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예술과 함께

구자범, <베토벤-교향곡 9번> 연주를 듣고

순돌이 아빠^.^ 2023. 5. 11. 08:22

제가 살면서 ‘이곡이 이런 곡이었어?’라는 생각을 했던 때가 크게 3번 있습니다. 

첫번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입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어서 라디오에도 자주 나오고, 연주회장에서도 심심찮게 연주합니다. 콘서트홀에서 이곡 연주를 들으면서도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https://youtu.be/uT_ZhhQeudY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러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를 듣고 ‘어? 이곡이 이런 곡이었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보지도 않은 러시아의 넓은 평원이 제 앞에 그림처럼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직접 연주를 들을 수는 없고 음원으로 듣는데도, 다른 사람의 연주를 직접 들을 때보다 더욱 생동감이 느껴지더라구요.   

 

두번째는 베르디의 레퀴엠입니다. 

이유는 똑같습니다. 그 전에 다른 연주회에 갔을 때는 별 느낌이 안 들더라구요. 그러다 2018년 4월3일, "섬의 아픔을 뭍이 기억하다" 제주 4.3사건 70주년 추념 음악회에서 이 곡을 듣고는 정말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https://youtu.be/w4CFOcMChpw

구자범, 베르디, 레퀴엠

이때의 지휘자가 구자범이었습니다. 저는 관객석 맨 앞에 앞에서 지휘자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지요 ^^

전체곡이 완전 색다르게 느껴진 것은 물론이고, ‘분노의 날’ 부분에서는 정말 숨이 막히더라구요.

인터넷으로 그때의 영상을 다시 봐도 심장이 쿵쾅거립니다.

역시 ‘분노의 날’ 같은 부분을 f로 강하게 표현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극적 효과를 높이는 것만으로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네요. 

저의 피아노샘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f라고 해서 건반을 세게 때리기만 해서는 안되요. 힘을 주기는주되 그 깊이와 울림이 있어야 해요.

 

세번째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입니다. 이번에 들은 곡이지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연주회도 여러번 갔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리고 그랬지요.

https://youtu.be/jl4mW2Mc9is

푸르크벵글러,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회가 끝나고 집에 오면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다시 듣기도 했습니다. 감동의 여운이 남아서기도 하고, 뭔가 늘 부족하고 아쉬운 느낌이 남아서입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베토벤의 곡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베토벤의 곡에 대한 연주의 아쉬움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뭔가 모르게 이 곡에 대한 표현으로는 살짝 부족한 어떤 것이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이번에 구자범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듣고 나니 ‘어? 이곡이 이런 곡이었어?’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https://youtu.be/AWHoAFLPgLE

혁명과 혁신

대부분의 연주회를 가면 간단한 연주 해설 전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곡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담긴 책자를 받았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 혁명정신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선 ‘세계 시민’에 관한 것이고 ‘인간 보편’에 관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나이를 먹어도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지지하며 자유를 열망했다.

왜 하필 이 때일까.

베토벤이 작곡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나폴레옹 실각후 비인체제와 메테르니히를 거쳐 유럽사회가 다시 보수 반동세력에 의해 완전히 혁명 이전으로 후퇴하고 있을 때였다.

베토벤은 이 혁명정신이 소멸하는 세상의 퇴보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펜을 꺼내 든 것이리라. - 책자 12쪽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이번 연주를 들으며 2가지 혁명이 떠올랐습니다. 

첫째 혁명은 이 곡이 그 자체로 혁명적이라는 겁니다.

두번째 혁명은 이 곡이 전하는 메세지가 혁명적이라는 겁니다. 합창 부분의 가사를 빼더라도 혁명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합창의 가사는 그 메세지를 더욱 또렷하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2가지가 혁신적이었습니다.

첫째 혁신은 곡의 연주가 혁신적이었습니다. 

1악장을 시작하자마자 벌써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려하더라구요.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2악장을 시작하자마자 또 똑같은 기분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느꼈습니다. 제가 그동안 들었던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와는 많이 다른 연주라고.

pixabay

악기별 색채감이 뚜렷했습니다. 봄날 공원에 이런 저런 꽃들이 피어 있는데 하얀꽃 노란꽃 붉은꽃 등등이 제 색깔마다 예쁘듯이 말입니다. 

저의 피아노샘이 늘 하는 말이 있거든요.

한음만 연주를 하든 화음으로 여러 음을 연주를 하든 한 음 한 음이 다 살아 있어야 해요.

악장별로도 그 의미 전달이 뚜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얼른 알겠더라구요. 입안에서 우물우물 하는 말이 아니라 또렷한 발음으로 제 귀에다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약한 소리에서 강한 소리로 오고 가는 셈여림의 변화가 뚜렷하니 더욱 좋았다는 말도 하고 싶네요.

4명의 솔리스트가 무대의 한 쪽 옆에 서서 노래하는 것도 색달랐습니다. 다른 공연들에서는 보통 솔리스트가 무대의 앞쪽에서 서서 노래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지휘자에게 물어보고 싶네요. ^^

kbs

두번째 혁신은 합창의 노랫말을 우리말로 했다는 겁니다. 

다른 연주회에서는 주로 한글로 자막을 띄우고 합창단이 독일어로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자막을 보지 않게 되더라구요.

왜냐하면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기도 하고, 또 그 내용이 애매하기도 해서요. 

그런데 이번에 우리말로 노래를 하니 그 의미 전달이 더욱 확실하게 되더라구요.

노래를 듣는데 눈물이 자꾸 나서 눈물을 닦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노래와 함께 지나가는 우리말 자막을 놓칠까봐서.

새롭게 번역을 하고 노래를 하신 분들께 정말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bbc

이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거에요. 늘 독일어로 노래하던 것을 우리말로 한다니…살짝이라도 잘못하면 욕 먹기 딱 좋잖아요 ^^;;

게다가 그 노랫말 내용이 그야말로…아…앞의 책자에 나왔던 말로 하자면 ‘보수 반동세력’이 들으면 까무라칠 내용입니다. 

자유, 삶의 참 빛이여! 하늘 고운 님이여!

우리 가슴 불에 취해 그 빛 따르나이다.

부드러운 그대 품에 억센 사슬 깨어져,

모든 사람 형제되는 큰 뜻 이뤄지이다! - 책자 30쪽

노조탄압에 맞서 항거하며 산화한 양회동 열사 추모 촛불문화제&nbsp; 개최. 노동과 세계

예를 들어, 미얀마의 군부 세력 앞에서 또는 아프가니스탄 탈리반 앞에서 이런 곡을 연주하고 이런 노래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니면 윤석열, 김건희 앞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나 건설 노조원들이 이런 곡을 연주하고 노래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물론 윤석열이나 김건희 앞에서 그런 연주를 할 일도 없을테고, 설사 연주를 한다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졸고 있겠지만.

자유와 자유

윤석열이 좋아하는 말이 자유지요. 그런데 억압받지 않고 족쇄를 차지 않은, 적어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같은 입장에 서려는 마음이 없는 자가 말하는 자유는 그저 공허한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밤이 새도록 4차까지 달리며 진탕 술과 안주를 먹고 나서는 ‘나는 아직 술이 고프다’라며 한잔 더 하자고 소리치는 것과 비슷하지요.

ytn

억눌리기 때문에 일어서고 싶은 것이고, 유무형의 무언가에 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에 자유롭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노예들이, 여성들이, 노동자들이 자유를 외치고, 자유를 부르짖고, 자유로운 새처럼 날고 싶어 하는 거구요. 

술에 잔뜩 취하고서도 한잔 더 하자고 소리치는 것과는 달리, 억압받는 이들이 외치는 자유에는 가슴 떨리는 맺힘의 소리가 있는 겁니다.

mbc

이란의 여성들이 머리카락을 자르고, 미국의 흑인들이 손을 잡고 행진을 하는데는 간절한 자유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약하다고 힘이 없다고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숨죽이고 쥐죽은 듯이 사는 게 아니지요. 약하니까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거고 힘이 없으니까 악이라도 쓰는 거지요. 

저의 피아노샘이 늘 하는 말이 있어요.

p라고 약하게 소리를 낸다고 그냥 대강 대강 흐물흐물 거리면 안돼요. 약해도 단단한 소리여야 해요. 약할수록 더욱 또렷하게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도록...그래서 때로는 강한 소리보다 약한 소리가 더욱 표현하기 어려운 거에요.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이번 공연 연습을 하며 구자범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4박자 노래 할 때 강-약-중강-약을 생각하며 행진곡처럼 강박만 강조하지 마세요. 약자보호법! 오히려 약박에 있는 음표들 중에서도 가장 짧고 여린 음표에 더 정성을 기울이고 배려하세요.” - 우리말로 ‘베토벤 9번 합창’…“‘환희’를 ‘자유’로, ‘울림’ 넘어 ‘어울림’”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088960.html

구자범 지휘자가 지난 12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 강남새사람교회에서 합창단 연습을 지휘하고 있다. - 한겨레

자유라는 것은 말하기 쉬워도 그것을 얻기는 어려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혼자만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자유를 외치는 거지요. 

참된 벗을 맺어낸 자, 이제 여기 서리니,

사랑할 줄 아는 자면, 모두 함께할지라. - 책자 32쪽

https://youtu.be/8fob9cwjusA

안치환, 자유

정신으로써의 음악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개인으로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보여 주시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를 원하시기에 하느님은 그들 모두에게 공동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 주시는 겁니다.

이제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을 자기들이 이기심으로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사랑으로만 살아갑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열린책들, 252쪽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겠지요. 또한 사랑하기에 함께 하는 것일테구요.

사랑해서 함께 하니 동지가 되고 벗이 되고, 형제와 자매가 되는 것이겠지요.

음악은 무서운걸세. 왜인줄 아나? / 불멸의 연인

베토벤이 어떤 마음으로 교향곡 9번을 작곡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저 연주를 통해 저만의 느낌을 가질 뿐이지요.

그리고 만약 제가 베토벤이라면, 그래서 제가 교향곡 9번을 연주한다면 이번에 들은 연주를 닮아가려 했을 겁니다.

연주를 통해 음표를 표현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음과 곡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나타내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작곡자의 감정을 느껴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어 / 불멸의 연인

그리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교향곡 9번을 지휘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던 베토벤의 마음도 저와 닮았기를 상상해 봅니다.

그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정말로 ‘이런 소리가 아니고, 참 목소리를 내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 정신성을 보여주려 그는 무대에 섰고, 소리가 아닌 얼을 지휘했다. - 책자 42쪽

음악은 작곡자의 정신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 불멸의 연인

어떤 것이 훌륭한 음악이고, 어떤 연주가 좋은 연주인지 저는 모릅니다. 각자의 취향이나 선호가 있을 뿐이겠지요.

그리고 누군가에는 어떤 곡이, 어떤 연주가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할 겁니다. 

특히 클래식 음악이 예쁘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고, 힘차고 격정적일뿐만 아니라 자유와 혁명을 노래한다면 더욱 부담스럽겠지요.

예를 들어 이번 공연처럼 팀파니 소리가 도드라지게 들리거나, 금관악기들이 빵빵 울리면 누군가에게는 어색하고 무언가 균형이 깨어진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pixabay

제가 이번 공연을 다 듣고 나오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팀파니스트에게 밥이라도 한번 사고 싶네

누군가에는 부담스럽고 균형이 깨어진 것 같은 그 소리가 저는 오히려 더 좋더라구요. 뭐랄까…좀 더 격정적이고 열정이랄까…

어쨌거나 혁명이든 변화든 기존의 틀을 깨트리는 것이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eQOMsLmzJ8c&t=1948s

므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만약 누군가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연주를 처음 들었다 하지요. 그럼 어쩌면…이럴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도 클래식 음악이야? 아니 이런 것도 음악이야? 이게 도대체 뭐지?

음악을 듣는데 무지 혼란스럽고 흥분되고 그럴지도 모르구요

중앙일보

김건희 같은 부류의 인물은 빅토르 위고나 장발장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떠벌리겠지만 <레미제라블> 속에 나오는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는 저항과 혁명에 관한 이야기에는 쭈뼛 거리겠지요.

부르주아나 귀족적인 고상한 문화 생활을 추구하는 이들,
그들에게 또는 그들이 누리던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 환경에 도전하는 듯한 곡이 콘서트홀에 울려 퍼질 때는 많이 불편할 겁니다. 

음악을 들으며 고상한 척 해야 하는데 그 연주가 자신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면 더욱 그럴 거구요. 

https://youtu.be/TX9UtBij_t8

민중의 노래 - 레미제라블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모두 좋아하는 것은 아니구요.

처음에는 겨우 몇몇 사람이 그 새로움을 반기고 그 신선한 떨림을 즐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흐르면 낯설고 어색했던 그것이 점점 인간의 정신 속에 스며들지도 모르지요.

새로운 예술이 새로운 정신을 만들고, 새로운 정신이 또다른 새로운 예술을 창조할 수도 있을 거구요.

https://youtu.be/SK75WCcUDkM

Borodin Quartet, Beethoven, String Quartet Op.132

 

천재의 작품이 금새 찬탄 받기 어려운 까닭은 그것을 쓴 천재 자신은 비범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와 비슷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작품 자체가 작품을 이해할 줄 아는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를 만들어내어, 그것을 길러내고 부풀린다. 

50년의 세월을 걸쳐 베토벤의 사중주곡(제12.13.14.15번)을 이해하는 대중을 낳고 기른 것은 베토벤의 사중주곡 자체이며, 그것은 모든 걸작과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가치, 아니 적어도 자식인 사회에 진보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그것은 걸작이 맨 처음 세상에 발표되었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늘날 그것을 애호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널리 구성되어 있다. - 마르세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동서문화사, 2014년, 610쪽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