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팔레스타인 갔던 이야기를 늦게나마 쓰기도 하고 고치고도 있는 글)
살람 알레이쿰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에서 띄우는 00통의 편지
06_ 인간이 인간의 가슴에 물들다
와엘과 함께 짐을 나눠들고 YDA를 나섰습니다. 말이 안 통하니 와엘이 손짓으로 이리 가자고 하면 그저 씨익 웃으며 따라갔지요. 툴카렘으로 가야하니깐 당연히 쎄르비스를 탈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차들이 세워져 있는 길을 지나던 도중 와엘이 한 차를 가리키며 타라고 합니다. 우리를 데리러 차가 와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차가 새 것에 반짝거리는 거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속으로 ‘아... 와엘은 농민 중에서도 형편이 괜찮은 사람인가 보다’ 했지요. (그 차의 정체는 한참 뒤에 밝혀집니다. 기대하시라, 두둥~~~)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더운 중동의 여름 낮을 에어콘 바람 쐬며 달렸습니다. 한국 사람들 운전 습관이 험하다고 하지요. 팔레스타인에서 운전을 해 보시면 아마 한국 사람들은 참 순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리 넓지도 않은 길을 요리조리 왔다 갔다 하며 앞지르고, 앞차 뒤꽁무니에 빠짝 붙어서 달릴 때는 저도 모르게 자동차의 손잡이를 꼭 붙잡게 됩니다. 한참 차를 달리다 와엘이 차 속도를 늦춰서 ‘다 왔나?’ 싶었지만 가게 앞에 차를 세우는 것으로 봐서 무언가를 사려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민폐를 적게 끼치기 위해 돈을 챙겨 얼른 따라 내렸지요. 아니나 다를까 와엘이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3개를 꺼냅니다. 제가 돈을 내려고 해도 와엘이 손사래를 치며 자기가 계산을 하더라구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는 대중교통 수단 쎄르비스
시원한 아이스크림 먹으며 달리다 보니 주변에 ‘툴카렘Tulkarem'이라는 글자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른 말은 안 되니 그저 큰 소리로 아는 체하며 ‘툴카렘?’하니깐 와엘이 기특하다는 듯이 웃으며 맞다고 합니다. 차를 식당 앞에 세우면서 내리라고 합니다. 식당 앞에 차를 세웠으니 무얼 하자는 말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식당에 앉았습니다. 다음 순서는 당연히 무얼 먹을지를 선택하는 것이겠지요. 와엘에게 우리는 필라펠을 먹겠다고 했고, 와엘이 이것저것 시켰습니다. 음식이 나왔으니 먹어야겠지요. 그저 서로 손짓으로 먹으라는 시늉을 하면서 웃었습니다. 옆에서 밥 먹던 사람들도 신기한지 계속 우리를 쳐다보며 이런 저런 얘기를 하기도 하고 눈빛이 마주치면 살짝 웃기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툴카렘은 서안지구에서도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여서 외국인들이 올 일이 잘 없는데다, 특히 텔레비전에서 본 중국인이나 일본인처럼 생겼으니 말입니다.
밥을 먹고 다시 차를 타고 한참 달려 와엘이 살고 있는 데이르 알 고쏜(Deir al Ghosson)이라는 시골 마을로 왔습니다. 와엘의 집에 머물기로 하고 온 것이어서 저희는 와엘의 집에 있는 방을 하나 내어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방 하나가 아니고 아예 집을 하나 내어 주었습니다. 자기 여동생이 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결혼해서 요르단으로 가서 살기 때문에 비어 있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낼 방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쓰라는 말도 남깁니다. 비어 있는 집이라고 하니 또 그런 줄만 알았는데 모든 가구의 상태며 냉장고에 들어 있는 달걀 등의 먹을거리를 보니 사람이 살던 집 같습니다.
데이르 알 고손과 농장 사람들
이 마을과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우리는 ‘보호 받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때 되면 팔레스타인인들이 우리를 데리러 와서 여기저기를 데리고 다니고, 때 되면 먹을 것을 준비해서 우리를 먹입니다. 휴지를 사러 가게에 갔었는데 어제 처음 인사한 사람이 휴지며 아이스크림 값까지 모두 자기가 내겠다고 했습니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와엘이 일하고 있는 칠면조 농장에 갔습니다. 도시의 매연과 화장품에 익숙한 저에게 처음 농장에 갔을 때 느꼈던 냄새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겠다고 온 마당에 냄새 때문에 칠면조를 멀리 할 수 없어서 수 백 마리의 칠면조가 바글바글 거리는 칠면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송아지가 침을 줄줄 바르며 까끌한 혀로 제 손을 핥을 때도 가만히 있었지요.
계속 칭얼대다 사진 찍자고 하니깐 잠깐 웃어준 아기
어제는 칠면조 18마리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수의사가 왔고, 그 사람이 칠면조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헤집으며 상태를 살펴보는 동안에도 옆에서 같이 지켜봤습니다. 낯설기도 하고 비위가 상하기도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곳 사람들과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지요. 남들은 생활과 삶의 일부로 하는 일을 제가 냄새나 모양 때문에 멀리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데 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게 만들 뿐이니깐요.
팔레스타인에서 많이 알려진 정당으로 하마스와 파타가 있고, 그 밖에도 인민전선․민주전선․ 피다(FIDA) 등이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PPP(팔레스타인 인민당)라는 정당의 사람들입니다. 예전에는 공산당이었는데 소련이 무너진 이후 세계 곳곳에서 공산당이 이름이나 노선을 바꾸면서 공산당이 인민당으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팔레스타인인들 가운데는 무슬림이 많기 때문에 금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이슬람 사원에 기도를 하러 갑니다. 목요일에 농장에서 놀다가 제가 이 마을 YDA 활동가 마젠과 농장 사람들에게 사원에 갈 거냐고 물으니깐 모두들 안 간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한 간단한 이유는 ‘우리는 모두 꼬뮤니스트(공산주의자)’입니다. 체게바라와 쿠바를 좋아하고, 사람은 모두 똑같다고 얘기합니다. 마치 무슨 신분증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꼬뮤니스트임을 확인하며 손을 잡고 크게 웃었습니다.
금요일이 빨간날로 되어 있는 달력
한국에서는 북한과 반공으로 제 입지를 채우는 사람들이 많고, 아직 다양한 사상에 대한 토론을 하기 어려운 사회 수준 때문에 공산주의나 꼬뮤니즘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기도 어렵습니다. A라는 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하려면 서로가 A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생각하기 싫어하고, 억지 부리기에만 능숙한 사람들이 많으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한국이 선진국, 선진국 외치기 전에 사회와 삶을 바라는 보는 여러 가지 사상에 대한 열린 자세부터 갖췄으면 좋겠습니다. 국민소득을 2만 달러에서 4만 달러로 높이는 것보다는 시민들의 의식이 2배 더 깊고 넓어졌으면 좋겠구요. 자신을 꼬뮤니스트라고 하는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인냥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보면, 이 부분에서는 팔레스타인이 한국보다 수준이 높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팔레스타인도 한국처럼 자신을 꼬뮤니스트라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세상엔 온갖 사람들이 있고, 꼬뮤니스트라고 모두 꼬뮤니스트인 것은 아니니깐요.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가진 꿈과 희망에 대해서 좀 더 얘기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열린 셈입니다. 한국에서 예수천국·불신지옥만을 강조하시는 분과 대화하기가 어렵듯이 이곳에서는 이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분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는 아랍어라고는 20단어 정도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주로 아랍어를 사용하고 데이르 알 고쏜에서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잠깐이라도 영어가 가능한 사람을 만나면 왠지 얼른 뭐라도 물어봐야 할 것만 같은 조바심이 들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대화는 간단한 영어․아랍어 단어 몇 개와 표정․몸짓․눈빛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마흐무드가 자기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 줬습니다. 거기에는 멋진 그림이 담겨 있었고, 그림을 그린 사람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화가를 가리키며 데이르 알 고쏜이라고 하는 걸 보니 그 화가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그 화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이렇게 전달했습니다. 먼저 그림을 찍은 사진을 가리키고, 다음엔 화가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는 손바닥으로 제 가슴을 두드리고 나서 손가락 두개를 펴서 제 눈을 두 어 번 가리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을 전했고 결국 일요일에 그 화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서로가 아랍어나 한국어를 잘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것은 말이 잘 안 통하기 때문에 오히려 대화가 더 잘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알 지다르(장벽을 가리키는 아랍어)... 베리 베드(very bad)' 하면서 인상을 찌푸리거나 ‘이스라엘, 건(gun)' 하면서 총 쏘는 시늉을 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이 오갑니다. ‘데이르 알 고쏜, 뷰티풀’ 하면서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올리면 팔레스타인인들도 활짝 웃으며 ‘슈크란(고맙습니다)’이라고 합니다. 대화라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단어를 전달하기에 앞서 서로의 마음속에 담긴 것을 전하고 받는 것이니깐요.
동네에서 만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할머니가 입고 계신 것은 팔레스타인 여성의 전통 의상
어쩌면 한국에서 저는 말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자주 잊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전하고 읽기 위해서 말이 존재하는 것인데 그저 필요한 말,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담기지 않은 기계와 같은 말들을 너무 많이 주고받으며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팔레스타인 연대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벽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장벽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고, 이스라엘군의 사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총알을 몸으로 맞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한국에서 운동이라는 것을 하면서 많은 것을 사건과 사업과 일로 만드는 동안 정작 그 사건과 사업과 일이 존재하는 이유인 사람들은 잊으며 살았던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여기 온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벌써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연대운동하면 외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해 무언가를 지원하거나 외국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무언가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배우고 있습니다. 전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있고, 제 삶을 되돌아 볼 기회가 있고, 시원한 바람과 맛있는 음식이 있는 여기 팔레스타인이 좋습니다. 낮잠 잘 때 개미가 자꾸 깨무는 것만 빼면...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연대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어쩌면 연대라는 것은 저녁 하늘에 노을이 지듯 인간이 인간의 가슴에 물드는 것은 아닐까요?
선물 6. 팔레스타인에서는 뭐 타고 다니냐구요?
팔레스타인(서안지구)의 대중교통은 크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택시구요. 두 번째는 세르비스입니다. 쎄르비스는 버스와 택시의 중간 형태의 차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특정 구간을 오가는 것으로 보면 버스와 같고, 사람이 모두 앉아서 가는 작은 차라는 것으로 보면 택시와도 같지요. 보통 운전사 빼고 승객 7명이 꽉 차면 출발을 해요. 가는 사람들이 마음은 급해서 승객을 다 채울 때까지를 기다리지 못하면 모인 사람들끼리 돈을 조금 더 내기로 하고 운전사에게 출발하자고 하는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세 번째, 한국에서 보는 큰 버스는 주로 도시와 도시 사이에만 다닙니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야 모르겠지만 좁고 낡은 도로 사정을 생각하면 시내에는 큰 버스가 다니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요금은 차가 커질수록 싸지지요. 재미있는 것은 쎄르비스의 요금은 차에 탈 때나 내릴 때 내는 것이 아니라 차가 달리는 도중에 운전사에게 전해 준다는 겁니다. 그러면 운전사는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빠르게 달리면서 돈을 받고 잔돈을 계산해서 내 주기도 하지요. 정말 대단한 능력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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