 연인이 되는 경향이 있으며 성범죄를 일으키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 8
이런 여성 혐오적인 남자 가운데는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여자를 싫어하는 게 ‘여성 혐오’인데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많다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럼 더 알기 쉬운 번역어를 사용해보자. 바로 ‘여성 멸시’다. 여자를 성적 도구로밖에 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여자든 상관하지 않고 알몸이나 미니스커트 같은 ‘여성을 타나내는 기호’만으로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 12
여성 혐오는 남녀에게 있어 비대칭적으로 작용한다.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이기 때문이다...‘여자로 태어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남자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반대로 ‘여자로 태어나 손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여자는 얼마나 있을까 – 13
‘바람둥이’라 일컬어지는 남자들을 떠올리면 좋다. 그들은 ‘자기 것’으로 만든 여자의 수를 자랑하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여자라면 누구든 상관 않고 발정할 정도로 여체와 여성기, 여성성의 기호나 신체 부위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도록 조건 훈련된 ‘파블로프의 개가 바로 자신이란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성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 13
자신이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바로 여성 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 - 16
다른 여자가 침대 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남자들한테 묻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다. 여성 경험이 많은 남자라면 자세히 알려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이 ‘사실 그대로의 여자’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남자의 망상이라는 사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닫게 되는 사실이다. - 17
지금은 유명해진 한 희극 배우가 쓴 주간지 칼럼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자신감을 잃을 때나 좌절을 겪을 때면 수첩에 적힌 모든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나 탤런트 아무갠데, 지금 길게 이야기할 여유가 없다. 지금 당장 나 있는 데로 와”하고 부탁한다는 한다. 그래서 그 중에 몇몇이 진짜로 찾아오면 ‘그래, 나 아직 죽지 않았어’하고 안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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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전화를 받은 여자들이 반응하고 있는 것은 그의 인격이나 육체가 아니라 그의 ‘유명인 브랜드’다. 그에게 있어 그녀들이 대체 가능한 존재인 것처럼 그녀들에게 있어 그 역시 대체 가능한 ‘기호’인 것이다. 그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자가 찾아오면 위안이 되는 것이다. 명성이나 권력과 같은 자신의 기호가 가진 효과를 재확인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 18
요시유키의 <모래 위의 식물들>에는 평범한 샐러리맨 주인공이 창녀를 찾아가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내뱉는 대목이 등장한다. 아니, 그 반대다.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품었을 때 그걸 퍼부을 수 있는 편리한 상대로 창녀가 존재한다.
요시유키에게 있어 여자란 저항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처리해줄 쓰레기터로서 여자를 찾는 남자 – 19
포르노의 철칙은, 유혹하는 이는 여자이어야 하며 마지막에 가서는 쾌락에 지배될 것, 이다. “유혹한 건 여자라고. 나는 나쁘지 않아”하며 남자의 욕망을 면책시켜주는 대단히 단순한 장치이다. 저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눕혀 범하는 ‘강간물’에서조차 결국에는 여자의 쾌락으로 끝이 난다. “왜 그래. 너도 좋았잖아”하고 말하듯 말이다. - 20
여성의 쾌락은 남성의 섹슈얼리티 달성을 재는 측정가능한 지표이며 남성에 의한 여성의 성적 지배가 완성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내 아랫도리를 한번 맛보고 나면 아주 사족을 못 쓰고 떨어지지 않는다니까” - 20
미즈타 노리코. 그녀는 <여자에게로의 도주와 여자로부터의 도주>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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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작가들은 여성에게 자신의 꿈을 투사하여 자기 멋대로 해석해왔는데, 그들이 그려온 꿈 속 여성과 현실 속 여성과의 괴리야말로 남성 내면의 풍경을 현란 시켜온 주범이다. - 25
남성의 성환상에 빠져 그 속에서 ‘꿈속의 여성’을 연기해주려 한 여자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자들은 그런 무의미한 남성 시나리오로부터 내려오기 시작했다. - 28
여자의 가치가 남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일반적으로 그렇다) 반면...그렇다면 남자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그 답은 ‘남성 세계 패권 게임에 의해 결정된다’이다. 남자가 받을 수 있는 치대의 평가는 같은 남자가 내뱉는 “제법인걸!”이라는 칭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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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남성 세계의 패권 게임 속에서 다른 남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평가받고,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 패권 게임에는 지위를 놓고 다투는 권력 게임과 부를 놓고 다투는 치부 게임, 명예를 놓고 다투는 위신 게임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패권 게임의 승지가 되기만 하면 여자는 전리품처럼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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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영웅이 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여자는 영웅을 좋아한다. 여자를 얻고 싶다면 우선 남자들 사이의 패권 게임에서 승자가 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된다. - 30
그리스의 동성애는 어째서 대칭성을 가지지 못했을까? 페니스를 ‘삽입하는 이’와 ‘삽입당하는 이’ 사이에는 일방적인 관계만이 있을 뿐이며 ‘삽입 당하는 이’는 열등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삽입하는 이’는 성적 주체, ‘삽입당하는 이’는 성적 객체로서 양자 사이에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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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입 당하는 것, 소유 당하는 것,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성화 되는 것’이다.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화 되는 것, 즉 성적 주체의 위치로부터 전락하는 것이었다. - 35
여성의 성적 객체화를 서로 승인함으로써 성적 주체간 상호 승인과 연대가 성립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 여자를 적어도 한 명 이상) 소유하는 것’이 성적 주체가 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자기 여자’란 말은 참으로 잘도 만들어낸 표현이다. ‘남자다움’은 한 여자를 자기 지배하에 두는 것으로써 담보된다. ‘자기 마누라 하나 휘어잡지 못하는 남자가 무슨 남자냐’는 판정 기준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 37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이다‘ - 42
남성의 성적 주체화에 필요한 것은 자신을 남성으로 인정해주는 남성 집단이다....남자가 발기 능력과 사정 횟수에 집착하는 것 역시 오로지 그것만이 남자들 사이에서 비교 가능한 일원적 척도이기 때문이다. - 44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선택했음에 틀림없는 남편이건만, 내가 사랑했떤 그 사람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 내 눈앞에는 낯선 외계인이 앉아 있는 것일까...? 이런 삭막한 기분으로 식탁 너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아내들이 많을 것이다. - 46
성의 이중 기준은 여성을 두 종류의 집단으로 분할하게 된다. 성녀와 창녀, 아내/어머니와 매춘부, 결혼 상대와 놀이 상대, 아마추어와 프로 등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분법이다. 실제 살아 있는 여성에게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자궁도 보지도 달려 있지만, ‘생식용 여성’은 쾌락을 빼앗긴 채 생식의 영역으로 소외되고 ‘쾌락용 여성’은 쾌락에 특화되어 생식으로부터 소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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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하여 통치하라divide and rule’. 이것은 지배의 철칙이다. 분단해 놓고 서로 대립시킨다. 상호 연대 같은 건 당치도 않다. 여성 입장에서 말하자면 남성에 의한 ‘성녀’와 ‘창녀’의 분단지배이다. 그위에 계급이나 인종의 균열도 들어간다. - 53
군대에는 종군 간호사들도 있었는데 그녀들은 전장에서 위안부 여성이 상처 입은 병사를 간호함으로써 자신들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종군 간호사는 병사의 ‘어머니’이자 ‘자매’로서의 정체성은 받아들이나 ‘성의 대상’으로서의 정체성은 거부한다. ‘위안부 취급 하지 말라’는 것이 그녀들을 지탱해주는 자존심이었던 것 - 54
가계에 공헌하지 않으면서 가사 부담도지지 않는 남편은 예전부터 넘쳐났다. - 67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도 참견하기 좋아하는 친척 아주머니가 중매 자리를 구해오던 좋은 시절’에는 애써 ‘결혼 활동’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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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전원 결혼 사회’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을까? 그것은 결혼이 강제였던 사회, 결혼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선택지가 없었던 시대의 다른 이름이었다. 이 시대 결혼은 여성의 ‘평생 직장’이라 불렸다.
그에 반해 결혼이 선택지의 하나인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혼인율은 저하하고 이혼율은 상승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여성에게 ‘평생 직장’이외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69
그들이 원하는 여성상은 어떤 것일까.
미우라의 책에는 ‘남자를 떠받들어 주는 여자라면 어떤 여자라도 상관없다(용모를 안 따진다는 이야기)’는 적나라한 본심도 실려 있다.
남성에게 있어 여성의 최대 역할은 자존심의 수호 역할이다.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비결이 있따. 그건 바로 남자의 프라이드를 절대로 상처 입히지 않으며 수백 번 반복해서 듣는 자랑 이야기에도 싫증 내지 않고 귀를 기울이고 대각선 45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하고 자장가를 부르듯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다. - 76
사회적 명성도, 지위도, 수입도 아내가 남편을 앞지르는 커플이었다. 이 결혼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아내가 남편을 받들어주는 것’이었을 테지만, 아마도 사회적으로 미숙하고 유아적인 남편은 ‘파워를 가진 아내’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힘껏 발로 차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 78
현실에, 그리고 현실의 여자에게 흥미가 있다면 대인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 학력이나 지위나 수입이 있으면, 그리고 ‘겉모습’이 좋다면, 입 다물고 있어도 ‘여자가 줄을 서던’ 시대는 지나갔다. - 82
타자의 개입을 수반하는 한, 모든 섹스는 사회관계의 하나가 되며 따라서 ‘공적’인 것이 된다.
공적인 섹스는 사회관계에 적용되는 모든 시민 사회의 룰이 적용된다. 상대의 합의가 없으면 부부 간에도 ‘강간죄’가 성립하며 상대가 싫어하는 성적 어프로치는 ‘성추행’이 된다. - 90
유아성애의 피해자였던 여성이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연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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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츠의 연구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그것을 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이 소심한 성격의 가해자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죄의식을 경감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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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피해자가 받은 타격을 언제나 과소평가하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피해자가 그것을 반기고 있으며 ‘고의’적인 착각을 하려 한다. 이는 그들이 ‘죄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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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티와 내가 섹스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내가 케이티에게 섹스 해주고 있을 때’라는 식으로 표현하며 – 97, 98
아동 성학대자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혹은 구하지 않아도 되는) 무력한 타자의 신체를 이용하고, 집착하고, 의존하고, 지속적으로 제압하려 하고, 아이로부터 자존감, 타인에 대한 신뢰, 자기통제감 등을 무참하게 빼앗아간다. - 99
슐츠는 이들 남성 대부분이 자기평가가 낮으며 스스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 99
2006년 9월6일, 일본에 특별한 아이가 태어났다. 출생 신고도 하지 않고 호적도 가지지 않는 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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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황실전범에 따라 황위 계승 제3위에 해당하는 아이(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신노) 탄생이다. 이 아이는 앞으로 일거수일투족이 감시 하에 프라이버시가 없는 일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 108
‘남아 탄생’ - 모든 미디어가 그렇게 보도했다. 그리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여성 혐오가 일본 열도를 가로질렀다. “축하드립니다!” 온 얼굴에 기쁨의 감정을 담아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정치가와 시민들은 만약 이 아이가 여아였다면 대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태어나면서 성별에 따라 아이의 가치가 달라진다. - 태어나자마자 신생아의 다리 사이를 살펴보고 ‘고추’가 달려 있으면 “해냈구나!”하고 기뻐하며 달려 있지 않으면 실망하는 것은 일본 사회의 오랜 관습이었다. - 108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치정에 의한 살인 모두 남성의 궁극적 여성 지배 욕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여자가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대는 면식 없는 타인이 아니라 남편 또는 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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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폭력에 의한 살인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우는 재결합을 요구하는 남자에게서 아내나 애인이 도망치려 할 때 발생한다. 재결합을 요구했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남자는 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다. 그리고 그녀를 다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기 위해 죽인다. 살인은 궁극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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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질투는 남자를 빼앗은 다른 여자에게로 향하지만 남자의 질투는 자신을 배신한 여자에게로 향한다. 그것은 소유권의 침해, 한 명의 여자가 자신에게 소속됨으로써 유지되던 자신의 자아가 붕괴될지 모른다는 위험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있어 질투란 다른 여자를 라이벌로 하는 남자를 둘러싼 경쟁의 게임이지만, 남자에게는 자신의 프라이드와 아이덴티티를 건 게임이 된다. - 124
근대의 성을 둘러싼 세간의 ‘상식’, 즉 부부간 성애가 다른 종류의 성애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든가 이성 간 성기 성교가 정상적인 성애이며 다른 것은 모두 일탈이라고 하는 등의 명제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 132
에도 시대의 춘화에
는 기생과 손님 뿐 아니라 마을 처녀와 애인, 부녀자와 외간 남자, 과부와 애인, 중년의 부부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한 체위로 얽혀 교미하고 즐기는 표정이 그려져 있다. - 134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남근은 여성을 쾌락으로 이끄는 장치’이며 ‘여성은 남근으로부터 쾌락을 얻어야 하며 나근 이외로부터 쾌락을 얻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싶은 남성의 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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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신체 일부로서의 페니스가 아니라 남성 성환상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신벌로서 팰러스phallus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 속 해부학적 남근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거의 페티시즘의 영역에 도달한 상징적 남근숭배에 가깝다. - 141
‘마녀’ ‘악녀’란 남성의 통제에 따르지 않으며 성적으로 활발한, 요즘 말로 하자면 ‘성의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여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현이 성에 차지 않는다면 ‘성적 신체를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사용하는 여성’이라 바꿔 말해도 좋다. 즉 ‘남자 허락 없이 감히!’ 행동하는 여성이다. - 148
나는 에토의 시점에 누락된 딸을 분석에 포함시켜 일본판 근대가족을 ‘비참한 아버지’ ‘답답한 어머니’ ‘한심한 아들’ ‘불만스러운 딸’의 관계로 기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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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어머니가 부끄러워하는 ‘비참한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봉사하는 것 외에 살아가는 방법이 없는 ‘답답한 어머니’가 된다.
그러나 아들은 언젠가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아버지를 완전히 혐오하지 못하며 ‘비참한 아버지’와 동일화함으로써 ‘한심한 아들’이 된다. ‘답답한 어머니’를 궁지로부터 구출해 낼 기대에 답할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깊은 자책감을 내면화한다. 동시에 아들은 ‘한심한 아들’로 계속 머무는 것이 어머니의 감춰진 소망, 즉 어머니의 지배권 밖으로 아들이 벗어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답하는 길도 된다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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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비참한 아버지’와 동일화할 필요는 없으나 아들처럼 자력으로 비참함을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도 기회도 주어져 있지 않다. 내 의사를 전혀 반영시킬 수 없는 남성에게 인생의 조타를 맡긴 채 ‘답답한 어머니’가 되는 것 말고는 다른 인생이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념하기 때문에 딸은 ‘불만스러운 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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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한 한탄, 아이들 특히 아들에게 ‘아버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는 ‘답답한 어머니’(‘한탄하는 어머니’라 해도 좋다)와 그런 어머니를 부조리하게도 ‘지배하는 아버지’ 사이의 비대칭적인 젠더 관계이다. 그 안에서 ‘모자 밀착’이라고 하는 비뚤어진 일본판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성립한다. - 150
남성의 여성 혐오는 타자에 대한 차별인 동시에 모멸이다. 남성은 여성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 여성 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된다.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 156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 158
딸은 어머니로부터 여성 혐오를 배운다. 어머니는 딸의 ‘여자 같은 부분’을 증오함으로써 딸에게 자기 혐오를 심어주고 딸은 어머니의 불만과 공허를 목격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 - 160
딸은 자기 인생에 있어 최초의 절대적 권력자로 등장하는 어머니가 그보다 더 강력한 권력 아래에 들러붙어 농락당하는 것 역시 목격한다.
어머니의 불만족감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함과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고 있음에도 비슷한 삶을 딸에게 강제함으로써 딸의 증오를 산다. 딸은 어머니를 ‘절대 되고 싶지 않은 모델’, 즉 반면교사로 삼지만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남성)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무력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그 타인이 어머니에게 부조리한 지배를 휘두르고 있는 아버지와 꼭 같은 남자일수도 있다는 예감에 두려움을 느낀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쳇바퀴다. - 160
세상은 어머니가 된 여자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건네고 어머니가 되지 않은 여자에게는 ‘성숙한 여성’ 취급을 해주지 않으며, 그럼에도 어머니가 된 여자가 떠안게 되는 부담에 관해서는 조금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어 기쁨을 얻게 될지 모르나 그것과 맞바꾸어 치러야 할 대가의 크기를 깨닫게 되는 것은 출산 이후의 일이다. - 161
어머니는 자신이 지불한 대가를 아이가 대신 갚아주기를 소망한다. 아들의 경우 이야기는 간단하다. 출세하여 아버지의 횡포로부터 어머니를 구출하고 어머니에게 충성과 효도를 다할 것. ‘엄마 말 잘 듣는’ 아들이 집안을 물려받게 한 다음 가부장의 어머니, 즉 황태후 지위에 오르는 것이 가부장제 속 어머니의 최종 목표이자 보수가 된다. - 162
오랫동안 스테이지마마의 지배를 받으며 지내온 나카야마 치나츠는 어머니와 정면으로 대립했을 당시의 이야기를 에세이에 이렇게 적고 있다. ‘다 너를 위해서야’를 반복하는 어머니에게 모든 힘을 짜내어 대항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 어머니 입에서 ‘그래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해서였어’라는 대답을 받아냈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를 넘어 하나의 인격체 대 인격체의 관계로 끌어 올린 그녀의 태도에 나는 경의를 표한다. 나는 그 기회를 줄곧 회피해왔으며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약자가 되어 있었다. 약자가 된 어머니를 몰아붙이는 건 불가능했고 나는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 165
다른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머니도 잘난 딸보다는 허약한 아들을 더 애지중지했다. 그런 오빠가 11살이 되던 해, 돌연 병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오빠를 대신해 회화 세트를 물려받은 여동생은 부모의 기대를 등에 업고 미대에 진학했고 머지않아 성공한 화가가 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성공한 모습을 보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엄마가 고생해서 나를 대학까지 보내준 거 아니었어? 그리고 이렇게 원하는 일도 하고 있잖아. 근데 왜 그렇게 어두운 표정을 짓는 거야?“
오빠가 죽었을 때 엄마가 오빠 대신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던 사노는 끝내 어머니를 좋아할 수 없었고 그리고 어머니를 증오하는 스스로를 줄곧 책망해왔다. - 172
딸에게 여성 혐오를 가르치는 것은 어머니...그러나 그 전에 어머니에게 여성 혐오를 심는 것은 그녀의 남편이다. 어머니는 여성 혐오적 아버지의 대리인으로서 행동한다. 딸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여성 혐오를 가부장제의 대리인인 어머니를 통해 내면화한다. - 176
가정 폭력 속에 신체적 학대, 경제적 학대와 더불어 정신적 학대가 포함되게 된 것은 2004년 가정 폭력 방지법 개청 이후의 일이다. 설사 직접적으로 차거나 때리는 등의 폭력적 행위를 하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넌 바보다’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다’ ‘별 볼 일 없는 것’ 같은 모욕적 언어를 퍼붓는 것 자체를 ‘학대’라고 부른다. 학대를 받은 이는 스스로를 비하하고 무력감에 휩싸이며 자신감과 의욕을 빼앗겨버린다. 이렇게 가정 폭력의 정의를 확장시킨 결과 많은 여자들이 마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경험을 했다. 그렇구나! 나는 결혼하고 지금까지 줄곧 학대를 받아온 것이었구나! - 176
그런 ‘바보’에다 ’별 볼 일 없는‘ 여자와 왜 결혼을 했는지 되묻고 싶지만, 남성 입장에서 보면 ’바보‘에다 ’별 볼일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녀를 결혼 상대로 고른 것일 테다.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조롱하며 자신이 우위에 서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려는 것이 목적일 테니까. 때문에 남자는 바보 취급 가능한 여자를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한 명 확보해 놓는 것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시키기 위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 177
아내가 ‘바보 같은 여자’인 이유는 남편이 ‘바보 같은 여자’를 골랐기 때문이며 애초부터 ‘똑똑한 여자’(여기서는 단순히 자기보다 학력이 같거나 그 이상인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자)를 고를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을 남편 본인은 잊고 있다. - 178
딸은 이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목격하며 자란다. 그리고 자기의 미래 역시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 178
요즘 말로 하자면 성적 아동 학대라 해도 좋을 것이다. 롤리타 콤플렉스라고도 하고 피그말리온 콤플렉스(6)라고도 하는 남성의 성적 기호는 딸에 대한 아버지의 심리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6)미숙하고 미완성인 여성을 자신의 취향에 맞춰 길들인 후 그에 대한 애착을 품는 성향 – 182
아이를 원하지 않는 여자는 여성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문의 에세이란이나 투고란에는 진통이 주는 아픔도 내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고, 아이를 싫어하는 여자는 모성을 상실한 여성 불량품이 되며, 그런 여성 불량품들도 실제로 아이를 낳아보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그네스 논쟁이 있고 난 즈음부터 젊은 어머니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낳은 아이지만 정이 안 가요” “냄새가 나서 싫어요” “아무리 아기 똥이지만 그래도 냄새가 나는 걸요” 어머니들이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다.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그녀들이 내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 199
여학교에 딸을 보내는 많은 부모들은 딸이 ‘여성스럽게 자라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엄청난 계산 착오다...남녀 공학 출신 여학생이 이성애적 젠더 아이덴티티를 보다 일찍 발달시키는 것에 비해(예를 들어 남성을 우선시하여 학생회장 같은 자리에는 남학생을 지지하고 여학생은 부회장 자리로 돌린다) 여학교 학생에게는 반대로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가 더 많이 부여된다. 누구도 톱의 자리를 대신해주지 않는 여자만의 세계에서는 육체적 힘이 필요한 일이나 통솔력이 필요한 직책 모두가 여자의 역할이 된다. - 200
F현의 명문 여자 고등학교가 남녀 공학 전환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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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다니던 때에는 통학길에서 교복 스커트를 입고 교실에서는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는 ‘관행’이 있었다. 물론 강제가 아니라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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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스커트와 바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커트를 입었을 때 여자는 ‘여장(女裝)’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시라이는 남녀 공학화를 전후로 이 관행이 급격하게 변화했음을 경험적 데이터로 실증한다. 남녀 공학화 이후 여학생들은 통학길과 학내에서 모든 ‘여장’을 계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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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공학의 여학생들은 여장이라는 기호를 통해 남학생들로부터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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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는 다른 경험적 데이터를 통해서도 여학생이 ‘남녀 공학적 장면’에서 조연 역할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조신함, 얌전함, 배려와 같은 ‘여성스러움’의 미덕들 말이다! - 202
여성성 평가가 높은 소녀는 애초부터 학업 성취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다. 그녀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대체 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렸을 적부터 미모의 여동생과 비교당하며 ‘너같이 못생긴 애는 공부라도 잘 해야지’라는 말을 들어왔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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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 자원이란 스스로 획득하는 가치가 아니라 남서에게 선택되는 것(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의해 부여되는 가치 – 208
가정 내에서 최약자인 딸의 공격은 강자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향하지 않는다. 약자의 공격은 더욱 약하고, 저항하지 않는 이, 자신의 신체와 영혼, 섹슈얼리티로 향한다. 아들의 공격성이 단순히 타벌 또는 타자에 대한 상해 행위로 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렇게 자기 신체를 시궁창에 던져 넣듯 남성에게 바치는 성적 일탈(그 안에 매춘 행위도 포함된다)은 섭식 장애나 손목을 긋는 자해 행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 227
여자를 성기로 환원하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자신의 성욕을 채울 수 없는 성욕의 자승자박 구조를 누구보다도 저주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남성 자신일 것이다. - 239
매춘에서 남자가 사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라고 하는 기호이다. 기호에 발정하고 기호에 사정하고 있으므로 매춘은 마스터베이션의 일종인 것이다.
그렇다면 매춘에서 여성은 무엇을 팔고 있는 것일까? 매춘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물건됨’(또는 소유됨)을 팔고 있다. ‘물건됨’을 통해 물건에 사정하는 남성을 단순한 성욕으로 해체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커니즘 때문에 남성을 매춘부를 증오하게 되며 매춘부는 손님을 경멸하게 된다. - 246
‘예쁘지 않은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못 생긴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가슴 없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나이든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 등식에 무엇을 대입하든 그것은 오직 하나의 간결한 명제,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다’로 환원된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여성의 존재 가치는 남성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있다’는 단순한 명제가 된다...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될 때 사람은 ‘여자’가 된다. - 247
한 섭식 장애 여성은 30대에 접어들어 자신의 신체가 남성에게 가치를 잃어버렸다고 느낀 이후 비로소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살도 찌개 되었다고 한다. - 255
정통성을 부여받은 이성애 커플인 ‘부부’의 성애는 이렇게 하여 특권화 되었다. 그것은 내부와 외부에 편재해있던 성이 부부 관계 내로 한정되어 정통성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할 뿐 아니라, 부부의 유대관계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할 수 없었던) 성을 그 핵심에 위치시켰다는 것도 의미한다. ‘성적 가족sexual family’의 탄생이다.
참고로 전근대 혼인의 정의에 있어 부부 간 성관계는 필요조건이 아니었다. 성관계가 없어도 부부 관계는 지속되며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도 정실의 지위는 위협받지 않았다. - 269
성을 공적 세계로부터 추방하고 은닉하고 사적 영역, 즉 가족의 울타리 내에 가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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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성적 가족’이 되고, 부부가 성적 유대의 대명사가 되고, 혼인이 성행위의 사회적 면허증이 되고, ‘첫날밤’이 성관계의 개시를 알리고, 섹스리스가 부부 관계의 ‘병리’가 되고...오늘날 모두에게 익숙한 결혼과 부부에 관한 ‘상식’은 이렇게 하여 성립된 것이다. - 273
일본의 아내에게 있어서도 섹스는 오랫동안 ‘봉사’였으며 ‘No’를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노동’이었다. 그곳에 쾌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 280
현재의 황태자가 마사코 씨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 대사가 있따.
“평생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이 대사에 당시 얼마나 많은 일본 여자들이 전율을 느꼈을까. 만약에 당신이 이 대사에 ‘전율’을 느낀 여성 중 한 명이라면 당신 역시 ‘권력의 에로스화’를 신체화한 여성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지키다’라는 것은 울타리 안에 가두어 평생 지배하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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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여자를 ‘지킨다’고 말할 때, ‘지켜야’ 할 외적이란 종종 자신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질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남성을 가리킨다. ‘소유’를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인 ‘지킴’이라는 말이 ‘사랑’의 대명사가 되는 것이 ‘권력의 에로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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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사랑이 소유와 지배의 형식밖에 취할 수 없음을 이 개념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284
여성의 사랑이 종속이나 피소유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평생 당신을 따르겠어요’ ‘죽을 때까지 나를 놓지 말아줘’ 같은 표현이 그 상징적인 예이다.
그리고 여자들은 사랑을 ‘바지런하게 일상 신변 뒤치다꺼리를 한다’라는 대단히 근대 가족적인인 돌봄 역할의 형식 말고는 표현할 회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좋아하게 되자마자 하숙방에 찾아가 밀린 청소나 빨래를 하거나 도시락을 만들어오는 여자의 행동은 주부가 하층 중산 계급의 무상 가사 노동자로 전락한 이후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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