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이스라엘/06년·09년 팔레스타인

26. 해지는 서쪽 바다 너머

순돌이 아빠^.^ 2010. 3. 29. 20:05

(2009년 팔레스타인 갔던 이야기를 늦게나마 쓰기도 하고 고치고도 있는 글)

 

살람 알레이쿰 팔레스타인 - 팔레스타인에서 띄우는 00통의 편지

(팔레스타인, 내 가슴에 물든)

 

26. 해지는 서쪽 바다 너머

 

팔레스타인에서 여기저기를 다니다보면 미국과 유럽, 일본 등지에서 오신 머리 허연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혼자 다니시는 분도 있고 부부가 함께 다니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관광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시려고 오신 분도 있고,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러 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아, 그래 나도 저렇게 머리가 허옇게 돼도 계속 무언가를 꿈꾸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 분들은 대체로 2종류의 사연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라말라에서 본 저녁 노을

 

첫 번째 사연은 수 십 년 간 자유나 평등, 민주주의, 해방 같은 삶의 의미를 찾아 살아오신 분들이지요. 미국에서 베트남전 반대운동, 유럽에서의 68혁명, 일본에서의 전공투 등 저에겐 그저 역사 속 이야기로 남아 있는 것들 속에 직접 참여하고 경험 하셨던 분들이지요. 그리고 지금은 팔레스타인이라는 점령 땅에서 지난 몇 십 년 그랬듯이 이곳에서도 자유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겁니다.

 

두 번째 사연을 가지신 분들은 이렇습니다. 특별히 사회운동을 하거나 국제 문제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던 것은 아니지요. 세월이 흐르고, 은퇴도 하고 삶을 조금씩 마무리 해 갈 때가 된 겁니다. 이 때 남들처럼 조용히 쉴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뭔가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신 거지요. 그러다 뉴스에 자주 나오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곳까지 오시게 된 겁니다.

 

바다 너머

 

제 고향은 부산입니다. 해운대로 피서를 가거나 해맞이를 하러 간다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지요. 해운대뿐만이 아닙니다. 광안리, 송정, 태종대 등 주위에 널린 게 바다이고, 바다에 대한 추억입니다. 부산의 바다는 해가 뜨는 동해 바다입니다. 그에 비해 서해의 바다는 해가 지는 바다지요.

 

겨울, 불가에 모여 계신 할머니들

라말라에서 만난 할아버지들과 푸른 하늘

 

해가 뜨는 동해 바다는 물이 깊고 물속을 잘못 걸으면 어느새 쑤욱 하고 몸이 빠져들기 쉽습니다. 빠르고 거친 느낌이지요. 해가 지는 서해 바다는 갯벌이 있어 그 안에 온갖 것들이 살고 있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도 몸이 채 잠기지 않습니다. 느리고 포근한 느낌입니다. 젊은 시절 휘몰아치던 감정이 세월이 가면서 조금씩 묵직이 자리를 잡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해지는 서해 바다에 앉아 있으면 붉은 해가 바다 너머로 집니다. 그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바다 너머 중국이 있고, 인도가 있고, 이란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습니다. 삼장법사가 손오공과 함께 떠났던, 옛 사람들이 말하는 서역이 있는 곳이지요.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가운데 이제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조용히 삶을 마무리 하고 싶으신 분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월, 먹고 산다고 가족들 건사한다고 참 고생 많으셨지요? 험한 세월 이기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이제 뜻하시는 대로 삶의 마무리를 하시면 좋겠네요.

 

유모차에서 잠든 팔레스타인 아기

 

어떤 분은 편안한 마무리를 원하시겠지요. 서해 바다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살아 온 세월을 떠올리시며 이제는 삶의 여유를 생각하시는 것도 아주 좋을 겁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맛난 바지락 죽 한 그릇 하시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혹시 아름다운 마무리를 꿈꾸시는 분 계신가요? 산다는 게 뭔지, 그동안 이 한 몸 버티고 내 가족 챙긴다고 세월이 너무 빨리 갔는데 남은 세월만이라도 뭔가 새로운 것을 느끼고,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삶의 의미를 찾고 싶으신 분 계신가요?

 

그런 분이 계시다면 해지는 서쪽 바다 너머 이곳 팔레스타인으로 와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좁은 비행기 안에 앉아 계시는 것이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말년에 해외여행 한 번 하신다 생각하셔도 좋겠지요.

 

‘에이, 내가 이 나이에 무슨 팔레스타인...’이냐구요?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나이는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 하지요. 은행나무는 수백 년을 살아도 때가 되면 새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대나무가 한 겨울에도 푸르를 수 있는 것은 세월을 탓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들. 최루탄 때문에 코를 막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인간도 60이 되고 70이 되어도 새로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고, 돋보기 끼고 책을 읽으며 인생에 대한 생각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60이고 70이 아주 많은 숫자이지만 50억 년을 살아온 지구의 나이로 보면 100년이라고 해도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일 뿐이겠지요.

 

‘에이, 머리 허예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라고 하신다면 이런 말씀 드리고 싶네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책가방 매고 학교 가는 길을 이스라엘 군인들이 틀어막고 있으면 같이 학교에 가 주세요. 아이들 손잡고 학교 가는데 군인들이 못 가게 막으면 ‘야, 이 놈들아. 학생이 학교도 못 가냐? 어?’하시며 호통을 쳐 주세요.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한국 할머니 할아버지들 멋지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할 거예요.

 

젊은이들이 손을 맞잡고 팔레스타인 전통춤을 추면 함께 박수를 쳐 주세요. 그들 앞에서 덩실덩실 어깨 짓을 하면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좋아하겠지요. 그들이 이스라엘 군인들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싸움박질을 하면 동네 가게에 가셔서 음료수라도 사서 건네시며 ‘욕 보재. 힘내라’ 하면서 용기를 주세요.

 

팔레스타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시면 서로 반가우실 거에요. 지난 많은 세월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도 하고, 서로가 알지 못했던 한국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얘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을 거에요.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한국과 팔레스타인이 따로 없다는 것을 느끼시기도 하겠지요.

 

한국으로 돌아가시면 팔레스타인에서 보고 느낀 것을 한국 사람들에게 들려주세요. 나는 말을 잘 못 하신다구요? 화려한 말보다는 솔직하고 진심을 담은 말이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 아닐까요?

 

아름다운 마무리

 

사람을 위한다는 것이 어디 뭐 특별한 것이 있나요?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 주는 거지요. 그들이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할 때 대신 그들의 입이 되어 주는 거지요.

 

그렇게 팔레스타인에서 지내시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하다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을 격려해 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내 마음에 용기가 생기시는 것을 느끼실 거에요. 그들을 도와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나의 삶에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느끼실 거에요. 나 혼자 조용하고 편안하게 삶을 마무리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리며 삶을 시작하고, 함께 어울리며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하실 거구요.

 

1948년에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점령한 자파와 바다

 

죽을 때까지 머리카락과 손톱은 자란다고 합니다. 자라는 머리카락과 손톱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머리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고 손으로 무언가 하기를 멈추지 말라는 거지요. 늙고 병든 몸이지만 그 몸뚱이에도 하루하루 죽어가는 부분이 있으면 하루하루 새롭게 태어나고 자라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삶을 마무리한다는 것은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산다고 바빠서 찾아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찾아보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제 나마 하는 것이겠지요. 서쪽 바다 너머 지는 노을이 아름다운 건 한 세월을 살았던 해가 마지막까지 남은 빛을 죄다 뿜어내고 사라지기 때문이겠지요.

여러분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기원합니다.

 

이루마 - It's your 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