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착취.폭력/지배.착취.폭력-여러가지

전쟁과 죽음, 그리고 살고 싶은 마음

순돌이 아빠^.^ 2017. 3. 26. 06:15

내 옆으로 조그만 포탄 하나가 쉿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나는 포탄이 날아오는 소리를 못 들어서 소스라치게 놀란다바로 그 순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엄습한다나는 이곳에 혼자 있으며 어둠 속에서 거의 속수무책이다어쩌면 적의 두 눈이 포탄 구덩이에서 진작부터 나를 살피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리고 나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류탄을 옆에 두고 던질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내가 머리를 돌리려 하자 총도 숨어 있다가 소리 없이 따라 움직인다온몸의 땀구멍에서 진땀이 배어 나온다.

 

나는 움푹 파인 곳에 여전히 누워 있다시계를 보니 2, 3분이 지나갔을 뿐이다내 이마는 땀으로 흥건하고눈구멍은 축축하며손을 덜덜 떨고 있따나는 나지막한 소리롤 숨을 헐떡인다이는 섬뜩한 공포의 발작과 다름없다머리를 내밀고 앞으로 기어가려고 하면 턱없는 공포가 밀려오는 것이다.

 

나의 긴장감은 죽처럼 부풀어 올라 그대로 누워 있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다나의 손과 발은 지면에 딱 달라 붙어 있어움직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손과 발이 도무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 167

 

그때 어떤 소리가 들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난다포탄 소리에도 불구하고 수상쩍은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쫑긋 귀 기울여 들어 보니 그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게 아닌가참호를 통과해 가는 아군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인 모양이다이젠 소리를 낮춘 음성도 들린다.

...

갑자기 온몸에 알 수 없는 온기가 넘쳐 흐른다이 목소리이 몇 마디의 나지막한 말들등 뒤의 참호 속을 지나가는 발국 소리가 하마터면 내가 빠질 뻔한 죽음의 공포로 인한 끔찍한 고독으로부터 나를 단숨에 끌어내 준다.

...

그 소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소리이고 더 안전하게 나를 보호해 준다...나는 내 얼굴을 이들 속에이 목소리에 파묻고 싶어진다. - 168

 


 

내가 막 몸을 좀 돌리려고 하는데이때 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몸뚱이 하나가 내가 있는 구덩이 속으로 털썩 떨어진다그는 미끄러지면서 내 몸 위로 굴러 떨어진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며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 본다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 171

 

그와의 사이의 3미터의 거리는 소름끼치는 길이고멀고 끔찍한 길이다.. 드디어 나는 그의 옆에 다가간다.

 

그때 그 사나이가 눈을 번쩍 뜬다그는 내가 다가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다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몸은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지만눈 속에는 도망을 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 173

 

눈은 소리치고 으르렁거리고 있다그 눈 속에는 온 생명이 도망치려는 엄청난 노력과 죽음 앞에서내 앞에서 끔찍한 공포로 응집되어 있다. - 174


  레마르크, <서부 전선 이상 없다>







독일군이라고 죽어도 좋은 건 아닙니다

프랑스군이라고 삶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독일군도 살고 싶고

프랑스군도 살고 싶습니다


그들은 독일"인" 이전에 인간이고

그들은 프랑스"군" 이전에 인간입니다


인간이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인간이 죽음 앞에서 살고 싶어하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