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영화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볼리우드 식의 화려한 춤과 노래입니다. 샤룩 칸 같은 인기 배우들도 떠오르구요.
넷플릭스와 같은 서비스가 생기기 전에는 제가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인도 영화가 그런 작품들이었습니다.
넷플릭스가 생기고 나서 좋은 점 하나는 훠~~~얼씬 다양한 인도 영화나 드라마를 접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화려한 춤과 노래는 없지만 진지하고 묵직하게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작품이 많습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사건을 배경으로 한 <델리 크라임> <아론녹>이나 인도의 계급과 빈곤의 문제를 다룬 <화이트 타이거> 같은 작품이 그렇지요. 모두 재미있기도 하고, 여러가지를 생각케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번에 본 <카키 - 비하르 챕터>도 재미 있었습니다.
드라마의 배경은 인도, 인도 가운데서 더 가난하고 범죄가 많다는 비하르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아미트가 이곳으로 발령을 받아 처음 해결한 일이 선로에 앉아 기차를 멈춰 세운 동네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민들은 말합니다. 나쁜 놈들이 마을 사람들을 죽여도 경찰이고 정부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편지를 쓰고 탄원을 해봐도 소용없다는 거지요.
이렇게 기차라도 막으니 그나마 경찰이라도 나와 본다는 겁니다.
정말 있을 법한 일입니다. 전기도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 낮은 카스트에 속하면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별로 힘을 못 쓰는 사람들에게는 정부의 보호나 치안이라는 것은 저기 어디 별나라의 얘기인 셈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도 말을 해보고 저렇게도 사정을 해봐도 안되니까 기차라도 막아선 겁니다.
합법이나 불법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인간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는 거지요.
살인. 심리
<카키>가 경찰이 범죄자를 잡는 영화이긴한데, 그 속에 담겨 있는 사회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참 씁쓸하게 합니다.
<화이트 타이거>에도 표현되었고, <카키>에도 계속 나오는 게 카스트 문제입니다. 카스트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고,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제한되고, 정당이나 사회적 관계가 결정되다 보면 당연히 낮은 카스트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겠지요.
찬단은 살인자이고 범죄자입니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아 왔든 그것이 그가 저지른 일들의 변명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그가 어떤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수는 있을 겁니다.
자신의 죄를 부정하던 찬단이 경찰 아미트의 설득으로 결국에는 형과 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미트 : 찬단, 분노와 복수라는 건 말이야.
사람을 속에서부터 태워.
조용히 네 벌을 받아들이는 게 너한테 좋을 거야.
찬단 : 난 여태껏 전부 받아 들였어
카스트를 비하하는 욕을 먹는 것도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서 아내가 날 버린 사실도
아브니씨의 부하들이 날 쥐어패던 것도
아뷰다이 싱한테 맞던 것도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를 떠나 찬단의 마음 속에는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카스트가 낮아서 모욕당했고, 자기가 가진 게 없어서 아내는 떠나버리고, 이놈한테 맞고 저놈한테 맞고,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뒤집어 써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겠지요. 억울하고 화나고 슬프지만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그리고 어쩌다 범죄와 연관 되고, 조금씩 힘을 얻게 되고,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고, 돈을 거둬들이고 하면서 점점 더 힘을 키워갔을 거구요.
예전에는 자기가 머리를 굽히고 네 네 해야 했고, 다리를 굽혀 상대의 발에 손을 대야 했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굽히고, 헤헤 거리며 굽신거립니다. 이 자식, 저 자식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찬단님, 찬단씨 하면서도 존칭을 쓰지요. 조직원은 형님 형님 하면서 자신의 명령에 따라 무슨 일이든 합니다.
<카키>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은 찬단의 패거리들이 총을 들고 마을 사람 수십명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찬단이 그동안 당했던 일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가지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아주 엉뚱한 곳에 분노를 하고 복수심을 드러낸 겁니다.
피해자들은 찬단이 그동안 당했던 일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찬단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뺨을 때린 것도 아니고, 발길질을 한 것도 아닙니다.
찬단이 그동안 겪었던 일에 대한 반발로 누군가를 죽이고 때리고, 밟고 올라서고 소리지르고 싶었을 수는 있지만 그 상대방은 가해자가 아니라 아예 관계 없는 사람들인 거지요.
2023년 11월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한창 죽이고 있습니다. 찬단은 수십명을 죽였고, 이스라엘은 한달여동안 1만3천명 가량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범죄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 얘기를 꺼냅니다.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겪었으니, 우리가 하는 행동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런 주장으로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할 수 있다면 찬단도 이렇게 말하면 될 겁니다.
그래 내가 사람들을 죽인 건 맞아. 그런데 그렇게 된 건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세상 사람들이 날 모욕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되갚아 준 거라고.
홀로코스트는 유럽의 독일이 가해자입니다. 아시아의 아랍인들은 홀로코스트의 가해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는 1945년 이전에 일어난 일이고, 지금 이스라엘이 죽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이들 수천명은 2000년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관계가 있을래야 있을 게 없는 겁니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인종적으로도 아무런 관계 없는 아이들을 죽이면서 과거의 불행했던 사건을 끄집어내는 거지요.
직접적인 가해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을 죽이면서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불행을 정당화의 도구로 삼고 있는 것뿐입니다.
찬단도 그렇게 변명하고 정당화하고 싶을 거구요.
살인. 보여주기
찬단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에는 ‘보여주기’도 있을 겁니다. 사람을 죽임으로써,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종하려는 거지요.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면 너도 죽을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라. 내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라.
살인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의 복종을 요구하는 겁니다. 거역하거나 저항하지 말라는 거지요.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때려잡기 위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마치 악마를 무찌르기 위한 정의의 군대인양 하지요.
하지만 그렇게 죽어간 수천명의 아이들이 하마스 대원들입니까?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아이들이고 여성들이고, 병원이고 학교고 여기저기 폭탄을 쏟아붓고 사람들을 죽이는 걸까요?
거기에 저는 찬단과 이스라엘이 가진 비슷한 심리 상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한테 덤비면 이렇게 된다, 나는 아이고 여자고 다 죽일 수 있다, 까불지 마라,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라, 니들이 10으로 덤비면 나는 10,000으로 갚아주겠다.
범죄자들이 살인을 통해 보복하고, 살인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요구를 전달합니다. 복종하라는 거지요. 폭력과 살인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심리와 행동을 조종하려는 겁니다.
차이라면 찬단의 무리는 AK-47 총을 들고 살인을 한다면, 이스라엘은 총은 물론이고 전투와 탱크, 화학 무기까지 동원해더 훨씬 큰 규모의 살인을 저지른다는 거지요.
그리고 찬단은 아미트를 비롯한 경찰들에게 잡혀서 살인을 멈추기 되었지만, 현재로써는 이스라엘의 살인을 직접적으로 막을 힘과 의지를 가진 세력이 없다는 거구요.
제가 이 드라마를 보고 살인자가 체포되어 정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 씁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찬단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심리와 사회의 어두운 면
그리고 찬단의 행동을 통해 떠오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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