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으로 조그만 포탄 하나가 쉿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나는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못 들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한다. 나는 이곳에 혼자 있으며 어둠 속에서 거의 속수무책이다. 어쩌면 적의 두 눈이 포탄 구덩이에서 진작부터 나를 살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류탄을 옆에 두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내가 머리를 돌리려 하자 총도 숨어 있다가 소리 없이 따라 움직인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진땀이 배어 나온다.
나는 움푹 파인 곳에 여전히 누워 있다. 시계를 보니 2, 3분이 지나갔을 뿐이다. 내 이마는 땀으로 흥건하고, 눈구멍은 축축하며, 손을 덜덜 떨고 있따. 나는 나지막한 소리롤 숨을 헐떡인다. 이는 섬뜩한 공포의 발작과 다름없다. 머리를 내밀고 앞으로 기어가려고 하면 턱없는 공포가 밀려오는 것이다.
나의 긴장감은 죽처럼 부풀어 올라 그대로 누워 있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 나의 손과 발은 지면에 딱 달라 붙어 있어, 움직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손과 발이 도무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 167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 포탄 소리에도 불구하고 수상쩍은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쫑긋 귀 기울여 들어 보니 그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 참호를 통과해 가는 아군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인 모양이다. 이젠 소리를 낮춘 음성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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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온몸에 알 수 없는 온기가 넘쳐 흐른다. 이 목소리, 이 몇 마디의 나지막한 말들, 등 뒤의 참호 속을 지나가는 발국 소리가 하마터면 내가 빠질 뻔한 죽음의 공포로 인한 끔찍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단숨에 끌어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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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소리이고 더 안전하게 나를 보호해 준다...나는 내 얼굴을 이들 속에, 이 목소리에 파묻고 싶어진다. - 168
내가 막 몸을 좀 돌리려고 하는데, 이때 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몸뚱이 하나가 내가 있는 구덩이 속으로 털썩 떨어진다. 그는 미끄러지면서 내 몸 위로 굴러 떨어진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며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 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 171
그와의 사이의 3미터의 거리는 소름끼치는 길이고, 멀고 끔찍한 길이다.. 드디어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간다.
그때 그 사나이가 눈을 번쩍 뜬다. 그는 내가 다가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몸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지만, 눈 속에는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 173
눈은 소리치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그 눈 속에는 온 생명이 도망치려는 엄청난 노력과 죽음 앞에서. 내 앞에서 끔찍한 공포로 응집되어 있다. - 174
-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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