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주제의 작품을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제를 다루었느냐를 떠나서, 작품 그 자체로도 훌륭했습니다.
무얼 말하려는지도 명확했고, 그것을 저에게 전달해 주는 방식도 좋았습니다.
<나는 신이다>를 제작한 PD의 기자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제작 과정이나 뒷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간담회 가운데 가장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조선일보 기자의 태도와 질문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까지 기자가 PD에게 무언가 한 수 가르치려한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런 식의 말을 하면서
저널리즘...객관성...사건에 개입하지 않는다...떨어져서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보여준다...이것이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조선일보가 객관성,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한 발 떨어져서 사람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보여준다는 말을 하니 어색하기도 하고 띠용~~~싶네요.
다른 언론도 아니고 조선일보가 저널리즘과 저널리즘의 원칙을?
술자리나 회식 자리도 아닌 기자간담회에서
대학 교재에 나올 법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걸 보니
강의는 강의실에서 하시고 기자간담회에서는 질문을 하시라고 하고 싶더라구요.
게다가 조선일보 기자가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대자보나 고발장 같다고 얘기하더라구요.
이쯤 되면 PD에게 작품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 기자가 오히려 자기 주장을 펼치며 무언가를 고발하고 싶어하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그 기자가 이 작품을 보고 크게 불쾌하거나 기분 나쁜 건 아닌지 싶네요.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를 솔직히 애기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도 아니면 자기가 싫어하는 MBC의 PD가 한방에 크게 뜬 것에 대한 질투심이나 아니꼬움 때문에 그런 건가 싶기도 하구요 ^.^;;
그리고 대자보면 어떻게 고발장이면 어떻습니까.
내용만 좋으면 되지. ^^
저는 오히려 조성현 PD의 관점이나 태도가 보기 좋았습니다.
왜 이런 다큐를 만들게 되었냐고 하니까 자기 가족 가운데도 사이비 종교 피해자가 있다고 했지요.
김도형씨의 아버지가 테러를 당한 모습을 보고 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했구요.
몽롱한 정신으로, 별다른 주제 의식도 없이 이 말 저 말 아무 말이나 하는 기자나 PD보다는
조성현PD가 가지고 있는 주제 의식이나 메시지가 저는 좋습니다.
예술이고 언론이고 별 주제 의식도 없이 그냥 늘 하던대로 적당히 이것저것 기계처럼 찍어내는 것보다
내가 왜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고, 내가 이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가 뚜렷한 게 저는 좋더라구요.
게다가 그것이 사회의 부조리나 인권의 문제를 드러내고 개선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으면 더 좋구요.
챨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주제 의식이 명확한데다 사회 문제를 잘 지적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을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 작품으로 훌륭하게 표현했구요.
물론 노동자로써의 기자가 다른 여느 노동자들이 그러하듯,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매일 같이 생산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비난을 하거나 욕을 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기자도 사람이고 기자도 노동자니까요.
<모던 타임즈>처럼 공장 노동자는 물건을 생산하고, 언론 노동자는 기사를 생산할 뿐인 거지요.
다만 제가 어떤 기자나 기사, PD나 작가를 선호하느냐고 묻는다면 얘기는 조금 다른 거구요.
셰익스피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주제 의식이 뚜렷합니다. <오델로> <맥베스> 같은 작품뿐만 아니라 <한 여름밤의 꿈>같은 작품도 그렇습니다.
주제 의식이 너무 뚜렷해서 누가 보면 뻔한 이야기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과연 몇 사람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놓고 뻔하다고 할까요.
<제네시스 : 세상의 소금>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사진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작품과 삶에 관한 것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작품은 너무 너무 멋집니다.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도 그렇고, 자연과 동물에 관한 작품들도 너무 너무 멋집니다.
게다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너무 좋습니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작품이 단지 시장 사람들의 모습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것이 아니듯이, 세바스티앙 살가도 또한 단지 탄광 노동자의 모습을 찍었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단지 그 대상을 무감각하고 기계적으로 담았다면 그만한 감동이나 전달력은 없었을 겁니다. 똑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작가가 그 대상에 대해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작품은 달라지겠지요.
객관성?
때로 그것은 기자나 작가 자신이 인간과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말을 둘러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쪽으로부터도 좋은 소리 듣고 싶고 저쪽으로부터도 좋은 소리 듣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구요.
객관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면 저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권하고 싶습니다.
모든 기자나 작가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해석하고 종합해서 표현합니다. 단순히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떤 것을 현실이고 사실이라고 볼 것인지,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종합해서 표현할 것인지는 모두 기자나 작가의 관점이나 입장에 달려 있습니다.
제가 <분노의 포도>를 예로 든 것은 어떤 것을 사실로 판단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는 기자나 작가의 관점에 달렸다는 것의 좋은 사례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이다>를 놓고 선정성이나 자극적이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수 있으니까요.
저부터도 깜짝 깜짝 놀라는 장면이 많았으니까요.
화가 고야가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할 때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잘 알려진 작품들도 그렇지만, 그것말고도 당시 전쟁 상황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
차마 다른 사람에게 보라고 하기도 어렵고, 뭐라고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너무 끔직하고 참혹해서...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고야 같은 작가들이 없다면 당시의 일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때의 일을 제대로 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때 전쟁이 있었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지요.
6.25때 북한 인민군이 저희 아버지 사는 마을에 왔었다고 합니다.
그냥 '그때 인민군이 아버지 사는 동네에 왔었지'라는 말만으로는, 그때 동네 사람들이 어떤 느낌을 가졌을지가 잘 전해지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넷플릭스에 <오쇼 라즈니쉬의 문제적 유토피아>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라즈니쉬...아주 오랜만에 들어본 이름입니다. 예전에 저도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더라구요.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 특히 그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 쿵! 했습니다.
아...저런 거였나...싶더라구요.
한동안 아예 잊고 있었던 이름이지만...그래도 한국에서도 라즈니쉬를 좋아했던 사람이 꽤나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게 뭐지 싶더라구요.
아무런 의도가 없는 척, 객관적인 척하면서 대중들의 의식이나 감정을 일정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왜 이런 기사나 작품을 만들었고, 이것을 통해 어떤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독자나 시청자가 판단할 문제니까요.
당연히 창작자가 기본적인 윤리적 태도를 갖춰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거구요.
기본적인 윤리적 태도 위에 자신의 주제 의식을 깔고 그것을 기사나 작품으로 표현하는 거지요.
그러면 저 같은 독자나 시청자는 그것을 보고 들으며 느끼고 생각할 겁니다.
다시 묻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말을 하기도 할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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