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팔레스타인 갔던 이야기를 늦게나마 쓰기도 하고 고치고도 있는 글)
팔레스타인, 내 가슴에 물든
39_ 멈춰 거기서!
지금은 그동안 지내던 데이르 알 고쏜이라는 곳을 떠나 세바스티아(Sebastia)라고 하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머물기로 한 일정의 절반을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한 열흘이라도 다른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알고 싶어서 온 겁니다. 여기를 올 때도 약간의 일이 있었습니다.
일단 데이르 알 고쏜에 있던 친구들은 가지 말라고 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 해주고, 불편한 게 있으면 해결 해 줄 테니깐 가지 말라고 합니다. 저도 마음이 흔들리더라구요. 팔레스타인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이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다는 것이 조금 그랬습니다.
하지만 제가 조금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이 한국과 팔레스타인을 잇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친구들한테 불편해서 그런 거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세바스티아로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툴카렘으로 쎄르비스를 타고 가서 나블루스로 가고 거기서 다시 쎄르비스를 타면 되지요. 그런데 굳이 와엘이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합니다. 1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제가 앞자리에 앉고 뒷자리가 세 자리가 되니깐 친구 3명까지 함께 타고 세바스티아로 왔습니다.
밤길에 검문 중인 이스라엘 군인
세바스티아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차들이 길게 줄을 섭니다. 몇 번 지났던 길이기도 하고 그동안 차가 이렇게 막힌 적이 없었습니다. 조금 있어보니 이스라엘 군인들이 검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진기를 꺼내서 찍었구요. 우리 차가 군인들 가까이 가니깐 친구들이 걱정을 하며 사진기를 넣으라고 합니다. 혹시 이스라엘 군인이 볼지 모른다구요.
앞의 차들이 별 일 없이 지나갑니다. 그런데 저희 차를 세우더니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 저 사람(저를 가리키면서)은 누구냐를 묻습니다. 친구들의 신분증은 보자고도 않고 제 여권만 보자고 합니다. 검문소를 지나고 와엘이 제가 쿠피예(핫따)를 하고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차를 타고 일단 세바스티아에 있는 YDA 사무실로 왔습니다. 지난번에 만난 적이 있고, 여기서의 생활을 도와줄 무함마드와 위즈단도 만났습니다. 처음 보는 얼굴들과 인사도 하구요. 아쉬운 마음 많았지만 열흘 뒤에 다시 만나자고 와엘과 친구들도 떠나보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조금 다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바스티아’라는 이름 자체가 아랍식 이름은 아닙니다. 이 마을은 로마 시대 때부터 있던 마을입니다. 마을자체가 유적지이고 마을 사람들은 고대 문명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팔레스타인에 오시면 세바스티아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로마 원형 극장
역사와 유물이 세바스티아를 표현하는 하나의 말이라면 세바스티아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샤비 샤므론(Shavi Shamron)이란 이름의 이스라엘 점령촌은 세바스티아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일 겁니다.
1967년 전쟁 이전에는 점령촌 있던 자리에 요르단 있었습니다. 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는 이스라엘군 시설로 만들었지요. 처음엔 군사 훈련장 정도였던 것이 지금은 점점 더 큰 마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점령촌을 넓히면서 이스라엘이 올리브 밭을 점점 더 빼앗아 가고 있구요. 어제는 위즈단 가족들과 함께 올리브 밭으로 갔습니다. 올리브 수확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과 점령민들이 헤꼬질을 할지도 몰라서 함께 가기로 한 거지요.
이스라엘은 이미 위즈단 가족의 땅 60㎢를 빼앗았습니다. 두어해 전만 해도 가을이면 올리브 수확을 하던 곳을 지금은 철조망에 가로막혀 푸른 올리브 나무들을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습니다. 어제 간 곳은 아직은(?) 빼앗기지 않고 그나마 올리브 수확을 할 수 있는, 하지만 이곳도 이스라엘의 점령촌과 얼굴을 마주 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밭이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고 계시는 위즈단 아버지. 그 너머로 언덕위에 점령촌이 보인다
위즈단의 아버지와 삼촌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올리브 밭을 걷는데 위즈단 아버지가 일단 카메라는 숨기든지 아니면 나무들 사이에 숨어서 찍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올리브 밭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점령촌 사진과 영상을 찍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를 숨기고 아버지의 설명부터 들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점령촌에서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을 향해 오수를 버리는 관이 보였고 그 아래에는 썩은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연신 코를 가리키며 고약한 냄새를 맡아 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쓰레기를 팔레스타인인 거주 지역에 버린 것은 본 적이 있는데 오수를 버리는 장면은 말로만 듣다가 처음 봤습니다.
언덕 위로는 점령촌의 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감시탑이 주변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금은 군인들이 안 보는 것 같으니깐 얼른 사진을 찍으라고 했습니다. 채 1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저는 너댓장의 사진을 찍고 함께 갔던 한국인 친구 반다와 스위스 친구 마리안느가 얼른 영상을 찍었습니다.
지은 죄도 없이 죄 지은 것 마냥 바로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맨 뒤에 서서 ‘얄라 얄라(빨리 빨리)’ 가라고 하는 사이 벌써 저 멀리서 이스라엘 짚차 소리가 들립니다. 저도 덩달아 앞 사람들에게 ‘얄라 얄라’를 주문하면서 걷는데 바로 뒤에서 쿵쿵쿵 군인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멈춰! 거기서!’하며 군인들이 소리를 칩니다. 할 수 없지요. 일이 벌어졌으니 수습을 해야지요. 멈춰 서서 돌아보니 맨 뒤에 걷고 있던 아버지가 이스라엘 군인을 향해 섭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팔레스타인인보다는 외국인이 나서는 것이 낫겠다 싶어 바로 군인들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군인 : 여기서 뭐하는 거야?
미니 : 그냥 둘러본다.
군인 : 니 사진 찍었제?
미니 : 응
군인 : 여기서 사진 찍으면 안 된다.
미니 : 와?
군인 : 군사 지역이다.
미니 : 여기에 아무런 경고나 표시도 없는데 외국인인 내가 군사 지역인지, 사진을 찍으면 되는지 안 되는지를 우째 아노? 표시판을 세우지 그라노.
군인 : 이 넓은 지역에 표시판을 우째 다 세우노?
미니 : 그럼 표시판이 없는데 우리가 군사지역인지 우째 아노?
군인 : 하여튼 사진 찍으면 안 된다. 사진은 니 혼자 찍었나?
(다른 두 사람도 영상을 찍었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미니 : 그래 내 혼자 찍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다. 내 일이니깐 내하고 얘기 하자.
군인 : 사진기 보자
미니 : 자 여기 있다.
군인 : 여권 있제?
미니 : 자 봐라.
그 때부터 군인들은 여기저기 무전을 하더니 곧 경찰이 올 거라고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합니다. 햇볕이 뜨거워지는 것만큼 점점 열 받기 시작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 땅에 친구들 데려와서 사진 좀 찍었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이 난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점령촌에서 버린 오수가 흘러 나오는 곳
이 지역은 이스라엘 군인들과 점령민들이 수시로 팔레스타인인을 공격하는 지역이고 현장에 팔레스타인인이 함께 있기 때문에 군인들과 큰 소리 치기도 어렵습니다. 당장에 농민들은 여기서 올리브를 수확해야 하니깐요. 속으로 ‘흥분하지 말자’라고 하고 있으니깐 그 마음을 알았는지 반다가 옆에서 ‘싸우지 마라. 싸우지 마라. 민폐다’라고 합니다.
무작정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사이에 반다는 테잎을 빼서 위즈단에게 맡기고 마리안느도 테잎을 빼서 호주머니에 넣습니다. 때 마침 우리를 축복해 주려는지 잘 오지 않던 빗줄기가 시원스레 스쳐갑니다. 군인들은 군인들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고 그 사이에도 아버지와 삼촌은 저기서 올리브를 땁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고 나서야 군인들이 카메라와 여권을 돌려주며 이제 가도 좋다고 했고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예의바른(?) 제가 사람과 헤어질 때면 ‘슈크란(고맙습니다)’이라고 하겠지만 제 카메라와 여권, 아버지의 신분증만 챙겨서 말없이 돌아 섰습니다.
올리브 밭을 나서는데 아까 지나왔던 넓은 들이 나옵니다. 들어올 때도 약간 이상하게 생각한 밭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이런 평지가 많지 않은데 농민들이 가시 돋친 풀만 자라게 내 버려뒀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고랑도 파고 무언가를 심었던 흔적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역시나 아버지의 설명은 이스라엘이 농사를 못 짓게 해서 저렇게 됐다고 합니다.
눈앞에 올리브 열매가 익어가고 있어도 딸 수도 없고, 너른 들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 팔레스타인 농민들의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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