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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마사아키, <전쟁과 죄책>을 읽고

순돌이 아빠^.^ 2023. 11. 16. 23:11

책을 읽다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 이 책을 읽겠다면 내 돈을 주고라도 사주고 싶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싶은 거지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과 죄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에 참여 했던 일본군의 심리를 다룬 책입니다. 심리를 다루고 있으니 당연히 그때 어떤 짓을 했는지도 나오겠지요.

그리고 그들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를 잠깐 읽는데도…힘이 듭니다. 

아…인간이 정말…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몇몇 사례를 비춰보면 일본보다 더 악독하고 잔인한 짓을 벌인 집단이나 국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도저히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짓을 너무나 많이 저질렀습니다. 인간이 이보다 더 잔인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싶습니다. 

연합뉴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가도 그렇고, 거기에 참여했던 많은 군인들도 그렇구요.

되레 큰 소리치거나 진실을 감추는 것도 모자라, 거짓말을 하고 악행을 부정하지요. 

저들은 왜 저럴까요?

일본인들은 어떤 심리를 가졌기에 저런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저런 짓을 저지르고 나서도 반성하지 않는 걸까요. 

그 가운데 아주 소수의 옛 군인들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서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게 된 걸까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에 참여했던 독일군의 한 모습을 보여줬다면, <전쟁과 죄책>은 중국인 학살에 참여했던 일본군의 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군. the guardian

무거운 내용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누군가 다시 이런 일을 벌이고 싶어하면 모두 나서 막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계속 생각하며 노력해야할 내용이구요. 

노다 마사아키, <전쟁과 죄책>, 또다른우주

“오후 1시부터 수술 연습을 한다. 전원 해부실로 모이도록”
유아사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이미 도쿄지케이카이의대 재학 시절 “군의관은 생체 해부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왼쪽 구석에 두 사람의 농민이 손을 뒤로 묶인 채 서 있었다. 

니시무라 병원장이 “자 시작할까?”하고 신호를 보냈다. 위생병이 체격이 좋은 남자를 총 끝으로 찌르자, 그는 유유히 걸어서 스스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런데 또 한 사람, 궁상맞아 보이는 남자 쪽은 비명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총검을 든 위생병이 끌어내려 하면 할수록, 남자는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 35

유아사에게는 곧 생체 해부당할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상상할 만한 지성이 없었다. 수술 연습의 대상인 두 사람은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유아사 중위가 생각할 수 있는 인간관계란, 동료 의사와의 상호관계뿐이었다. 죽임을 당하는 중국인과의 인간으로서의 관계가 아니었다. - 37

군의관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한 수술 재료로 살아있는 사람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시의 청년의사 유아사는 한 인간으로서 상처 입지 않았다. - 43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었던 일본군 출신들을 많이 만나왔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 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리적인 죄의식이 없는 데다, 중국 쪽에 기대려는 어리광 같은 심리마저 있었다. 죄라고 자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죄라고는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많은 중국인을 학살했으니까 자신도 죽임을 당할 것으로 생각할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 50

이즈음엔 유아사도 앞서 숨겼던 사실을 포함해 이미 모든 죄상을 고백한 상태였다. 위생 보충병의 교육을 위해 생체 해부했던 남자의 어머니가 쓴 편지를 받았을 때, 드디어 자신이 죽인 남자가 단순한 생체 해부의 희생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사는 한 사람의 인간임을 깨닫게 되자,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어머니는 중국어로 이렇게 썼다.

유아사, 나는 네가 죽인 남자의 어머니다.
죽기 전날, 아들은 루안의 헌병대로 끌려갔다. 나는 헌병대까지 가서 문 앞에서 쭉 지키고 서 있었다. 다음날,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아들이 묶인 채 트럭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다음날, 아는 사람 하나가 와서 가르쳐 줬다. “할머니, 당신 아들은 육군병원에 끌려가서 생체 해부당했어요”라고. 나는 슬프고 슬퍼서, 눈물로 눈이 짓물러버릴 것 같았다. 그때까지 갈던 논도 못 갈게 됐다. 식사도 할 수 없었다.
유아사, 지금 네가 잡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부디 엄벌로 너를 다스려달라고 정부에 부탁한 참이다.  - 55

그런데 그 어머니의 편지로 인해, 그 남자가 갑자기 하나의 인격체로 떠올랐다. - 56

유아사는 고독한 대화를 거듭하던 끝에 희생자의 어머니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희생자를 물건에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됐다. - 60

유아사는 과거의 행위를 계속해서 자신의 문제로 의식해 왔다. ‘시켜서 한 일이다, 모두가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한, 결국은 자신의 인생도 없었던 것이 된다.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에 고정된, 단순히 집단 속의 한 사람으로 살다 가는 것이 돼버린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다 자신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그 의미를 되묻는 것만이 자신의 한 번뿐인 삶을 되찾는 방법이다. 그것이 유아사가 보낸 패전 후의 나날이었다. - 63

오가와는 강한 척하는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나약함을 줄곧 보아왔다. 만주사변 직후 펑텐에서 경비를 서던 학생들의 공포심과 그것을 견디다 못한 살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의 초년병 교육 시절, 인격이 퇴행하여 죽음에 빨려들어 가던 병사들의 모습, 스자좡병원과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말라비틀어지고 왜소하게 오그라들어 죽어가던 병사들, 혹은 자살하는 병사, 그들은 약탈 전쟁에 적응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망죄로 총살당하기 직전의 병사들. - 125

1981년, 베이징의 수도교회에서 평화를 위한 중일 합동예배가 열렸다. 오가와는 격려 인사를 부탁받았다. 그는 중국어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냥 ‘사과하고 용서합시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베이징 땅에서, 제 눈앞에서 구덩이를 파고 목이 베어져 죽어간 중국인들을 보았습니다. 목이 잘리는 순간에도 그 사람들이 그대로 죽을 수 없어 ‘일본 살인마’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저는 공범자입니다. 

이것을 죽으러 간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이다. - 127

시대와 상황이 강제한 살인이라는 변명을 넘어서 한 개인으로서 죄의 자각에 이른 삶은 없었을까? 만약에 있다면, 어떤 경로를 거쳤을까? - 132

고지마 부대가 저지른 잔학행위는 일일이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당시 고지마는 그러한 하나하나의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의 나날 중에 겪는 일상다반사일 뿐이었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하나하나의 일들에 ‘희생자’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138

농민을 찔러 죽이고 목을 베고 고문한 것이 범죄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아닌 포로를 죽였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지요…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죄는 죄인데요, 하지만 당시 우리가 받은 교육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전쟁일 뿐이었으니까요.” - 150

딱딱한 변명의 갑옷을 두르고 웅크리고 있는 수인들에게 중국쪽이 취한 방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는 것…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지금 당장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관리소 측은 중국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전쟁 피해가 얼마만큼 지속되고 있는지 등의 외부의 사실을 알리는 방법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충분한 보살핌이었다. 

자신이 한 짓은 둘째치고라도,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의 동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고지마는 겨우겨우 깨달아갔다. 지금까지 그는 ‘단칼에 벤다’ 따위의 허세에 찬 말투나, ‘처리한다’ 따위의,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군대용어를 사용해왔다. 그런 그에게도 어렴풋이 슬퍼하는 사람들의 군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 151~152

중국으로 이송된 지 5년이 지난 1955년, 피수용자의 인죄는 대부분 끝났다. 새해를 맞아 전범들은 합창이나 연주 같은 문화 활동의 하나로 ‘전쟁과 평화’라는 연극을 공연했다. - 168

전범들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단 그것은 즉흥극이 아니라 다수가 준비한 본격적인 연극이었다. 그들은 중국 농가 세트를 만들고, 농가 여성의 가발을 만드는 과정에서, 중국에 파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대 시절의 자신들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출발점으로 돌아가, 지울 수 없는 부도덕한 행위를 재연함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자신을 되찾으려 했다.

다른 가능성이란, 고문당해 죽어가는 인간의 고통을 느끼는 자신이다. 중국에 파병되어 농민들을 집단으로 찔러 죽이면서 이들은 인간에서 살인마로 변했다. - 170~171

그는 끊임없이 공격성을 강화하고 그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정신을 경직시켰던 근대 일본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아직 마음에 상처 입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고지마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는 남성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공상을 배제한다. 그것은 근대 일본의 교육이 추구한 바이다. 또한 시대가 전쟁을 수행할 실무자를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188

도미나가도 눈가리개를 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상대의 얼굴이 떠오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하 감방에 들어가 일본군에게 죽어간 중국인 포로의 피를 토해 놓은 듯한 낙서를 보았을 때, 그동안 질서정연하게 집단에 적응해 살아온 자세는 무너져갔다. 상대는 패배자 일반이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는 인간, 가족이 있고 사회관계 속에서 사는,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 바뀌었다. 그가 억제해왔던 상상력이 되살아났다. - 225~226

“우리 스물두 명이 포로의 목을 벴을 때, 단 한 사람도 반항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초년병에게 이 목 베기를 시켰을 때, 우리 중대는 아니었지만 한 사람이 거부했습니다. 승려 한 명이 ‘볼교도로서 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부했어요. 참 훌륭하다고 생각했지요…그 승려는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진급은 늦었을 겁니다.” - 226~227

그 불교도는 상등병이 될 수 없는 것 이상의 생사가 걸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것을 각오하고 그는 불교의 5계 중 첫번째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지키려 했다. - 228

쓰치야는 전쟁범죄를 사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에게 가르침을 준다. 사죄한다는 것은, 단순히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안 그러겠습니다’ 하며 고개 숙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왜 잔학한 행위를 했는지 분석하고, 그것을 피해자에게 말하고, 나아가 어떻게 그 죄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전하는 것이다. 용서는, 분석과 얘기와 삶 속에서만 구할 수 있다. - 324

형은 근위병이었다. 근위병은 궁성을 지키는 일왕 직속 군대이며, 가족을 조사한 후 선발한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 산촌에서 무럭무럭 자란 오노시타는 ‘전쟁이란 일본의 군대와 중국의 군대가 격렬하게 싸워 이긴 쪽이 여러 가지 요구를 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확약을 하게 한 뒤 종전에 이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고 마을 어른들도 그렇게 말했으며, 신문이나 라디오도 그렇게 전했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본 전쟁은 식량도 제대로 배급받지 못하고, 마을들을 습격해 강도, 방화, 강간을 저지르는 집단적인 난동에 불과했다. 더구나 3년이 지나도 병장이 되지 못하는 상등병들이 그 울적함을 달래려 살인을 했다. 그들은 주둔지의 위안소와는 달리 마을에서는 공짜로 여자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타락한 무리였다. - 375

오노시카가 얘기한, 사역에 동원돼 죽어간 덩치 큰 남자, 강간당한 자매와 소녀, 북베트남에서 주먹밥을 손에 들고 죽은 아이, 그리고 그가 죽인 네그로스섬의 남자, 모두가 오노시카의 눈에는 다 제대로 된 표정을 갖고 있으며, 고민이 있는 온전한 인간이었지 죽임을 당하는 ‘물건’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 - 391

쓰치야는 1934년 4월, 출정한 지 2년 4개월 만에 관동헌병대 치치하얼 헌병분소의 헌병이 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동부 국경의 도시, 평양진에 파견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고문을 실습한다. 
그는 “이 도시로 장을 보러 왔다”는 농민을 연행해 오장의 지도로 폭행했다. 나무 몽둥이로 두드려 패고 난 뒤, 손을 뒤로 묶어 매달고 그 상태에서 돌을 매달아 어깨 관절에 통증을 가했다.

물고문을 할 때는 음식도 물도 주지 않고 남자를 발가벗겨 천장을 향해 긴 의자에 눕게 한 뒤 의자에 묶는다. 그리고 커다란 주전자로 입과 코에 쉬지 않고 물을 부었다. 

기절한 남자를 고문한다고 자백할 리 없지만, 몇 번이나 반복했다. - 332~333

3일간 계속한 물고문으로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갔다. 이틀 후 다른 헌병이 다시 물고문하다 죽이고 말았다. 평양진에서 첫 고문 실습을 할 때 ‘벌 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이때는 물고문을 멈춰야 하는 극한을 터득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몸이 차게 식는 상태, 가쁜 숨소리, 가슴과 배의 부풀어 오른 상태를 보고 판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문이 잔혹하다는 느낌은 사라지고, 그것도 하나의 기술이 되어갔다. - 335

구라하시가 잔뜩 구겨진 종이쪽지를 아버지로부터 건네받은 것은, 아버지가 식도암으로 돌아가시기 1주일 전이었다. 

“내가 죽으면 이것을 묘비에 새겨다오. 잊지 말고 부탁한다”

구舊 군대 근무 12년 8개월
그동안 10년을 중국 주둔 육군 하급간부(전 헌병 준위)로서 톈진, 베이징, 산시성의 린펀과 윈청, 구 만주 둥닝 등의 헌병대에서 근무했다. 침략전쟁에 참가.
중국 인민에게 했던 행위는 죄송스럽고, 오로지 사죄하는 바입니다. - 398 

국가가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하려 하지 않을 때, 아버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사죄했다. 일흔한 살의 생애를 전쟁에 대한 사죄로 마무리함으로써, ‘시켜서 한 전쟁’에서 ‘스스로 한 전쟁’으로 바꿔냈다. 그것은 ‘시키는 대로 하는 인간’으로 자라났지만, 죽을 때는 ‘스스로 하는 인간’, 비판하고 행동의 책임을 지는 인간으로 죽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 413

또 하나의 물음은,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받았을 때 거부할 만큼 강할 수 있을까 하는, 앞 장에서 다룬 구라하시와 같은 의문이었다. - 432

이렇게 적다 보니, 일본군대의 강함이란 말 그대로 불사신의 강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체는 상처 입어도 마음은 상처 입지 않는 불사(不死), 즉 감정 마비의 강함이다. 또 그것은 앞서 진중일지에서 본 것처럼, 일말의 감상으로 감성을 내비친 자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감정 마비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감정 마비는 전후의 일본인에게 지속되고 있다. - 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