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06년·09년 팔레스타인

13. 가자지구에서 걸려온 전화

순돌이 아빠^.^ 2010. 3. 5. 13:19

 

(2009년 팔레스타인 갔던 이야기를 늦게나마 쓰기도 하고 고치고도 있는 글)

 

살람 알레이쿰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에서 띄우는 00통의 편지

 

 

13. 가자지구에서 걸려온 전화

 

오늘도 가자지구에 사는 칼리드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칼리드는 자주 전화를 해서 ‘무슨 일 없냐’ ‘필요한 거 없냐’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해라’ ‘가자지구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등등을 말해요. 사실 칼리드와 저의 관계는 이런 말을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사이에요.

 

친구 아닌 친구

 

가자지구에 처음 간 것은 2006년 초였어요. 우리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안내도 해 주던 아베드가 하루는 가자지구와 이집트 사이에 있는 국경 검문소로 우리를 데리고 갔어요. 그 때부터 아베드는 잠깐 한숨(?) 놨어요. 왜냐하면 아베드가 영어를 못한다고 상당히 부담스러워 했거든요. 칼리드는 국경에서 통역하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국경 검문소 관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EU가 함께 하고 있었어요.

 

가운데 주황색 부분은 1948년에, 붉은색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그리고 위쪽에 있는 시리아의 골란고원은 1967년에 이스라엘이 점령한 곳


어? 거기는 이스라엘이 없냐구요? 사정은 이래요. 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한 뒤에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과 군인들을 이주 시켰어요. 이주 시켰다기 보다는 알박기 하듯이 심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네요.


주변에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고 그 한 가운데 점령촌을 만들고 점령민들이 살게 된 거지요. 팔레스타인인들은 죽을 맛이죠. 외부는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고 가자지구 내부에는 이스라엘이 땅을 빼앗고 총을 쏘고 검문소를 설치해서 사람들 오가는 길을 방해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팔레스타인인들은 가자지구에서 나가라고 싸우겠지요. 그 결과 2005년에 이스라엘이 땅도 거칠고 물도 별로 없는 가자지구에 있던 점령촌을 철수 시키고 대신 점령촌을 서안지구에 더 많이 짓기 시작한 거죠. 


이스라엘이 떠나는 조건으로 가자지구-이집트 국경의 관리를 자치정부만이 아니라 EU(유럽연합)도 함께 하도록 만들었어요. EU가 팔레스타인인들 편이면 이스라엘이 EU를 끌어 들였을까요? 당연히 EU가 이스라엘 편이기 때문에 그랬던 거지요. 그리고 국경 출입국 사무소 안 곳곳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어요. 검문소에 이스라엘 군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오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를 일일이 다 보고 있는 거지요. 사람은 없어도 감시의 눈빛은 살아 있는 거지요.

 

2006년 당시 가자-이집트 국경 출입국 사무소 안에 설치 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감시 카메라


가자지구에서 사람이 나가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집트에서 사람이 가자지구로 들어올 때는 이스라엘이 나서서 들어오라, 마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깐 자치정부에게는 국경에 대한 관리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지요. 다른 일들이 그렇듯이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떠나고 나서 많은 가자지구 사람들이 정말 몇 십 년 만에 그나마 수월하게 가자지구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어요. 하늘, 땅, 바다가 모두 막혀 있는 가자지구에 작은 숨통이 트인 거지요. 칼리드는 바로 그 국경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우리에게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 얘기도 해 주고 보여 주기도 했어요.


그날 몇 시간의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가끔 이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정도였지요. 제일 답답했던 순간은 2008년 말부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쎄게 두들겨 부술 때였어요. 혹시나 해서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이 없는 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난리통에 전화고 인터넷이고 전기고 제대로 되는 것이 있어야 말이지요. 이스라엘 군이 한창 가자지구를 두들겨 부수고 떠난 뒤에야 칼리드가 자기는 괜찮다고 이메일을 보내 왔더라구요. 사람 사는 게 이래도 되나 싶었어요.
 
가고 싶어도

 

이번에 팔레스타인 오면서 당연히 칼리드한테도 제가 팔레스타인에 간다고, 가자지구에 가서 꼭 만나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냈죠. 팔레스타인에 와서도 곧 만나자고 이메일을 보냈구요. 칼리드도 몇 년 만에 만나게 될 친구를 기다리며 좋아 했구요. 그런데 아무리 이리 저리 알아봐도 가자지구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요. 사정은 이래요.

 

2005년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떠나고, 제가 2006년 초에 가자지구에 갔었다고 했잖아요. 그때도 가자지구를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는데 보름이 걸렸어요. 멍하니 그 허가만 기다리다 겨우 들어간 거죠. 외국인이라면 서안지구는 별 일 없이 오갈 수 있지만 가자지구는 꼭 허가가 있어야 하거든요. 이건 무슨 깜빵에 있는 친구 면회하기 보다 더 힘들어요. 그런데 제가 가자지구로 들어갔을 때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하마스라는 조직이 집권당이 된 때였어요.

 

48년 점령지(이스라엘 지역)에서 가자지구로 들어가는 에레즈(Erez) 검문소.

검문소 내부는 촬영이 불가능하다. 거대한 감옥의 출입문 같다.


그전부터도 가자지구는 봉쇄상태였어요. 바다에는 이스라엘 군함이 떠서 팔레스타인 배들이 멀리 나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고, 심심하면 총을 쏴대고 어민들을 끌고 가고 그랬지요. 가자지구에 하나 있던 공항은 이스라엘이 활주로를 엎어 버렸어요. 공항이 있기는 한데 비행기는 뜰 수 없는 거지요. 땅으로 나가는 길은 이스라엘과 EU가 틀어 막고 있었구요.


하마스가 집권한 이후 2006년 6월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또 세게 때려 부수기 시작했어요. 하마스가 성장한 주요 지지 기반이 가자지구 거든요. 그 때도 참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그러고는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를 보다 강화했어요. 2007년에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파타라는 조직에게 돈과 무기를 줘서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했어요. 자기 말 잘 들으면 민주주의고 온건파고 자기 말 안 들으면 민주주의고 선거고 뭐고 인정할 수 없다는 거지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같은 팔레스타인인 하마스와 파타 사이에 가자지구에서 한참 전투가 벌어졌지요.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결과는 하마스의 승리였지요. 이때부터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를 더 강화해서 환자·식량·의약품·석유와 가스 등의 이동을 극도로 제한하는 거에요. 식량은 굶어 죽지 않을 만큼만 공급하고 환자들은 약이 없어서 죽어갔지요. 이스라엘 지역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은 물론이구요.

 

2006년 초에 제가 가가지구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운이 좋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제가 가자지구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봉쇄가 심해졌고, 특히 2007년부터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물론이고 외국인도 가자지구로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요.

 

칼리드 미안해요

 

저희만 가자지구로 못 들어가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시도를 했지만 모두 못 들어갔어요. 유엔이나 대사관 직원, 큰 구호 단체 사람이 아니면 어려워요. 그야 말로 가자지구가 외부와 차단된 150만 명이 사는 큰 감옥이 되어 버린 거죠.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감옥 말이에요.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가자지구. 2009년 1월. 출처_UNICEF 

 

이런 상황을 놓고 어떤 팔레스타인 분은 한국과 비교를 하시더라구요. 저희 집이 경기도에 있으니깐 차로 달리면 개성이 그리 멀지 않지요. 하지만 거리가 멀어서도, 말이 안 통해서도 아니고 정치적 이유 때문에 갈 수 없지요. 서안지구에서도 차로 달리면 가자지구가 1시간 30분 정도면 갈 수 있어요. 하지만 봉쇄는 사람이 오갈 수 없게 하는 것은 물론 식량이나 의약품 조차 제대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드네요.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어요.  


칼리드가 서안으로 올 수도 없고, 제가 가자로 갈 수도 없으니 그저 이메일과 전화 뿐이에요. 다시 만나면 얼굴을 제대로 기억이나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사람과 오랜 친구마냥 보고 싶다고 하고, 서로 걱정해 주고,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있으니 이 상황을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네요.


안타깝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거겠죠?

 

 

 선물 13. 어쩔 수 없이 발달된 통신?

 

저는 한국에 있으면서 인터넷과 카메라를 이용해 화상 통화를 해 본 적이 없어요. 제 주변에도 그런 걸 이용하는 사람이 잘 없구요. 그런데 팔레스타인에 오니깐 집에 인터넷과 카메라를 설치해 둔 집을 자주 보게 됐어요. 어디에 쓰냐구요?


이런 경우가 있어요. 여러 해 전에, 그러니깐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고 서안지구로 대학을 다니러 온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졸업을 하고 가자지구로 돌아가려고 하니 봉쇄가 심해져서 갈 수가 없는 거에요. 졸지에 서안지구에서 살게 된 거지요. 하지만 가족들은 가자지구에 있으니 연락을 해야 하잖아요. 핸드폰도 있지만 서로 얼굴을 보고 싶을 때 컴퓨터를 이용해 화상 통화를 하는 거지요.


또 전쟁이다, 추방이다, 망명이다, 돈벌이다 또는 한 번 나갔다가 이스라엘이 입국을 거부해서 못 돌아왔다 등등의 이유로 정말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주변 아랍 국가는 물론 아메리카,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어요. 48년과 67년 전쟁 때 난민으로 쫓겨 간 사람들은 수 십 년 째 가족이나 친척과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고 있지요. 이럴 때 인터넷이 이들의 그리움을 작게나마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네요. 


 

 

Petru Guelfucci - Ribellu de Canta U populu Cor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