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예술과 함께

채은이를 위한 연주

순돌이 아빠^.^ 2023. 5. 5. 10:57

피아노 학원을 오가는 사람은 대부분 초딩들이에요. 피아노 학원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소리 지르며 싸우기도 하고 그래요 ^^

한 방에 들어가 연습을 하고 있으면 수많은 아이들이 오가며 저를 쳐다봐요. 방문의 상당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거든요. 

아예 여럿이서 문 앞에 서서 구경을 하기도 해요. 아저씨가 자기네들 있는 공간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게 신기한가 봐요. ㅋㅋ

처음에는 그렇게 쳐다보는 게 신경 쓰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해요. ^^

Pixabay


하루는 한 아이가 문을 똑똑하는 거에요. 그래서 쳐다봤죠. 그동안 아이들은 그냥 구경만 했지 방에 들어오거나 말을 거는 일은 없었거든요.

무슨 할 말이 있나보다 해서 문을 열었어요. 한 2초가량 그냥 쳐다만 봤죠.

아이 : 저기…
순돌이아빠 : (웃으며) 안녕하세요
아이 : 저기…저 내일 유치원 졸업식 해요

순간 살짝 당황했어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1년 넘게 학원을 다녔지만...저는 제 일만 하는 편이라...방에 들어가자마자 알람 맞춰 놓고, 정한 시간이 끝나면 땡하고 집으로 가는데...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인사도 말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유치원 졸업식을 한다고 하니…

순돌이아빠 : 아…축하해요…어느 초등학교 가요?
아이 : 00초등학교요.
순돌이아빠 : 아! 거기. 축하해요.
아이 : 감사합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쌩~하고 가는 거에요. 

그리고 그날부터는 오며 가며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요. 그러면 저도 웃으며 손을 흔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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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학원 안으로 들어갈 때였어요. 선생님 계시는 그랜드 피아노 주변으로 3명의 아이들이 있더라구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제 앞으로 쑤욱~ 다가오더니 고개를 쳐들어 저를 바라보는 거에요.

순간 살짝 당황했어요. 저번 그 아이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아는 체 하는 것 같기도 하고…하지만 누가 누군지 정확하진 않고...

원래도 모르는 아이들인데다 모두 다같이 키가 작고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정말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어려워요 -.-;;

아무튼 저에게 아는체를 하며 다가올 아이가 걔 밖에 없겠다 싶어서 일단 웃으며 말을 했지요

순돌이아빠 : 1학년 몇 반이에요?

그런데 순간 또 뜻밖에 일이 벌어졌어요. 그 아이 말고 다른 아이들이 고개를 쳐들며 저를 보고는 큰 소리로 대답을 하는 거에요.

아이2 : 저는 2반이요
아이3 : 저는 1반이요
그 아이 : 저도 1반이에요.

아…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샘이 좀 도와주면 좋겠는데…그저 웃고만 있고…-.-;;

순돌이아빠 : 아…축하해요….

2반과 1반인게 축하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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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거에요. 이번엔 키가 조금 더 큰 것 같은 다른 아이에요.

순돌이아빠 : (문을 살짝 열면서) 아…안녕하세요
다른 아이 : 안녕하세요

서로 쳐다보며 잠깐 정적이 흘렀어요. 무슨 할 말이 있으니 문을 두드렸겠다 싶어 제가 기다렸거든요

순돌이아빠 : 혹시…무슨 할 말이라도…
다른 아이 : 아니요. 그런 건 아니구요. 그냥 인사하고 싶어서요
순돌이아빠 : (살짝 당황하며) 아…그래요…반가워요…-.-;;;
다른 아이 : 다음에 만나도 우리 인사하며 지내요.

그 순간 샘이 옆을 지나갔는데 아무 말 없이 그냥 웃기만 하네요. ‘00아 여기서 뭐해?’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순돌이아빠 : 아…인사…그래요…반가워요. 다음에 만나도 우리 인사해요.
다른 아이 : (꾸벅 인사를 하며)안녕히 계세요.
순돌이아빠 :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손도 내밀어 악수를 하며)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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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누가 방문을 똑똑 두드리는 거에요. 고개 들어 보니 첫번째 그 아이의 눈빛이었어요.

창밖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네요. 그래서 저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어요. 평소에는 1, 2초 정도 그러고 나면 지나갔는데 오늘은 계속 손을 흔들며 서 있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문을 열었지요

순돌이아빠 : 안녕하세요
그 아이 : 안녕하세요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어 잠깐 기다렸어요. 그런데 아무말 없이 그냥 쳐다만보고 있는 거에요. 아…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순돌이아빠 :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아…이름이 뭐에요?
그 아이 : 채은이요
순돌이아빠 : 아! 채은이
채은 : 네
순돌이아빠 :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학교는 재미있어요?
채은 : 아니요
순돌이아빠 : 재미 없구나…

그리고 또 잠깐 정적이…아…주여…저를 구원하소서~~~

채은 : (피아노를 가리키며) 지금 치고 있는 거 뭐에요?
순돌이아빠 : 쇼팽의 녹턴 2번이에요
채은 : 듣기 좋아요
순돌이아빠 : 아…듣기 좋아요?
채은 : 네
순돌이아빠 : 그럼 채은이를 위해서 제가 연주를 해줄까요?
채은 : 네
순돌이아빠 : 그럼 들어와서 여기 의자가 있으니까 앉아요

피아노 학원을 구경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보통 연습실이란 게 피아노 하나와 의자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그런 구조에요.

그런데 제가 쓰던 연습실은 공간이 좀 큰 편이어서 탁자와 의자가 따로 있거든요.

채은이를 의자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쳤지요. 그런데 곡이 끝나기도 전에 채은이 벌떡 일어나는 거에요

채은 : 듣기 좋아요.
순돌이아빠 : 듣기 좋았다니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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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이가 일어서길래 이제 가는 줄 알고 다시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채은이가 나갔어요. 그런데…

금새 다시 오더니 또 문앞에서 저를 쳐다보는 거에요. 그래서 문을 열었더니 손에 악보책을 하나 들고 말도 없이 서 있더라구요.

도대체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요? 제가 연습하는 걸 보고 싶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연습을 하지 말고 자기를 쳐다보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있는 게 취미인 걸까요... ㅜㅜ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앱 같은 건 없는지...

순돌이아빠 : (책을 가리키며) 채은이가 치는 거에요?
채은 : 네
순돌이아빠 : 제가 봐도 돼요?
채은 : 네

책을 받아서 그냥 아무데나 펼치며 피아노에 올렸어요.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한 부분을 편곡한 거네요. 그냥 별 생각없이 쳐봤어요. 

채은이 책 ^^

원곡에 비하면 훨씬 단순한 곡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뭉클하더라구요.

참 신기해요. 이 단순한 음들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이리 움직일 수 있다니…라는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채은이는 자기 책을 챙겨서 휙~~~ 하니 아무 말 없이 가버렸어요.

제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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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은이는 불쑥 찾아왔다 불쑥 가버렸지만 언젠가 또 똑똑 방문을 두드리겠지요. 창 밖에서 웃으며 손을 흔들고 지나갈 거구요.

아니면 어느 순간 작은 아이가 불쑥 제 앞에 다가와서는 고개를 쳐들고 빤히 쳐다볼테구요. 인삿말도 없이 그냥 쳐다만 보는 거에요. 그러면 저는 또 갑자기 당황해서 어~어~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구요.

그렇게 우리는 00음악원의 피아노 친구로 살아갈 거에요.

채은이의 밝은 웃음만큼 아이의 삶도 기쁨과 환희로 가득차면 좋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