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암 촘스키가
중동이나 국제정치 문제를 놓고 많이 알려져 있다보니 한국에서는 그가 직접 쓴 책뿐만 아니라 그의 인터뷰나 이메일 내용을 담은
책까지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에드워드 사이드는 유명하기는 하나 아직은 한국에서 많이 읽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책도 문학이나 예술 비평 쪽으로 많이 번역되어 있는 것 같구요.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학 비평가이자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정치 활동했던 사람이며
팔레스타인/중동과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쓴 사람입니다. 오늘은 어쨌거나 에드워드 사이드 하면 가장 유명한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 두 책을 들고 한국 사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 자판기에서 이슬람 공포증까지
지난 2009년 3월, 한국인 관광객들이 뭏扇【?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건이 벌어지자 언론에서는 계속해서 알 카에다가 공격을 했을 것이라는 둥, 이슬람은 왜 이런 일을 벌이냐는 둥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그 누구도 한국인을 자신들이 공격했다고 주장하지 않았고 예멘 정부도 아직
사건의 원인을 밝히지 못한 시점에서, 한국 언론들은 마치 신이 내려서 모든 것을 보여준 것처럼 온갖 말들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슬람이 문제라고 하는 쪽이든 아니면 이제라도 이슬람을 이해하자는 쪽이든 ‘폭탄-테러-중동-이슬람’을 열심히
연결하였습니다.
2001년에 9·11이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9·11이 벌어지자마자 미국
정부와 언론, 학자들은 이것이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짓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가
9·11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보복을 해야 한다는 쪽이든 미국의 패권 정책 때문에 이 일이
벌어졌으니 미국 정부가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쪽이든, 9·11은 ‘오사마 빈 라덴-알 카에다-무슬림-아랍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부, 언론, 학자들의 얘기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왜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믿게 되었을까요?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아랍인이 호색한이거나 피에
굶주린 악한을 연상시킨다...(강도나 해적, ‘원주민’ 반란자의)리더인 아랍인이, 체포된 서양인 주인공과 금발의 소녀(두 사람
모두 지극히 건강해 보이지만)를 향하여 이빨을 드러내고 호통을 치면서, “나의 부하들은 너희들을 곧 죽일 것이야. 그러나 그
전에 그들은 즐기고자 할 것이야”라고 말하는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아랍인은 기본적으로 살인자이며 폭력과 사기는 아랍인의
유전자에 의해 전파된 것이라고 논하고 있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1997년, 459~460쪽
자판기 안에 커피며 율무차며 코코아 가루를 넣어 놓고 때가 되면 원하는 것을 뽑아내듯이
누군가 우리들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아랍-중동-폭력-테러리즘’과 관련된 이미지와 말들을 집어넣어 두는 겁니다. 그것이 진하든
연하든 말입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면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정부 발표나 언론 보도를 통해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필요한 생각이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이미 내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닌 거지요. 내 머리가 그들의 것입니다. 그들이 기억하라고 한
것이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다가 그들이 생각해 내라고 하면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거지요. 거꾸로 언론이나 영화 등을 접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예멘에서 한국인을 죽이고 미국에서 9·11을 저지른 것이 이슬람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그 사람은 ‘증거가 뭐야?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었을지 모릅니다.
알카에다가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였고 레바논의
헤즈볼라당...자살공격의 원조인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그 외의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여러 그룹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숫자적으로는 소수이지만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세를 이미 확보하였고...겉으로는 노골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반대를
할 수 없는 분위기이지만 실제 이들 세력에 동조하는 세력은 아직 소수이다. 그럼에도 소수인 근본주의자들은 아랍 사람들의 종교와
민족주의를 자극하면서 젊은이들 속에 파고 들어가고 있고 다시 한 번 반미와 반서구, 반기독교 정서를 이용해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으며 아랍 사람들의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결집을 시도하고 있다. - 강태윤, ‘예멘 사태를 보면서’,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
이 글을 보면 흔히 언론이 테러 조직의 대표격으로 삼는 알카에다와 헤즈볼라·하마스 같은
조직들이 이슬람이라는 말 때문에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면 헤즈볼라나 하마스를 모르는 사람들도 알카에다와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이 조직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앞의 글과 달리 헤즈볼라나 하마스 모두 소수가
아니라 그 지역 민중들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또 이슬람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를 모두 인정하기 때문에 이슬람 조직들이 반기독교 정서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앞의 글에서는 ‘알카에다-헤즈볼라·하마스-이슬람-반미/반기독교’를 연결함으로써 이슬람
조직들은 무언가 비정상적이라는,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만듭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슬람과 중동지역에
대한 잘못된 지식과 신념은 이슬람 공포증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금 이슬람국제운동은 2005년을 기점으로 동아시아 한국으로
집중하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가 전 세계에 파송한 선교사가 2만 여명인데 반해 한국에 들어온 이슬람선교사는 2~3만 명에
달한다. 한국 내 이슬람세력은 진보연대나 전교조 등 한국 좌파세력과 공조하여 이슬람운동을 매우 성공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외국인 노동자 교회에 침투한 무슬림 선교사들은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가장하고 먼저는 이슬람 국가에서 들어온 외국인들을
이슬람화 및 조직화함으로써 한국 내 토착화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이들은 특히 한국 크리스천 미혼 여성들에게 접근하여 결혼
전략을 통해 이슬람을 포교하고 있는데, 약 3천 여 명의 한국인 자매들이 -주로 노처녀들- 파키스탄 등 무슬림 선교사들과 결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최바울, ‘이슬람 국제운동과 글로벌 지하드’, 미션투데이, http://www.missiontoday.co.kr
제가 알기로 한국에 온 무슬림 대부분은 이슬람을 선교하러 것이 아니라 돈을 벌러 온
이주노동자들입니다. 그런데 앞의 글을 쓴 최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모두 이슬람 국가에서 왔으니 한국에 이슬람 선교를 위해 온
것으로 보이나 봅니다. 그러면 미국인들은 모두 기독교 선교를 위해 한국에 온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들 주위에 무슬림이 있나요?
아니면 무슬림 선교를 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으신가요? 만약 2~3만 명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면 왜 우리 주변에는
무슬림을 만나기 어려운 걸까요? 제가 보기에 최바울의 주장은 근거 없는 과장입니다.
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진보연대나 전교조가 무슬림들과 손을 잡고
이슬람을 성공적으로 퍼뜨리고 있다는 부분에 가면 소설도 이런 소설이 없습니다. 제가 사회운동을 한 지 20년쯤 되었는데 좌파가
무슬림과 손잡고 종교를 퍼뜨렸다는 얘기는 정말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앞의 글 끝부분에 최바울은 ‘한 국가에 이슬람이 1%만 되면 그 국가는 정상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혜롭게 대응하지 않으면 앞으로 10~15년 내에 한국에도 수 천 개의 이슬람 사원에 주요 도시마다 곳곳에
세워지고 전국적으로 이슬람 테러가 득세하는 그런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라고 합니다.
인도네시아, 인도, 이란 등에서 무슬림 인구가 1%를 넘는다고 그 나라가 정상 작동을 하지
않았다는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또 한국에 몇 십 년 안에 수 천 개의 이슬람 사원이 생길 것 같지도 하고, 무슬림과
이슬람 사원이 생긴다고 테러가 발생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최바울은 마치 외계인들이 쳐들어와서 지구를 장악하려 하고 있으니
우리가 나서서 지구를 지켜야 된다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이슬람에 대한 왜곡을 넘어서 공포증(주1)과 과대망상증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씩 들었던 얘기가 ‘하여튼 조선 것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깐!’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 말과 함께 선생은 몽둥이를 휘둘렀고, 우리는 맞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고 그냥 맞고 있었지요.
그런데 도대체 조선 것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는 말은 누가 만들어 낸 말일까요? 정확한
것은 모르겠는데 혹시 일본인들이 조선을 지배하면서 조선인을 비하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렇게 조선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을 조선인들이 내면화 하면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교실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비슷한 방식의 논리가 무슬림과 아랍인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
무식하고, 폭력적이고, 논리적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무슬림이고 아랍인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원래가 그렇고 그런 무슬림이나 아랍인이란 없습니다. 기독교인 가운데도 이라크를 침공해야 된다는 조용기 목사가
있고 이라크를 침공하면 안 된다는 문정현 신부가 있지요.
무슬림 가운데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찬성하는 무슬림이 있고 반대하는 무슬림이 있습니다.
청바지를 입은 미국 여성이 있고 청바지를 입지 않은 미국 여성이 있듯이 히잡을 쓴 아랍 여성이 있고 히잡을 쓰지 않은 아랍
여성이 있습니다. 종교나 문화는 국가나 지역, 개인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베트남인이나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하면 ‘그들은 원래 잔인해’가 되고 미군이 베트남이나 이라크에서 잔인한 짓을 벌이면 ‘미국은 원래 그렇지 않은데 그들이 일탈을 한 것이야’ 아니면 ‘어쩔 수 없었어’(주2)가 됩니다. 베트남인·이라크인·아랍인들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잔인함이 담겨 있고 미국인·프랑스인·영국인은 원래는 이성적인데 가끔 그들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한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렇게 아랍인과 무슬림은 잔인하다는 생각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걸까요?
흔히들 잔인한 아랍인의 사례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이라크·팔레스타인·레바논 등지의 사람들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나 요르단 등지의
아랍인들은 ‘잔인함’ ‘테러리스트’ 등의 말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나하면 사우디 아라비아·요르단 이런 나라들은 친미
독재정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이라크·팔레스타인·레바논 등지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패권 정책에 저항하는 조직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단지 무슬림이거나 아랍인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정책에 대항하는 아랍인이나 무슬림들은 더
쉽게 잔인한 테러리스트로 몰리는 것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정이 아무리 잔인한 짓을 저질러도 미국 언론들이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을 보고 잔인한 독재자라고 하지는 않지요. 미국의 친구는 합리적이고 미국의 적은 잔인하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나 [문화와 제국주의]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가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이 지배하고 싶어 하는 지역이나 집단에 대해 ‘잔인한’ ‘무식한’ 등의 생각과 느낌을 만들어 퍼뜨린다는 거지요. 이런
생각을 퍼뜨린 다음에 ‘아랍인과 무슬림이 잔인하기 때문에 솔직히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 ‘아랍인과
무슬림이 무식하고 무능하니 우리가 가서 구원해 줘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주3) 무능한 흑인들을 구원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 백인들의 의무감과 같은 거지요.
최근에는 해적을 잡겠다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 해군들이 소말리아 앞바다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의 해적으로부터 무고한 배들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소말리아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전쟁과 가난으로 빠뜨린 것에 대해 미국이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소리는 작습니다. 미국이 만약 소말리아 영토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면, 그 때도 미국은 아프리카 지역의 패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해적을 퇴치하고 소말리아에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주기 위한 역사적 의무를 수행한다고 할 것입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서 전쟁과 기아 문제가 발생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는 아프리카나 중동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우리가 어떻게든
해결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전쟁과 기아가 왜 벌어졌는지, 제국주의나 강대국들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현상은 물론 원인을 함께 해결하려는 인류의 연대가 아니라 우등한 자가
열등한 자를 보살펴 주자는 생각에서 머무는 거지요.
어쨌거나, 지배자들이 아랍이나 무슬림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고 해서
거꾸로 아랍이나 무슬림들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안은 아니겠지요. 에드워드 사이드의 생각은 아랍인/무슬림이 무조건
나쁘다고 하는 것이나 아랍인/무슬림이 무조건 옳다고 하는 것이나 둘 다를 극복하자는 겁니다. ‘원래 그래’ ‘본질이 그래’라는
것에서 벗어나자는 거지요. 제국주의와 그것에 적대하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자기 해방과 보편주의의 길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뒤 한국군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파병되었었고, 한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죽기도 했습니다. 또 한국 정부는 최근에 소말리아에 해군을 보냈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어떤 형태로든 지원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한국에서도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럴 때 국제정치의 흐름을 아는 것과 함께 한국사회가 아랍과 이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떤 모습인지도 계속 되짚어 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다 몇 해 전 백혈병으로
죽기까지 아랍과 중동 지역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기 위해 애썼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노력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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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뉴스영화나 뉴스사진에서는 아랍이
언제나 군중으로서 나타난다. 개성도 인격도 개인의 경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화면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군중의
분노와 비참 또는 비이성적인(그러므로 희망이 없을 정도로 기괴한) 제스처이다. 이러한 이미지 전체에 숨어 있는 것은 ’지하드‘의
위협이고, 그 결과 이슬람교도(내지 아랍인)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공포가 생겨난다.’,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459~460쪽
주2) ‘알제리에서의 프랑스 측
폭력이 가끔 언급되었어도, 그것은 원주민의 ’광신적 태도와 약탈을 좋아하는‘ 탓으로 인해 프랑스 군도 어쩔 수 없이 불쾌한
폭력을 행사해야 했다는 식으로 완화되었다.’, 에드워드 사이드, [문화와 제국주의], 문예출판사, 2005, 354쪽
주3) ‘식민지 계획의 거의 대부분이 원주민의 후진성과, 원주민 전체의 무능을 전제 하여 시작되었다. 즉 원주민은 서양과 ’대등할‘ 정도의 독립심과 적격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앞의 책, 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