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들레 :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358
5월의 광주, 5월의 가자
-제노사이드와 팔레스타인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도 콜럼버스가 바하마 군도에서 보여준 것과 비슷한 약탈이 일찌감치 시작됐다...인디언을 노예로 만들지도 못하고 같이 공존할 수도 없었던 영국인들은 인디언을 절멸시키기로 결심했다…청교도들은 또한 성경 시편 2장 8절의 구절에 호소했다. “내게 청하여라. 뭇 나라를 유산으로 주겠다.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의 소유가 되게 하겠다.” - 하워드 진, 「미국민중사」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들을 죽이고 내쫓던 과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서부 개척’이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던 역사도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저 비극적인 인종청소일 뿐입니다.
나크바
1948년 5월14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고,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을 가리켜 '나크바'라고 불렀습니다. 나크바(Nakba)는 재앙을 뜻하는 아랍어로 본래는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 재해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랍인들이 나크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유대인들이 저지른 인종청소의 비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데이르 야신 학살’ 사건입니다.
유대 군인들은 마을에 쳐들어가면서 집마다 기관총을 난사해서 다수의 주민을 죽였다.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한 장소에 모아 놓고 냉혹하게 살해했다. 한쪽에서 죽은 시체를 훼손하는 동안 많은 여성을 강간하고 이내 살해했다…유대 군인들은 아이들을 한 줄로 벽에 세워 놓고 <단지 재미 삼아> 총을 난사하고는 마을을 떠났다. -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비극사」
데이르 야신(Deir Yassin)은 영국 위임통치 시절 예루살렘 인근에 있던 마을입니다. 이스라엘 건국을 몇 주 앞둔 1948년 4월 9일, 유대 군사 조직 이르군(Irgun)과 스턴 갱(Stern Gang. 레히Lehi라고도 함)이 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채 데이르 야신으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수색을 벌이며 어린이·여성·노인을 포함해 수백 명을 살해합니다.
당시 이르군의 지휘관이었던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은 1977년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고, 스턴 갱의 지휘관이었던 이츠하크 샤미르(Yitzhak Shamir)도 1983년 이스라엘 총리가 됩니다.
이스라엘이 탄생한 지 5개월가량 흐른 뒤, 이스라엘군(IDF)이 또다른 범죄를 저지릅니다. 1948년 10월28일~29일 헤브론(Hebron) 인근 알다와이마(al-Dawayma) 마을에서 수백 명의 아랍인을 살해한 것입니다.
전투도 저항도 없었습니다. 첫 정복자들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80~100명가량의 아랍인들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쳐 죽였습니다. - ‘평화를 위한 유대인의 목소리’ 홈페이지
어느 군인은 자기가 한 여성을 강간한 뒤 쏴버렸다고 자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신생아를 안고 있던 한 여성에게 군인들이 음식을 먹던 마당을 청소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녀는 하루 또는 이틀 정도 일을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군인들이 그녀와 아이를 총으로 쏴 버렸습니다. - 나시르 아루리 외, 「팔레스타인 난민 - 귀환권」
데이르 야신과 알다와이마 학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음은 물론이고,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다른 지역 아랍인들이 공포에 질려 대대로 살아왔던 마을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백인들의 공격으로 살해되거나 강제로 쫓겨나거나, 또는 살기 위해서라도 도망을 갔던 것과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1948년 5월14일에 발표한 소위 독립선언문에서 ‘종교·인종·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주민들에게 사회적·정치적 권리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할 것’라고 했지만, 정작 현실에서 벌어진 일은 대규모의 살인과 추방 그리고 공포에 질린 탈출이었습니다.
시오니스트들은 아랍인이 ‘자발적’으로 떠났으니 문제될 것도 없고, 그들에게 땅을 되돌려 줄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사망자 또한 유대군과 아랍군 사이의 전투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며, 아랍인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인종청소가 있었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4월과 5월에 ‘D계획’이 전면적으로 개시되었다. 이 계획은 두 가지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하나는 영국인들이 버리고 떠난 모든 군사시설과 민간 시설을 신속하고 일사불란하게 장악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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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이자 더욱 중요한 목표는 가급적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미래의 유대 국가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이런 잔학 행위는 무분별하게 행해진 게 아니었다. 미래의 유대 국가에서 가능한 많은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하기 위한 종합 계획의 일부였다. - 일란 파페, 「팔레스타인 현대사」
데이르 야신이나 알다와이마 학살 사건은 1947년~1949년 유대인들이 어떻게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아랍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였는지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1만 5천명 이상의 아랍인을 살해하고 500개 이상의 마을과 도시를 파괴했는지, 왜 75만 명 넘는 사람들이 자기가 살던 땅을 떠나 시리아나 레바논 등지로 갑자기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는 1948년 5월15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기 한참 전에 시작되었다.
야파는 사방이 포위된 채 박격포의 포격이 끊이지 않았고 저격수의 공격까지 받았다. 5월 첫째 주에 마침내 시온주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아랍 주민 6만 명 대부분이 체계적으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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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신생 이스라엘 국가에서 훨씬 더 많은 수가 추방된 한편, 그 후로도 더 많은 이들이 쫓겨났다. 이런 의미에서 나크바는 현재 진행 중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집단살해 또는 제노사이드
2024년 5월, 제가 데이르 야신과 알다와이마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76년 전에 있었던 그와 같은 일이 지금 가자 지구에서 또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인종이나 종족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nos에 살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를 결합하여 만든 합성어로, 렘킨은 이 말을 통해 “한 국민이나 한 민족 집단ethnic group에 대한 파괴”를 개념화하고자 했다…나치 독일이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은 전통적인 군대 간 전쟁이 아니라 “인민에 대한 전쟁a war against peoples”이라고 규정했다. - 최호근, 「제노사이드」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체결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이하 ‘협약’)”에는 집단살해 또는 제노사이드를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협약 내용은 국가법령정보센터 참고)
집단살해라 함은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행하여진 이하의 행위를 말한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전 지역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군사공격을 벌이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자신을 방어할 능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가해자 이스라엘이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들이 여성이냐 남성이냐, 어린이냐 성인이냐 또는 특정한 조직에 가입해서 활동했느냐 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해자 한 명 한 명이 어떤 존재인지에 상관없이, 가해자가 피해자들을 하나의 집단, 곧 ‘팔레스타인인’으로 규정하고 절멸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1980년 대한민국이 광주 시민들을 하나의 집단, 곧 ‘폭도’로 규정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협약’에서는 제노사이드와 관련된 행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가)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나) 집단의 구성원에 대하여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다)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육체적 파괴를 초래할 목적으로 의도된 생활조건을 집단에게 고의로 부과하는 것
(라) 집단 내 출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도된 조치를 부과하는 것
(마) 집단 내의 아동을 강제적으로 타 집단으로 이동시키는 것
이스라엘은 2023년 10월7일부터 가자 전역에 있는 아파트, 학교, 병원 등 인구가 밀집된 곳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해 7개월여 동안 3만 5천명 이상을 살해하였습니다. 사망자 가운데는 1만 4천명 이상의 어린이·청소년도 포함됩니다. 8만 명가량이 부상을 입었고, 1만 명 이상이 실종 상태입니다.
실종자가 이렇게 많은 것은 이스라엘이 주민들이 거주하는 건물을 폭격하였고, 건물이 무너지면서 그 잔해 속에 여전히 많은 사람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워낙 피해자 수가 많은데다 폭격 또한 계속되고 있어서 실종자들에 대한 수색과 구조는 엄두를 내기 어렵습니다.
가자 지구에 있던 주택 가운데 60%가량과 학교 73%가량이 파괴되었고, 35개의 병원 가운데 12개만이 부분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24년 5월 9일, 참여연대와 사단법인 아디가 5천 명가량의 시민들과 함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이스라엘 전쟁 책임자들을 ‘집단살해죄’ 등의 혐의로 고발하였습니다. 피고발인에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 아이작 헤르조그 대통령, 요아브 갈란트 국방부 장관,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부 장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들의 고발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적법한 주거지에서 추방시킬 뿐만 아니라 식량과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박탈하는 등 팔레스타인인들을 말살시킬 수 있는 상황을 고의적으로 조성함으로써 사상자의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제주와 광주, 그리고 가자
대규모 집단 학살에는 그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깊이 개재된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학살의 동기를 제공하고, 학살을 주저하는 사람에게는 양심을 마비시키거나 위안을 줌으로써 학살에 가담하도록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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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주 4.3에서 가해자를 사로잡고 희생자를 공포에 떨게 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빨갱이 논리였다. - 최호근, 「제노사이드」
전두환 신군부는 5·17비상계엄확대 이전부터 끊임없이 북한의 남침설을 유포했다. 한국의 학생소요사태를 부추기고 혼란의 틈을 타 남침을 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한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 심리를 이용하여 국민들과 시위대간 심정적인 분리를 유도하고, 또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위한 빌미로 ‘북한’을 끌어들인 것이다. - ‘북한군 광주 침투설’,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
대한민국 제주의 4.3과 광주의 5.18, 그리고 팔레스타인 가자의 제노사이드는 여러가지 면에서 닮았습니다. ‘미국이 지원하는 국가’, ‘흔들리는 권력과 민중의 저항’, ‘국가 폭력과 무고한 피해자들’, ‘외부로부터의 고립’ 등이 그렇습니다.
특히 피해자를 향해 가해자가 지닌 이데올로기가 매우 유사합니다. 제주 4.3과 광주 5.18의 과정에서 지배자들이 내세우던 핵심 이데올로기는 ‘빨갱이’입니다. 빨갱이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가해자들은 서슴지 않고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을 ‘죽어 마땅한’ 존재를 넘어 ‘죽여야 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이런 경우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피해자를 지원하려던 외부인들도 행동에 나서기를 꺼리게 되고, 피해자들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갑니다.
앞에 인용한 최호근의 글 가운데 제주를 가자로, 빨갱이를 테러리스트로 바꿔 보면 지금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있었던 ‘빨갱이 사냥’과 같은 일이 지금 팔레스타인에서는 ‘테러리스트 소탕’이란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협약’에는 집단살해를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행하여진 행위라고 했습니다. 의도는 이데올로기와도 연관이 있는 심리적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집단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어느정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23년 12월29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스라엘을 제노사이드 혐의로 제소하였습니다. 84쪽 분량의 소장 가운데 ‘D. 이스라엘 정부 관료들과 다른 이들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제노사이드 의도가 담긴 표현들’이라는 부분이 있고, 거기에 거론된 첫번째 인물이 네타냐후 총리입니다.(소장 내용은 ICJ 홈페이지 참고)
2023년 10월 28일, 이스라엘군이 가자에 대한 지상 침공을 준비하는 동안 네타냐후 총리는 성경에 나오는 ‘아말렉이 너희에게 한 일을 기억하라’라는 구절을 인용하며 연설을 했습니다. 아말렉(Amalek)은 성경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전멸시키라고 명령한 민족입니다. 또한 같은해 11월3일 장교와 군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타냐후는 다시 한번 아말렉을 언급하는데, 관련한 성경 내용은 이렇다고 합니다.
너는 이제 가서 아말렉을 쳐라. 그들에게 딸린 것은 모두 전멸시켜라. 사정을 보아 주어서는 안 된다.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젖먹이, 소 떼와 양 떼, 낙타와 나귀 등 무엇이든 가릴 것 없이 죽여라 - 사무엘상 15:3
<미들 이스트 아이>의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 국가안보부 장관 벤그비르는 감옥의 과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을 처형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지난 4월 18일 X(옛 트위터)에 게시한 글에서 이스라엘군이 감옥을 추가로 건설하기로 함으로써 더 많은 테러리스트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했습니다.
총리와 장관의 발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지금 특정한 집단을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제노사이드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5월입니다
우리가 인간임을, 인류의 일원임을 부정당하는 느낌었다고 말하는 것이 회고적인 감정, 사후의 설명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즉각적이고 지속적으로 느끼고 체험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며, 또한 상대방이 원했던 것도 정확하게 바로 그것이다. 인간임을 부정당하는 순간, 인류에 소속한다는 가히 생물학적인 주장이 터져 나온다. - 로베르 앙텔므, 「인류」
한국인들에게 5월은 19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5월은 76년째 계속되고 있는 나크바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해자들은 죄없는 사람을 빨갱이니 간첩이니, 테러리스트니 아말렉이니 하면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한 생명 한 생명이, 우리와 함께 푸른 5월의 하늘을 한껏 누리며 살아 마땅한 인간이었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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