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족을 꿈꾸느냐고 하면
어떤 분들은 행복하고 따듯한 가족을 꿈꾼다고 하시겠지요
저에게 어떤 가족을 꿈꾸냐고 하면
가족이란 걸 꿈꾸지 않는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제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하고 제 마음에 남아 있는 가족은
불편하고 힘들고 두렵고 걱정되고 답답한 그런 거거든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스페이드 여왕>을 읽으며
저의 엄마와 저의 여동생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제 여동생에게 엄마는 어떤 의미이고 어떤 느낌일까요
안나와 제 여동생의 삶이 많이 닮은 건 아닐까 싶어요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길 바라지만
평생에 걸친 불행과 고통의 뿌리가 된 가족이 있는 건 아닐까요
안나 표도로브나는 커피를 끓이고, 자신의 저명한 환자가 쓴 문학 연구 서적을 펴고, 편지지를 준비하고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초콜릿 과자가 담긴 푸른 병을 옆에다 놓았다. 그녀는 만족감에 커피 향을 들이마셨으나 한 모금도 마시지는 못했다. 부엌으로 보행기의 바퀴를 삐걱거리며 막대기같이 허리를 곧게 편 무르가 나타난 것이다.
안나 표도르브나는 불안해하며 카디건의 단추가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이러나저러나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 그녀는 항상 알지 못했다. 혹여나 카디건 단추가 똑바로 잠겨 있으며, 괴상망측한 스타킹을 신었거나 머리 빗질을 잘못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스스로 기억하는 바로, 안나 표도르브나는 평생 동안 어머니와 만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하곤 했다. 어렸을 때는 물속으로 다이빙을 앞둔 수영 선수마냥 어머니의 문 앞에서 얼어 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최강의 상대와 대면을 앞두고 승리가 아닌 응당한 패배를 기다리는 복서와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
그녀는 높은 소리로 의미심장하게 이죽거렸다. 평소와 같이 길거리의 저속한 단어들이 이어져 나왔기 때문에 안나 표도로브나는 몸을 움츠렸고, 이 움츠림은 어머니에게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 419
수요일이었다. 병원 진료는 12시부터다....대학교에 가기 전에 열일곱 살 레노치카가 어린 그리샤를 김나지움에 데려다준다. 카차가 그리샤를 데려오기에, 5시 반 이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6시부터 카차가 야간학교에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식사할 것은 있다. 나가기 전까지 우유를 사놓아야 한다. 종소리.
‘하나, 둘, 셋, 넷...열.“
“네, 어머니” - 424
40여 년 전 안나 표도르브나는 어머니를 의자로 내리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30여 년 전에는 머리끄덩이를 잡고 싶었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혐오와 구역질을 느끼며 자화자찬의 모놀로그를 흘려들었고, 기대했던 아침시간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 우울했다. - 426
에바 이모는 평생 어머니를 돌보며 블라우스에 풀을 먹이고 살았지.
...
그런데 갑자기 이모가 예순도 되지 않아 죽었어. 그러자 어머니는 바로 내가 필요해졌지. 낯선 시종은 견뎌낼 수가 없었거든
“왜 할머니에게 ‘안 돼요’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카차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일흔이 다 되었고 진단을 받기를...나는 죽어가는 사람을 뿌리칠 순 없었어” - 431
“아버지는 왜 엄마와 같이 여기로 오지 않았어요?”
“거기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었지. 어머니가 그이를 미워했단다”
....
“이게 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이에요...” 카차가 너그러운 투로 속삭이며 어머니의 관자놀이께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이게 삶이란다” 안나 표도르브나가 한숨을 쉬었다. - 431
열여섯 살 즈음에 그녀는 결코 결혼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어머니의 침실에서 들리는 가르랑거리는 목소리와 흥분된 웃음, 늘어지는 신음 소리만큼 역겨운 것은 없었다. 끊임없는 발정, 발정기...끊임없는 암내, 암내 풍기기...순간 안나는 섹스의 지울 수 없는 더러움에 대해 느꼈던 유년기의 강렬한 감정 속에 빠졌다...이러한 모든 것이 부재한 상태에서 희고 깨끗한 수녀가 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450
“이 괴물, 이 이기주의의 화신, 스페이드의 여왕, 그녀가 모든 걸 파괴하고 모든 걸 매장 시켜버렸어...당신은 어떻게 이걸 참는 거야? 당신은 성녀야...”
“내가요? 성녀라고요?” 안나 표도르브나는 가다가 기둥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멈춰 섰다. “나는 그분이 두려워요. 의무감도 있고. 동정심도 있어요...” -450
‘아니에요. 사랑하는 엄마. 이번에는 아니에요’
안나 표도르브나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일생 동안 처음으로. ‘아니요’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발음하진 않았지만, 이 단어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연약한 싹마냥 껍질을 뚫고 나왔다. - 454
카차는 무르에게 다가가 힘이 빠진 손을 들어 올려 아직 화장을 하지 않은 늙은이의 따귀를 기분 좋게 힘껏 갈겼다. 무르는 보행기에서 흔들거리더니, 곧 조용해져서는, 넓적다리가 부러진 이후 최근 10년간 서서 이 집안의 삶 전반을 지휘했던 사령선교의 난간을 붙잡으며 분명하고 낮게 말했다.
“뭐? 뭐지? 어쨌든 내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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